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라!
홀어머니 밑에 자란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친구가 늘 부러웠다. 친구의 전도로 중학생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에게도 아버지가 하늘에 있음을 믿음으로 깨달았다. 하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좋고 완전했다. 열등감을 털어버리고 열심히 공부했다. 긍정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신학 지식보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지금까지 나를 성장시켰다.
러시아에 있을 때 어느 날 부인 선교사가 귀국해야 했다. 홀로 남을 남편을 위해 반찬을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 반찬 종류를 정한 후 그는 시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재료들을 산 후 집에 돌아와 다듬고 물로 씻은 후 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떠났다. 홀로 남은 남편은 한 끼를 위해 반찬을 내놓고 먹기 시작했다. 참 맛있게 먹었다.
이 때 갑자기 뭔가 깨달아졌다. "난 지금 맛있는 반찬이란 물질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누라의 사랑 자체를 먹고 있다." 이와 동시에 성경 묵상과 해석 방법이 깨달아졌다. 지금까지 성경 해석을 어떻게 했는가? 위의 예로 설명한다면 이런 식이었다. 부인 선교사는 왜 그런 반찬들을 정했지? 왜 걸어서 시장에 갔을까? 가까워서 아니면 자가용이 없어서? 그럴 만한 어떤 사회학적 사정이 있었나?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런 연구 방법으로는 부인이 남편을 위해 한 일들의 동기가 사랑임을 영원히 밝혀내지 못한다. 이런 동기를 읽지 못한 학문적 연구 결과는 그저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사랑은 세워준다. 알고 보면 사랑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매개물이다.
그럼 성경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묵상하고 연구한 후 해석내지 설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이런 해석과 설교는 듣는 신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럼 과연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넓이, 폭과 높이를 알아내는 일에 얼마나 유용했는가?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신학은 사람을 교만케 만드는 지적 작업의 결과물이다.
성부의 예정과 선택을 논할 때도 신학자들은 시기, 방법이나 조건에 대해 논한다. 그러나 예정과 선택의 동기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절)
창조기사(창1-2장)을 신학적으로 세세히 연구하지만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 바로 창조 행위의 동기였음을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밝히지 못한다.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창1:26-27절)는 사실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잘 설명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창조주는 그에게 만물을 기꺼이 상속시켰다(창1;28절).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이 곧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다. 그렇다면 그의 행함은 항상 사랑의 행위이다. 어떤 존재냐가 어떻게 행하는가를 결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사랑의 관점보다 학문적 관점에서 창조기사를 분석하고 분해한다. 본문을 부분부분 쪼개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지만 그 마음은 따뜻하지 않고 차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후 그 사랑이 어떻게 부분부분 투영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 때 영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랑의 관점에서 성경은 연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와 신자에게 삶과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제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치 못한다면 사랑이 아닌 원리와 원칙만을 가르치는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지 않는다. 십계명(출20:3-17절)을 주기 전 하나님은 먼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20:1-2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출애굽 사건의 동기였다. 먼저 은총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시내산 율법을 기쁘게 준수하길 원했다.
요한복음의 다락방 훈화(요13-16장)는 이런 성구로 출발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절)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다락방 훈화의 정신이며 동기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락방 훈화를 해석한다면 제일 먼저 해석자의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리고 사랑과 계명 사이 관계가 다락방 훈화의 중심 주제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절)
제자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13:1-2절)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새 계명을 주었다(13:34절).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서로 사랑할 것이라고 말했다(14:15절). 그런 제자들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예수님도 그에게 자신을 나타낼 것이다(14:21절). 그 계명을 지킴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15:10절). 그리고 예수님의 계명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했다(15:12절).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자들의 사랑이 이웃 사랑의 근거이며 바탕이다. 나중 요한은 자신의 서신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치 않는다면 빛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요일2:10-11절). 신앙은 윤리의 바탕이다. 즉 신애는 곧 인애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설명된다. 신앙이 없는 세상 지혜가 헛된 이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 덕분(은혜)에 믿음으로 얻은 칭의는 반드시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윤리적 삶을 뜻하는 성화와 분리될 수 없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시킬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성화로 칭의의 진위를 알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이 때문에 칭의와 성화 사이 논쟁은 지극히 어리석다. 칭의는 당연히 믿음으로 얻지만 성화는 행함으로 이루어야 할 성장 과정이다.
신학은 당연히 지적(知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 지식으로 설교하면 안 된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와 문화를 통해 어떻게 설명되는 지를 밝힌 후 이를 신학 지식의 도움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머리의 도움으로 마음은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해질 것이다. 성경 해석과 설교는 사랑의 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삶과 인생에 의미와 목적을 제공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삶과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랑이 없다면 인생과 삶은 삭막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사랑은 삶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만 있다면 신앙 삶 자체도 진실해진다. 어떤 곤경도 극복하게 만든다. 마침내 승리자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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