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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가치.

Joyfule 2023. 10. 2. 10:46


 

 

 

    성경의 가치.

 

Ⅰ. 시작하는 말

기독교가 맞고있는 위기는 성경에 대한 관심의 약화이다. 그 관심의 약화는 성경에 대한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관심의 초점이 흐려질 때는 당연히 여러 가지의 방법론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관심이 가면 갈수록 약화되어 신학의 목적과 방법이 혼선을 빚고 있다. 인간은 본래 결과와 성취를 좋아한다. 시간이 갈수록 신학도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아 그를 경외하는 것이 신학 본연의 목적인데도 인간 욕구에 부합되게 갖가지의 신학을 만들어 교세 확장과 교인 확보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의식 있는 성도들은 모두 염려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속출하는 것은 성경의 가치를 너무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치를 약화시켜서 나타나는 현실의 문제점들을 한 두가지 지적함으로 문제 의식을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이 것이 성경 공부의 부족이다. 성경 공부하면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는 특수한 목회자들만이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대개 생각한다. 그러한 보편적인 생각들이 기독교 안에 만연되어 성경 공부는 신앙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기독교를 기독교답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성경 공부에 대한 잘못된 관점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유일한 기초와 목적이 성경 공부인데도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사실 엄청난 혼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는 것만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알려고는 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처세술에만 급급해 하는 것이 대개의 현실이다. 집단이나 사회 아니 교회라 하더라도 결과 중심으로 치닫고 성취를 제 일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모두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게 해주는 공부가 절대 필요하다. 최고의 학문을 한다고 자부하는 대학들도 대부분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방법과 처세술을 전수하는 집단으로 변해 버렸고 그런 쪽으로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다. 교회도 일반 집단을 본받아 성경 공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려고 노력하며 교회의 목적인 진리 전수와 전파를 망각해 가고 있다. 성경 공부가 왜 기독교의 필수 과목이며 성도생활의 기본인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성경의 가치가 약화됨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삶의 방법을 목적으로 알아 그것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이다. 교회도 교회생활이나 활동 그리고 행정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는 것에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에 불과한 것을 목적으로 설정해 두고 온 교인들을 그 쪽으로 달려가도록 만드는 것이 대개의 실정이다. 인간은 목적과 방법이 분명히 분별되지 않을 때 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많으면 힘이 빠지게 된다. 오늘의 신학과 교육이 성도들에게 힘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목적 없는 삶자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모두를 아름답게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교육은 사라지고 성경의 인물을 표본으로 삼아 그들처럼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공급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그것보다 더 힘든 삶은 없을 것이다. 삶은 더욱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지 않으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 외에도 성경의 가치가 올바르게 자리매김되지 않음으로 해서 나타나는 현실의 문제점은 상당히 많다. 여기서는 문제 자체를 지적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그 문제를 풀어 보려는 노력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치를 재고해 보는 것은 오늘의 교회 현실에 너무도 절실하다. 성경의 가치는 성경이 기록된 유일한 목적과도 부합된다. 성경이 기록된 것은 계시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성경의 가치가 신학에 있다고 보는 것이 성경신학의 정신이다. 성경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신학하게 됨에 있다. 이 글에서는 성경이 가치로운 근거를 간략히 서술하고 그 다음에 성경이 지니는 근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성경이 가치로운 근거

성경이 가치로운 근거는 성경의 내용과 특성이다. 성경은 언약이 성취되는 내용으로 그 골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가치롭다. 또한 성경은 다른 어떠한 서적이 지닐 수 없는 특수한 성질 때문에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성경이 지니는 특수한 성질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성경의 영감성과 자증성이다. 구약성경은 언약으로 신령한 복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성취로서 또한 신령한 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신령한 복이 언약되고 성취됨으로 참으로 가치로운 것이다. 성경이 영감성을 지니는 근거는 성경의 내적인 증거이고 영감성의 본질은 성령의 전적인 주관이며 영감성의 결과는 성경이 신적인 권위를 지니게 됨이다. 성경의 자증성은 구약과 신약이 완벽하게 체계를 지니면서 상호 증거를 해주는 것이다. 요컨대 성경이 신학적 가치와 생명적 가치 그리고 원리적 가치 등을 지니게 됨은 성경의 내용과 특성이 주요한 요인이다.
Ⅲ. 신학적 가치

신학적 가치는 성경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치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포괄적인 가치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학은 이해 순서 상으로 크게 3가지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을 지식함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이 세 가지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신학의 근거적인 가치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성경의 가치를 제일 앞에서 논증한다. 이에 비해 하나님을 지식함은 인간이 평생동안 하게 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신학의 과정적인 가치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을 지식함으로 따라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신학의 결과적인 가치로 설정 될 수 있다.

