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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그리고 그리움 - 윤모촌

Joyfule 2012. 10. 17. 11:39

 

    사람 그리고 그리움 - 윤모촌

 

 

가을이 깊어질 무렵이면 소슬한 바람결에 한 해가 또 가는구나 해지면서 공연히 쓸쓸해진다.

삼복더위를 지내고 나면 맹위를 떨치는 잔서속에서 9월을 넘기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함을 느낀다. 10월이 깊숙해지는구나 싶으면 무서리가 내리고 , 어느 날 풍새가 사나워지면 된서리가 내린다. 된서리가 내리면 하루 아침에 풀잎들이 사그라지는데, 이런 때면 겨우살이 걱정을 하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 놀라기도 한다.

상강 무렵이면 초목들의 풀이 꺾이는데, 이런 것에 빗대서 권불십년 權不十年이라 하였다. 서리맞은 풀처럼 권세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죄인을 다스릴 때 서릿발-추상같다는 말을 하지만, 근년에는 추상을 커녕 뜨뜻미지근한 바람만도 못하게 법 집행을 한다해서 사람들이 법의 위신을 업신여긴다.

고향엔 나보다 20년쯤 나이 많은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잘 불렀다.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가 어디서 흘러왔는지 아는 바가 없었고, 어려서 거지에 끌려다니는 것을 마을에서 빼돌렸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까닥에선지 그가 부르는 노래 소리에는 애조와 수심이 어렸다. 신고산타령, 정선아리랑, 담바구(담배)타령 등의 슬픈 가락들이었다.

나는 그때 그가 부르던 노래 '동래나 울산 담바구야...'하는 대목에서 울산의 지명을 처음으로 알았다. 육이오 전란의 복구가 한창이던 시절, 충청도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 울산의 바닷가 조그마한 학교에서 시를 쓰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얼굴을 모른 채 주고받은 횟수가 잦아지면서, 그에 이끌려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화사한 감상이 되기도 하나, 때로는 고독을 동반하는 사치스런 길이 되기도 한다. 동해 남부선 한적한 역에 닿았을 때 밤하늘엔 별이 촘촘하였다. 전깃불 없는 밤이 개 짖는 소리에 깊어가고....

바닷가 마을의 친구를 만난 후, 나는 그와 끊이지 않고 음심(音信)을 이어왔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런 사고로 변을 당해 세상을 떴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지만, 그런 일은 모두 하늘에 의해 정해진 것같다. 담바구타령으로 울산을 안 것도 그런 것이었고, 소설을 쓰는 울산 친구 B를 만난 것도 그런것이다. 소설을 쓰는 울산 친구가 소설집을 펴냈을 대 서울의 몇몇 친구와 자리를 함께 했다. 동리 선생은 새벽 2시가 넘도록 술잔을 돌리며 문학을 얘기 했다. 지금은 소설집을 낸 친구도 갔고,
동리선생도 세상 일에서 멀어져갔다.

담바구타령을 부르던 사람의 뒷소식이 묘연한 것도 가슴 아프다. 그가 38선을 넘어 내가 있는 마을로 와서 머슴을 살던 일....
그는 공산당 치하에서 떠받들려 감투를 썼지만, 그가 그런 자리에 나설 사람이 아니었다.

머슴살이를 하며 오로지 농사일만 하던 사람이다.

등에서 지게를 벗어놓을 줄 모르던 사람, 어질게만 보이던 그가 애조 띤 노래만을 부르던 모습,

그런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그가 보고싶고 그의 노래 소리 듣고 싶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