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나무 - 서 숙
나무 옆에 서다
환절기에 옷장 문을 열고 보니 지난 해 이맘 때 무엇을 입고 지냈는지 막연했다. 장속의 모든 것이 마치 내가 짊어진 짐 같았다. 다 없애버리고 가벼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안락과 편리를 위해 애써 마련하고 성심으로 장만한 것들이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평소에 전심을 기울여 몰두하며 추구하던 것들에서 아연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부대끼고 터덜거리는 사람들과의 인연이나 빈약하고 알량한 머릿속의 축적 등 소위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싶다. 과거도 현재도, 문명도 소유도 성취도 다 부질없다. 번다한 것들 속에 알맹이를 놓치고 정작 소중한 생명력을 소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회의와 번민이 스며든다. 아니라고, 이건 아니라고 지금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픈 심리는 간헐적으로 기습적으로 싫증과 멀미를 동반하고 찾아든다. 물론 뻔히 알고 있다, 결국은 이내 있던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의 변덕이 찾아들면 피난처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세상사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 이리로 들라는 숲의 손짓이 반갑다. 위안을 찾아 쭈뼛거리는 나를 위해 숲은 현실도피의 막간극에 강력한 공모자가 되어준다. 다행이다. 숲이 깊을수록 몸담았던 현실을 훌쩍 거짓말처럼 뛰어넘는다.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태초의 자연 앞에서 외경심으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거진 삼림의 청량한 숲길이 내뿜는 신령스러움에 대한 경애의 정은 아마도 선험적인 것이다. 자연회귀에의 열망은 먼 먼 태초의 시간을 향한 원초적 수구초심이 아닐는지. 비우고 벗어나 홀가분하게 자유로운 본성을 회복하고픈 자가 치료의 한 방편일 것이다. 말하자면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휴식休息한다는 것. 息. 마음을 내려놓고 편한 숨을 쉰다. 숨고르기와 쉬어가기. 休. 사람 옆에 서있는 나무, 나무 옆에 서있는 사람. 사람과 나무. 나무와 함께 있을 때 마음과 정신이 두루 편안해지니 인간은 자연 옆에서 비로소 진정한 휴식의 시간에 든다.
과묵한 나무는 나의 푸념을 참을성 있게 듣고 난 후 말을 건넨다. 고독연습은 만병통치약이 될 수도 있어. 맘껏 고독하렴. 몇 백 년을 한 자리에서 홀로 우뚝한 내게 기대어 너도 나의 흉내를 내어 봐. 홀로 우뚝.
풀과 나무 사이
茶. 풀과 나무 사이에 인간이 들어있다. 차를 가까이하면 풀처럼 연약하지도 나무처럼 딱딱하지도 않은 삶의 자세가 자연히 터득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연함과 엄숙함 사이의 거리조절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 아는 인간의 모습을 지향하여 삶을 완성시키리라는 하나의 정언적 명령에 대한 직유법이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홀로 앉으면 확보된 시간과 공간 가운데 넓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여유가 생긴다. 둘이 마주하고 차를 즐기면 두런두런 조용한 담소 속에 세상사에 너그러워져서 삶의 문리가 트인다. 여럿이 모여 차를 즐기면 고운 눈물도 맑은 웃음도 안으로 새기는 선량함 속에 묻혔던 감성이 생기를 머금어 시흥이 도도하다.