1.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성경의 근본적인 목적이며 가치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지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택자에게 은혜이며 최고의 가치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독자적인 것이며 능력의 드러냄이다. 어떠한 인간이나 사물에 의해서 보여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는데 직접 하나님이 나타나 본체를 드러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경 기록에 사용된 각 시대들의 배경을 주관함으로서 자기를 드러내시고 또한 성경 기자들의 지ㆍ정ㆍ의를 주관함으로 그들을 통하여 자기를 근본적으로 드러내셨다. 구약시대는 크게 족장시대와 왕정시대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신 족장시대의 주요한 요소들은 아담시대․노아시대․열조시대(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시대)․모세시대․여호수아시대․사사시대 등이다. 또한 왕정 시대의 주요한 요소들은 통일왕국시대(다윗왕과 솔로몬왕 시대)․분열왕국시대․포로시대․포로귀환시대 등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드러난 것이다. 성경 기록의 배경으로 사용된 신약시대는 크게 성령이 강림하기 이전의 예수 시대와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의 사도시대로 나누어진다. 예수 시대의 주요한 시대적인 배경은 예수 잉태의 배경․출생의 배경․복음전파시기의 배경․죽음의 배경․부활과 승천의 배경 등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활동하던 배경은 크게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 것과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신약성경의 기록 배경들은 모두 하나님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들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절대적인 의지 따라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계시를 받거나 깨달을 수 없다.

계시의 목적은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있다. 즉 신지식이 계시의 목적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말씀운동89, 가을․겨울호의 ‘계시란 무엇인가?’를 참고할 것). 계시가 지식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은 신학의 근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도록 그들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모두 주관하셨다. 성령께서 기자들의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케 하셨으며 선지자들의 뇌(腦) 속으로 이상을 주셨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을 보고 알았으며 전달하게 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 기자들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언어 등을 모두 주관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기자들의 생각 변화로부터 기록 활동가지 빠짐없이 모두 주관하였다. 성경 기자들이나 지금의 성도들에게나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다는 원천은 동일하다. 그런데도 자유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로 말을 하지만 그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의미에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도 구체적인 행동은 인간이 하고 또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하나님의 주권만큼 자유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역 즉, 계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경계시를 주신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계시로서 가치를 지니며 이 성경계시는 하나님을 지식하는 직접적인 근거로서 가치가 있다.

2. 하나님을 지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듣고 깨달음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본체는 볼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계시와 그 관계가 아주 밀접하다. 하나님의 영광은 계시로 주어질 뿐만 아니라 계시의 해석을 통하여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계에 충만하다(시 19:1). 세계의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다. 만사와 만유(萬有)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언약과 성취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구약성경의 언약은 여호와의 섭리와 언약 자손들의 찬양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한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성취는 예수를 통한 성취와 성령을 통한 성취로 되어 있다. 이 두 가지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은 총체적이며 충만한 것인데 이에 대한 오해가 매우 심하다. 신ㆍ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지금도 혹자들은 자기가 보기에 의아스럽고 비참하다고 보는 일들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줄로 알고 믿는다. 지금 되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점이다. 그래서 만사와 만유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고 있다.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물인 성경을 통하여 핵심적으로 드러났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는 지식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다. 이 참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성경은 참 지식의 보고(寶庫)이기에 가치로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으로 구체적으로 증거되었다. 전능하신 영광과 성실하신 영광과 주권적이신 영광 그리고 영원하신 영광과 자비하신 영광 등으로 증거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결국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증거하는 셈이다. 하나님을 지식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능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속성들은 그것들의 원리인 영광에 의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성실하시며 주권적이시며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시다.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속성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결국 하나님 계시의 결과인 영광의 표현인 것이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는 모두 그 영광 앞에 굴복하고 감탄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의 대표적인 예가 잠언서이다. 잠언서는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성을 여러 가지 비유로 잘 증거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들을 보고 알게 되면 총명해지고 명철해진다. 지각은 알고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경지이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마 5:8)이라고 약속하였다. 명철하고 총명한 자는 하나님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다. 지식과 명철과 지혜는 상호 근거와 결과적인 역할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지각 있는 자는 신학서로서의 최고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성경을 연구하게 되고 지각없는 자는 성경을 무시하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본분이다. 사람의 본분이라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자로서의 의무가 결코 아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주권자와 심판자로서 사람에게 주는 기업이나 분복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분류한다. 이것은 형식적인 분류이지 내용적인 분류는 되지 못한다. 사람의 내용은 영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화가 남자와 여자라는 형식적인 분류에 치중하여 가치를 매김으로 말미암아 낳은 엄청난 결과와 상태는 여기서 열거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우리 생활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 사람의 내용적인 분류는 택자와 불택자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박용기 목사가 저술한 성경적 기독교의 ‘기독교 인생관’을 참조할 것). 결국, 택자는 천국에서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불택자는 지옥에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심판이다.

