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역사적 바리새인의 이미지(image)
영향과 통제
유대교에 대한 현재의 학자들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편재할 뿐아니라 지배적인 두 유령적 모습, 즉 바리새인과 산헤드린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극단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을을 수도 있다: 첫째, 바리새인들이 삶의 모든 국면에 일반적인 감독을 했다; 둘째, 그들은 개인적인 식탁 모임을 구성하기 위하여 사회에서 분리했다.
그러나 인물 연구를 통해 보았을 때,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지만, 소수당의 입장이었거나 다른 사람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다. 바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다 지역에서 활동했거나 유다 출신들이었다. 필리온, 가말리엘,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 시몬 등은 지도력을 행사했다. 여성의 이름이 바리새인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의 애매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바리새인이 되는 방법에 대한 진술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이미지는 사회학적 분석에서도 동일하다. 유대인 지도층, 즉 대제사장, 대제사장들, 장로들, 그리고 유명 인사들은 렌스키(G. Lenski)가 말하는 가신(retainers)들의 원조를 받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바로 이러한 가신의 부류에 속했다. 샌더스는 바리새인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음처럼 정리한다. 헤롯의 시대에 그들의 힘을 미력했고, 제도적 권위를 지니지도 않았다. 물론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그들이 간접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진술하지만, 살로메 통치 이후로는 온건하고 비효과적 반대를 주도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이 모든 회당을 주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디아스포라에게알려진 정결 관행도 바리새적 영향력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비록 그들이 1세기에 다소 영향력을 행사했을 지라도, 정치적으로 막강하지는 않은 듯하다. 로마 전쟁으로 다른 집단들이 정치적 근거를 상실했거나 혹은 그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였을 때, 토라에 전문가였고 토라를 지속적으로 해석했던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정의(definition)에 따라 유대주의를 다시 세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가치관은 항상 정치적 함축성을 지녔고, 그 실현을 이룩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정치권에서 밀려 났을 때, 그들의 해석과 실천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켰고 사회에 대한 동화에 저항케 했다. 일단 세력을 확보했을 때에는 프로그램을 준비시켰다.
바리새적 통제와 대중성: 변증자의 관점
전통적으로 유대인 학자들(A. Guttman; H. Maccoby)과 기독교인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 영역인 종교적 생활의 부분들을 통제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한 진영의 변증적 견해는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통제했고,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했다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진영의 견해는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통제했고, 그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양진영의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지배 계층"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샌더스는 양진영의 변증으이 출발점을 부인한다. 바리새인의 통제력이 미력했다는 점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많다(Smith, Neusner, Cohen, Goodman).
주전 63년에서 주후 66년간에 바리새인은 역사의 뒤안길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반-로마 운동을 전개한다(주전 20년과 4년 그리고 주후 6년). 그들의 분출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지속적으로 가르쳤다는 것, 그들이 영향를 끼쳤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저항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들의 분출은 바리새인들이 공적 생활에서 분리했다는 노이스너의 견해를 반대하지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이 정부 혹은 종교를 주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지한다.
사회적 및 경제적 상태
고대 종교 사회에서, 특히 로마 제국과 팔레스틴의 유대인 사회에서, 종교는 공동체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조직과 어우려져 있었다. 그러한 사회에서 살았던 바리새인은 정치적 영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한 채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종파(sects)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곧 유대인 사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제의적 혹은 종교적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다소의 독립적인 분파나 집단들 혹은 지도력을 형성할 수 있었을 지라도, 전체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에 묶여 있었다. 바리새인도 바로 그러한 구도에 속했던 것처럼 보인다.
바리새인의 사회적 위치는 불명확하다.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은 직업이 아니었고, 유대인으로서 사는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다. 평신도들인 바리새인들은 토라를 연구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형성했다. 모든 자료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토라에 대한 일관된 헌신은 그들의 본래적 프로그램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한 토라 준수의 회복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토라에 대한 엄격한 해석에 따라서 유대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것은 바리새인을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율법 전문가들이었다면, 그들 중에 대부분은 서기관들이었음에 틀림없다(참고. 막 2:16
일부 바리새적 제사장들이 있었고, 바리새적인 지배 계층도 있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지배 계층에 종속된 상태였지만, 소작농민이나 장인들과 같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보다는 높은 지위의 상태였다. 요세푸스는 제사장인 바리새인 한 사람을 언급하고, 랍비 문헌은 중요한 직책을 감당한 몇 사람을 제시한다. 물론 소수의 바리새인은 상인이나 무역상이었다는 주장도 있었고, 노이스너는 소수의 독립지주도 있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이 서기관들, 재판관들, 교사들, 그리고 제사장들이었다는 인식은 집단들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 고찰로 이끈다. 첫째, 집단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다. 개인들은 동시에 한 집단 이상에 속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이상의 사회적 집단에 속했을 것이고, 하나 이상을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둘째, 집단들은 시간에 따라 변했다. 하즈모니안 왕조 때의 바리새인들은 1세기 바리새인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셋째, 집단들은 몇가지 기능을 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교제였고 동시에 정치적인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을 것이다.
대의를 위한 죽음
황금 사자 사건, 갈릴리 유다의 봉기, 그리고 반-로마 전쟁 등의 세 사건은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하여, 그리고 참가자 자신의 명분을 위하여 죽은 가치있는 예들이다. 이 사건들은 바리새인들과 관련있고 시카리들과는 더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갈릴리 유다의 봉기는 바리새인 사독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반-로마 운동의 주동자들과 바리새인간에는 역사적 및 이념적 관련이 있다.
바리새인의 신학
초기의 랍비 문헌들은 주로 형식적이고 법적인 것들을 논쟁적 형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자선"에 대한 문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남아있지 않다. "18개 축복문"은 바리새인의 신앙을 반영할 수도 있다. 또한 신약성서와 요세푸스의 문헌도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요세푸스는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두 요점을 간략히 제시한다: 부활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의지의 협력.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에서 1-2세기 랍비 문헌과 200BC-200CE의 주요 문헌에 "언약적 규범주의"(convenantal nomism)가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신학을 탄나이틱 미드라쉼(tannaitic midrashim)의 비-형식적 부분과 바울의 주장을 비교적으로 고찰한 후 이러한 언약적 규범주의를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의 신학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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