옛사람은 차는 떨어지고 마련할 여유는 없고 하면 찻잔에 맹물을 부어 잔에 밴 차의 맛을 우려마시며 수미차水味茶라고 불렀다던데 그러니 결국 차를 마신다는 것은 물을 마시는 것이다. 차는 물이다. 물은 생명이다. 조용히 음미하되 경건한 마음이면서 천천히 마시되 생의 약동으로 맘껏 기쁨이 우러나오는 묘미를 즐기며 찻잔을 손에 든다. 생명수를 마시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찬가이며 살아있음에 대한 환희의 표현이다. 차를 즐기는 생활 속에 저절로 시, 서, 화 등의 예술을 이해하고 더불어 호흡할 수 있으며 목기와 도예에 애착을 갖게 되어 예술 전반의 감식안이 높아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깊은 생각과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기에 좋다(Tea with deep and high thinking). 살다가 힘이 들 때일수록 차를 마시는 시간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다향을 즐기며 동양의 정신세계를 생각한다. 서양의 문화는 시간에 대한 직선적 구조 속에 영원과 완벽함을 지향하여 세월을 견뎌 살아남는 것에 가치를 둔다. 석조건축의 견고함과 회화의 꽉 채운 화면이 이를 보여준다. 반면에 동양정신은 시간이 순환의 곡선구조를 지니며 그 흐름에 관대하다. 석조 대신 흙벽돌과 나무로 된 건축물은 세월과 풍상 뒤에 스러져서 아무런 자취도 없이 지수화풍의 자연으로 돌아간다. 육신도 자연도 잠깐 빌려 쓰고 돌려주는 것이다. 회화 세계도 높은 밀도 대신에 여백이 풍부하다. 남겨진 흰 바탕에 대해 찬찬히 음미하는 여유의 넉넉함이 차를 마시는 자세와 통한다. 풀과 나무 사이에서.
초록에 관한 명상
새파란 젊음이다. 봄마다 나무와 풀, 모든 식물은 초록의 싹을 틔운다. 그래서 녹색은 늘 새롭고 청정하다. 생명의 원천이 물이라면 젊음과 생기의 상징색은 초록이다. 이는 가장 시골스러운 색이고 일차산업을 상징하는 색이다. 갈아엎은 밭과 푸성귀, 그리고 곡식의 황금물결이 만들어내는 갈색과 녹색과 황색의 파노라마는 인간과 자연과 대지의 결속의 상징이다.
생명의 찬가 못지않게 휴식과 명상의 분위기도 아울러 만들어내는 녹색의 나뭇잎, 녹색의 숲은 지친 자를 위로하여 기력을 회복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나뭇잎을 온통 초록의 단색으로만 만들어놓았다고 시인 이상은 조물주의 빈약한 상상력을 탓했지만 조물주가 나뭇잎을 초록색 한 가지로만 만든 이유가 있다. 단순함에 대한 열망이다. 쉰다는 것은 나의 삶을 단순화시켜 중압감을 덜어내려는 노력이 아닐까. 도시의 자투리땅에 마련된 초록 앞에서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린이 필요해!”
‘바다에서는 편지를 쓰고 산속에서는 일기를 써라.’ 마음에 들어오는 말이다. 앞이 확 트인 바다에서는 외향적으로 되어 넓게 펼쳐진 세계와의 만남이 더 적합한 반면 숲속에 들면 우리의 자아가 안으로 깊어져서 내면으로의 사색이 더 어울린다고 여겨진다. 바다의 청색이 미래와 희망의 이미지라면 숲의 초록은 성찰과 고요의 분위기가 은은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신록이 녹음으로 가려는 때의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적한 날이었다. 수목원에서 풀밭에 자리를 펴고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있고 딸은 나무둥치에 기대어 각자 독서에 열심이었다. 남편은 열심히 숲을 찍던 사진기를 우리에게 앵글을 맞추었다. 주인공이었던 숲의 모습은 이제 배경이 되었다.
사진 속 숲의 모습으로부터 기꺼이 우리에게 한적한 평온을 바치겠다는 뜻을 읽는다. 그날의 책에 꽂혔던 책갈피에 그려진 천사상의 표정이 진지하다. 귀여운 아기모습의 천사는 꽃밭에 앉아 한 손에 책을 들고 늘 내게 묻는다. 꽃을 볼까, 책을 볼까? 천사의 고민을 바라보며 가장 좋은 휴식의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푸른 나무 옆에서 차를 마신다. 여백을 마련한다.(계간수필 2011년 가을(통권65호) 수록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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