Ⅳ. 생명적 가치

성경이 지니는 가치에서 생명서로서의 가치는 신학적 가치의 부수적 가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생명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하여서만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또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지니는 생명적 가치를 크게 3가지로 논증하고자 한다. 그 3가지는 성경이 영생을 주는 것과 생기를 주는 것 그리고 평안을 주는 것이다. 이 3가지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직접적 근거 역할을 해 준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알면 생기가 넘치며, 생기가 넘침으로 평안이 자리잡게 된다.

1. 영생을 주는 가치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영생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지 않는데 인간 스스로 영생을 결코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부수적인 목적도 택자에게 영생을 주려함에 있다. 영생은 진정한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이 영생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복이다. 인생은 이 땅에서 유한한 생명으로 사는 생명임에 비해 영생은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다. 이 땅에서 사는 생명은 육체가 있음으로 반드시 고통이 동반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신령한 몸을 지니고 완전한 안식을 누리며 살게된다.
그런데 이 영생의 근거 내지 요건은 하나님의 예정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과정에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 땅에서 살면서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예정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로 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정의 근본적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붙은 종속적인 대상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예정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를 중보로 묘사한다. 예수의 보증이 없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교회에 연계시키면 예수는 성도의 머리이시며 성도는 예수의 지체이다.

2. 생기를 주는 가치이다.
근본적으로 생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생기는 생명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원한 생명이 있으므로 그것이 현상세계에 드러나는 것이다. 영원세계에서 생기가 있는 사람은 산 사람이고 생기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신령한 의미에서 생기는 생사의 기준이 된다.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이 생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힘은 표면적으로는 육신의 양식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정신세계에 정보를 받아들임으로 그것에 의해 생기의 정도가 좌우되는 것이다. 자기에게 좋은 정보가 들어오면 힘이 나고, 자기에게 좋지 않은 정보가 들어왔다고 생각되면 힘이 빠지는 것이다. 동양문화에서는 예로부터 기운을 뜻하는 기(氣)자를 사용해 왔는데 그 글자 안에 쌀미(米)자가 들어 있다. 그래서 쌀을 먹으면 날아갈 듯한 힘이 생기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언어는 문화와 역사와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반복으로 인하여 유물론주의가 깊이 자리잡고 있다. 성경에 증거되는 생기는 마음과 육신을 좌지우지하는 힘인 것이다. 생기의 수단은 호흡으로 나타난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쉼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것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호흡의 상태가 달라진다. 이 마음은 두뇌의 정보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뇌속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정보를 주신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생기가 있다는 증거는 활동이나 운동이다. 생기가 있는 존재는 모두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활동이나 운동의 근본적인 요인이나 근거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자체적으로 운동하는 것이다. 말씀이 진정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운동은 인간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시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인간의 생사를 초월하여 운동하는 것이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생기의 근본이 된다. 세계의 운동은 말씀의 운동에 의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운동은 종속적이다.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말씀에 의한 것이며 직접적으로는 생기에 의한 것이다.

