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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Joyfule 2019. 12. 17. 00:31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바리새인의 계층과 지위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많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통에 도전하는 것에 거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다소 사이점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과 음식법을 언급하고, 반면에 서기관들은 가르치는 권위를 논쟁한다. 그렇다면 서기관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권위있는 교사였다는 것이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특정의 율법과 실천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지닌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전문가로서 백성들 중에서 영향력과 합성적인 통제를 추구했고, 그리고 이러한 추구에서 예수와 경쟁했다.


랍비적 문헌의 바리새인


랍비 문헌 사용의 타당성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에 제시된 바리새인에 대한 변증적 기록을 역사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고, 또한 그것을 랍비 문서를 이해하는데 사용하려 했다. 이러한 연구에 영향을 끼친 학자는 쉬르어(Sch rer)다. 새로운 연구가 그 동안의 연구에서 간과된 제 2 성전기를 중심으로 다루려할 때 직면되는 문제는 자료와 근거의 부족이다.
랍비 문헌을 1세기의 자료로 활용할 때, 그 전제들이 있다:
첫째, 2, 3세기의 랍비들은 바리새인의 후기 모습이다; 둘째, 그들간의 생활 양식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셋째, 제 2 성전기 사건들과 제도들에 대한 기록들은 자세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고 편견이 없는 것이다; 넷째,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한 충분한 정보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들은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잘못된 것이거나 오용된 것이다:
첫째,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은 70년 이후의 랍비들의 등장에 공헌했지만, 증거는 충분치 않다. 초기 랍비 자료의 tannaitic 저자는 자신들을 바리새인들과 동일시하지 않았고, 바리새주의 외에 유대인 사회와 전통의 많은 다른 요소들은 유대주의가 제 2 성전의 파멸 후의 여러 세기 동안에 취한 모습에 공헌했다. 둘째, 바리새인과 랍비간에 연속성이 있을 지라도, 성전, 예루살렘 지도력, 그리고 분명한 정치적 정체성 등의 상실은 그 상징적 체제, 행동 양식 그리고 가치 등에 뿐아니라, 세계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에 주요한 조정을 일으켰다. 셋째, 랍비 문헌(미쉬나, 토세프타, 두 탈무드, 그리고 미드라쉬 수집)과 수집된 전승들은 장르, 목적, 연대, 그리고 기원 등에 있어서 다양하다. 넷째, 다소 믿을 만한 전승들은 예외가 되겠지만, 전승들은 불완전하고 또한 랍비 문헌의 저자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심도있게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 자료로 사용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주장의 신뢰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역사-비평적 고찰이 필요하다.


70년 이전의 바리새인 전승들

노이스너는 자신의 연구 범위를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에 관한 전승에 한정한다. 그는 655개의 본문에서 371개의 분리된 바리새적 전승들을 발견한다. 이것들 중에 462개의 본문에서 280개의 전승은 힐렐이라 불리는 바리새인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인 샴마이학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에 관한 전체 전승의 75%에 해당한다. 힐렐은 랍비들에게 매우 유명한 인물로, 바리새인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바벨로니아에서 유대로 왔는데, 그를 따르는 힐렐 해석학파는 샴마이 해석학파보다 우세했다.
노이스는 이 전승들이 관심을 둔 첫째 부류에는 농업의 십일조, 제사, 그리고 금기 사항들 등이었고, 둘째 부류에는 의식적 정결례이었다고 한다. 바리새인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분리시킨 것은 바로 이전에 성전의 제사장들에게만 적용했던 정결법을 이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히 식사 배경에 적용한다는 원칙이었다. 그것이 암시하는 바는 식탁이 제단과 유사하고, 또한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백성들 혹은 적어도 바리새적인 정결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처에 존재했다. 비록 바리새인이 성전을 반대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을 지라도, 이것은 성전없는 유대주의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아마도 십일조에 대한 바리새인의 강조는 식탁의 정결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섭취된 것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농업 생산물과 주로 관련되었다. 따라서 십일조 규칙은 식탁-교제에 영향을 주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은 식탁에서 토라를 거역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공동체 및 다른 집단들과의 차이를 기념하는 의식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식사들은 기독교의 성만찬(eucharist)이나 쿰란의 메시아적 식사와 유사하지도 않다. 거룩하게 하는 신성화(sanctification)는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가정에서 모든 식사에 적용되는 그러한 범주였다. 모든 식사는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생생한 신호였다.


Perushim의 정결법

"분리주의자들"을 의미하는 "perushim"은 아마도 외부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부여한 부정적인 명칭이었을 것이지만, 후에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적절한 적절한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거룩함"(Holiness)는 하나님께 받아 들여짐을 의미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하지 목하는 것으로부터 분리해서 제의(cult)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불결한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과정에서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사회에서 자신들을 분리시켰다. 토라에 대한 바리새적 해석은 그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분리시켰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전체 사회에 적용하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그들이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세푸스의 요한 하르카누스의 축제에 대한 이야기에서처럼 서로 경쟁적이다. 그 경쟁은 랍비 전승들에서 의식적 정결과 관련되지만, 정결법은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사두개인들과의 경쟁은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에 존재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랍비적 전승은 토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해석이 갈릴리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의 제시와 일치한다.


랍비 문헌들은 바리새인들을 식탁-교제 집단으로 묘사한다. 그들의 식사를 중심으로한 규칙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분리의 목적은 거룩하게 되기 위함으로, 결국은 그들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결과를 낳았고, 또한 현대적 의미로 단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랍비 문헌에서 의식의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상반된 태도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바리새인의 영향력은 예루살렘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다는 생각에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