3. 평안을 주는 가치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심령의 즐거움이다. 이것은 유심론자들이 말하고 또 이상으로 여기는 평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안의 근본적인 출처는 하나님이지만 유심론자들이 말하는 평안의 출처는 인간 자신이다. 그래서 유심론자들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욕심을 스스로 제거하면 평안하게 된다고 착각한다. 심령의 즐거움이 주어지는 원리와 과정을 성경은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평안을 주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심령의 즐거움은 성령 소욕의 결과이고 심령의 괴로움은 육체 소욕의 결과이다. 심령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는다. 심령의 즐거움은 육체의 고난을 넉넉히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평안의 효력은 양약이다. 심령의 평안은 뼈를 윤택하게 하고 근심은 뼈를 건조하게 만든다고 성경은 증거한다(잠 3:8․15:30․17:22). 사람의 몸이 대부분 물로 되어 있다. 이 물을 심령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몸을 좌우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심령이 그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 이 심령은 성경말씀이 아니고는 자라지 않는다. 오직 성경말씀에 의해 자라는 것이 심령이다. 이 심령이 뼈의 골수(骨髓)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뼈의 골수를 기계에 비유하자면 윤활유에 해당된다. 윤활유가 없거나 녹슬게 되면 기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뼈에 골수가 없어지면서 생기는 병이 바로 골다공증(骨多孔症)이다. 이렇게 중요한 평안은 육체를 수련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명철로부터 주어진다. 이 명철은 마음이 밝아지는 것인데, 마음이 밝고 청결하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영광이 보이므로 자기의 계획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Ⅴ. 원리적 가치

모든 것에서 진정한 원리는 하나가 존재한다. 그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만사와 만유에 대한 원리적인 해석이 들어 있다. 성경이 원리서(原理書)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됨은 위에서 언급된 두 가지 근거에서 말미암는다. 즉 성경으로 신학이 가능해지고 신학에 의해서 진정한 생명이 있게 되는 것이며 진정한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야 원리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며(요 17:3) 영생은 진정한 생명으로 모든 가치의 으뜸이며 원리이다. 생명이 있음으로 뇌(腦)의 활동이 가능한데 뇌의 주요한 활동은 정보를 받는 것(다니엘서에 특히 많음)과 분별하는 것(롬 12:2) 그리고 기억하는 것(신 8:2)이다. 성경에는 만사와 만유에 대한 분별의 원리가 있다. 여기서는 만사의 원리를 생명적인 것과 결부하여 소유의 원리로 설정하였고 만유의 문제는 존재의 원리로 설정하였다.

1. 분별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분별은 나누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선악의 분별과 택자와 불택자의 나눔 등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의 원리가 성경에 잘 강조되고 있다. 그 분별의 원리는 바로 하나님의 기준이다. 하나님이 분별하는 기준은 절대적이시다. 모든 인간의 주관적인 기준을 초월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정하는 기준도 초월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는 상대자이다. 이 상대자는 절대적인 분별 기준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따라 나누는 선악의 범주에 종속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기준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결과에 종속될 뿐이다.

이 분별의 원리를 이해함이 비교 심리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된다. 비교 심리는 인간의 본능적인 사고 체계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된 대로 인간은 상대적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한 분별의 원리가 수납되지 않으면 인간은 끊임없이 상대자와 비교를 한다. 비교한 결과 상대자가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될 때는 열등감에 젖고 상대자가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될 때는 우월감에 젖는 것이 보편적인 사고의 흐름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될 때는 남자 쪽이 우월감을 갖게 된다. 반대로 여자가 남자보다 여러 가지 상황 면에서 낫다라고 생각될 때 여자 쪽이 잘못된 행복감에 젖는다. 또는 늙은이나 젊은이 양쪽에서 어느 한 쪽이 더 값지다고 생각하는 것도 본능적인 사고이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것도 젊을 때가 늙은 때보다 더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본능적인 비교 심리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비교 심리 철학이 성경에도 나타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사람의 수를 계수할 때에 여자와 어린아이는 수에 넣지 않은 내용이 있다(특히 구약성경의 민수기서에 많으며 신약성경의 복음서에도 더러 있음). 그것은 하나님이 복을 언약하시고 그 복의 내용인 생육과 정복과 통치를 이루는 목적을 강조하려는 데서 설명된 것이지, 그러한 계수 과정을 통해 남존여비 사상이나 경로 사상을 드러내는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인간과 사물을 비교하여 인간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유심론적인 것이고, 사물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유물론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모두는 분별의 원리가 없이 시대와 상황 따라 주어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분별과 비교의 산물이다.
이러한 비교 심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결과인 은사가 인정됨으로 극복된다. 왜냐하면 은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따라 받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어진 결과 자체를 붙들고 비교하는 현상학이 아니다. 성경은 근본적인 주권과 능력이 설명된 원리서이다.

2. 소유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모든 소유의 원리 내지 원천은 하나님의 분배이다. 인간이 소유한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자기 스스로 지니게 된 것은 없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는데 가지게 된 것이 없다. 욥은 자기가 소유하던 것이 없어졌을 때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고백하였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는 주권적이시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주셨다가 가져 가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재물을 많이 지니었던 솔로몬은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라고 단언하였다. 여기서 비록 표현은 재물 자체가 날개가 있어 날아간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성은 인간의 소유욕을 초월한다. 인간이 가지고 싶어하는 소유욕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과 권한대로 인간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처세술을 초월한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혜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고 수고하게 하는데도 그것을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이 수고한 대가로 모든 것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의 생명적 가치에서 언급되었듯이 수고할 힘을 하나님께서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혜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고 수고하게 하여 소유하게 되는 상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분배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소유 중에서 어는 것 하나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소유의 현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소유의 원리를 깊이 인식하지 못함의 결과이다.

이러한 소유의 원리 이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소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글에서 지도자가 무장하고 경계해야 될 사악성과 욕심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즉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는 내용이다. 인간의 소유욕은 인간의 본능이며 사악성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이 증거하고 또 인류의 역사가 증거해 주듯이 인간은 사람과 재물과 명예를 소유하기 원했다. 이러한 소유욕 때문에 전쟁과 고통이 있다. 그러나 소유 욕망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루어진 실상은 아니다. 하나님이 분배하는 대로 소유하게 된다는 소유의 원리는 욕망을 제거하게 만들고 어떠한 처지에서도 자족하게 만드는 참으로 힘이 있는 진리이다.

3. 존재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일반 철학에서는 존재론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존재의 원리나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지 못하기 때문에 그 근거를 파면 팔수록 더욱 더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존재의 원리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모든 만유와 만상 그리고 만사의 존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해답이다. 하나님의 존재 능력은 무한하다. 인간의 생사를 초월하며 기한을 초월한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인간의 출생을 조상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조상 숭배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 결국 신화를 만들어 낸다. 인간과 만상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가 영원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고 분별해주고 있다.
이러한 존재의 원리 이해는 성도로 하여금 처세술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처세술은 근본을 망각한 인간 존재의 수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본다고 성경에서 강조하여 누차 증거해 준다(신 10:17, 삼상 16:7, 롬 2:11, 벧전 1:17 등). 성경에서 말하는 외모는 인간 주위를 두르고 있는 모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외모는 인간의 생김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재산과 학벌과 인맥 관계 등의 모든 현상을 말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인간이 존재하여 살게 되는 목적 인식을 말한다. 신학에 목적을 두지 않는 모든 처세술은 허무한 것이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 존재한다는 처세술 자체는 근본이 없는 것이다. 존재의 원리 이해는 일반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이다. 성경이 아니고는 무엇에 해답이 있으랴!

Ⅴ. 마무리하는 말

성경의 가치는 근본적이며 총체적이다. 일반적으로 인격의 3요소를 지ㆍ정ㆍ의라고 본다. 이 지ㆍ정ㆍ의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심적(心的) 요소이다. 지ㆍ정ㆍ의에서 지(知)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마음의 근거 내지 기초가 된다. 지ㆍ정ㆍ의에서 정(情)은 감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마음의 생각 내지 상태이다. 지ㆍ정ㆍ의에서 의(意)는 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마음의 결과 내지 결정이다. 일반 학문이나 철학에서는 이 세 가지는 분리되어도 각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지식이 최고로 가치롭다고 여길 때는 감성과 의지는 자연히 무시된다. 또한 의지가 최고로 중요하다고 여길 때는 지식과 감성이 무시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들이 생기는 이유는 그것들에 근본적인 관점과 출발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단추가 잘못 끼워지게 되면 그 이하의 모든 단추는 맞지 않게 되어 있는 법이다. 성경이야말로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주는 해석서이다.

성경은 참 지식과 명철과 지혜를 준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과 명철과 지혜는 일반 학문이나 철학에서 정의되는 지ㆍ정ㆍ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근본적인 차이점은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차이점이다. 이것은 용어 어의의 표면적인 차이가 아니라 의미의 이면적인 차이이다. 성경은 지식과 명철과 지혜의 근거를 하나님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해 알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알 수 없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자기를 알게 하시며 명철하게 하시며 지혜롭게 하신다. 지식과 명철과 지혜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상호 유기적이다. 이것이 생명이며 원리이다. 이 세 가지는 상호 근거적 역할과 결과적 역할을 동시에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무이한 원천이며 근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 생명이다. 참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야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원리와 해석을 준다.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데 거하심이요 공의와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 사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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