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배타성.
배타성의 근원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다른 종교나 그 종교행위를 부정하거나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 개인의 생각과 행위를 보면 다른 종교를 경멸하고 부인하며 오직 기독교만을 전달하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비칩니다.
왜 그렇게 오만하고 독선적일까???
자기들은 이세상 사람이 아닌가??
지네들 머리에도 역시 무식과 어리석음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도데체 무엇이 잘났다고 저러는가??
포용력이 없고 옹졸하고 재미도 없고, 자기식으로만 생각하고,
또 따지기는 얼마나 잘 따지는지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고..... 교회의 목회자들이 오히려 비리를 일삼는 자들이 많은데....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잘못은 뒤로 감춘 채... 예수믿고 천국가라고???
저것들 보기 싫어서라도 천국 못가겠다...!! 라는 것이 불신자들의 불만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불만이 해소될 가망은 없어 보입니다.
단지 왜 그러는지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아래 글들이 길고 지루하긴 하여도 최대한도로 요약한 것입니다.
유심히 읽어보시면 기독교인들을 알 수 있습니다.
- 선민의식
고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대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에 대해서는 그 인격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은 짐승과도 다름이 없는 본능적인 사람일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신약시대 곧 교회시대에는 유대인들과 같은 극단적인 선민의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성구와도 같이
"성령으로써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중생인)"의 의식과 그렇지 못한 "사람(자연인)" 사이의 의식에는 건너지 못할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교인들 사이라도 그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즉 중생인은 신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 적어도,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합니다.
반면에 자연인은 스스로의 견해나 학문 등 세속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이런 차이는 일상적인 사소한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중생인은 자신의 입장을 절대 굽히지 않습니다.
신이 사람에게 입장을 굽힐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입만 열었다 하면 교훈적인 이야기나 성경구절을 꿰면서 솔직한 자기 심정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융통성도 없고 고지식하기가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들을 보통 사람이 맞닥뜨리면 실로 황당하고, 교인들과는 통하지 않는 무엇이 있고,
교인들이 이해심이 부족하고 옹졸하게 느껴집니다.
더욱이, 보다 교화된 사람은 그 고집이 대단하여 자신이 희생될(십자가를 질) 지언정 절대 세파의 흐름에 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덜 떠러지거나, 타락한 교인, 나이롱 교인들은 쉽게 세파에 굴복합니다.
- 심판적 배타성
심판적 배타성이란 유대인의 가나안 침략에서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구약에 기록된 것인데, 가나안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음란한 종교행위를 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그들은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할 존재들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족속은,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약속을 받은 족속으로써 가나안을 심판하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은 심판의 도구가 되어 타민족을 멸망시키는 일을 수행한 것입니다.
즉 심판의 도구가 되어 타를 심판하는 성격을 심판적 배타성이라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가 전세계적인 심판이라면 이는 국지적(局地的)인 심판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가나안 등 이방 풍속을 따라 행하게되면
역으로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고 "신명기" 등에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은 바로 그와 같이 이스라엘이 타락하였기 때문이라고 예언, 증언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타락하였고 멸망하였습니다.
이런 심판의 속성은 장차 대 종말심판의 패러다임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이런 배타적 심판성을, 약하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앞장서서 노동운동 등 사회의 부조리를 배격하는 운동은 긍정적으로 나타나는 실례이고,
장승이나 단군상 등을 부수는 행위가 일부 종파의 극소수의 광신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그 부정적 실례입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정치권력이 교회의 그 "배타적 심판 속성"을 역이용한 실례입니다.)
(빈라덴이 이스람교의 심판적 배타성(성전)을 정치적으로 역이용하려다 오히려 자기가 당한 것도 그 실례입니다.)
- 자정적(自淨的) 배타성
위 심판(審判)적 배타성은 그대로 자정(自淨)적 배타성으로 이어집니다.
즉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자정(自淨) 노력입니다.
신민(神民)으로서 멸망의 선언 중 가장 강조되는 부분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와 "우상을 만들거나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라는 두 계명에 있습니다.
다른 신이란 "애굽에서 홍해를 가르고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낸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
- 즉 그들이 실제적으로 경험한 살아 계시며, 스스로를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탐심으로 표상(標象)되는 모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의 신입니다.
이 부분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신약교회에 있어서도 민감하게 대두되는 부분입니다.
교회 내부에 유입되는 다른 종교의 풍습과 사상, 성경에 위배되는 모든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교리나 신표상(神標象) 등은
신명(神命)을 지키려는 근본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강하게 반발되며
결국 교회는 분열되고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고 죽이는 참혹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교회의 절반이 죽더라도 그 신명(神命)을 지키지 못하면 다함께 타락하고 망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참상이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우상(偶像)"이란 간단하게 말해, 손으로 새겨만든 모든 신상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손으로 새겨만든 것만 우상이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신의 성품이 아닌 것을 신의 표상(標象)으로 교리화(敎理化) 하는 것도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오감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즉 인간이 신의 모습이나 그 성격을 모두 경험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형상 또는 표상(標象)과 표상(表象)을 만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교인들은 손으로 새겨만든 우상과 제사 등 다른 신위(神位)에게 절하는 행위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 제사에 대한 거부
제사에 대한 거부는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첫 번째 순교자를 낸 원인입니다.
기독교 보다 100년이나 앞서서 들어온 천주교는 제사문제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0 0 0 신위(神位)"라고 하는 - 곧 제문(祭文)만 안 써붙이는 조건으로 모든 제사의 절차를 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한말에 들어오게 된 개신교는 아직까지 제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제사는 조상님께 죽어서도 효를 다하는 미풍양속이며 조상님이 비록 죽었지만
마치 살아있는 듯 절하므로 그 효심을 드러냅니다"라고 단 한번 말했다가 교인들의 반발로 인해 엄청난 곤욕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조상님께 대한 효(孝)나 조상님을 추모하는 거나 가족의 단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의 귀신에 대해 절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십계명 중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는 제1 계명을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제사자체를 거부하지는 않고, 음식상은 차려서 가족이 함께 먹고,
절하는 대신에 조상님을 추모하는 예배로 제사를 가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위는 기독교인에게는 자정적인 배타성입니다.
그러나 가족간에는 불화의 요인이 됩니다.
기독교인들 대개는 가족의 제사에 음식을 만드는 등, 참석을 하기는 하지만 절하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 다른 불신가족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는 절하므로 조상을 섬기지만 저들은 기도를 통해 나름대로 조상에 대한 추모를 하고 있구나" 라고 이해를 해주면 조용하게 됩니다.
만일 장남이 교인이어서 교회식으로 제사를 지내면 믿지 않는 동생은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제문을 써붙이고 엎드려 절하던 관습을 버릴 수가 없는 동생들의 심정을 장남이 헤아려서,
따로 동생에게 추모사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든지 하는 방법을 권해보고 싶습니다.
꼭 유교식의 제사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 철학 등 세속 학문에 대한 거부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많은 철학이 있어 나름대로 신과 세계를 정의하고 합리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정의하는 일이나 신에 대한 계명을 가름하는 일은 그대로 성경적 사상에 변질을 초래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점을 처음부터 강하게 주의 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사람의 사유(思惟)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신명(神命)을 선포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즉 사람중심의 생각(自然世界觀)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신중심의 생각(主權世界觀)을 선포합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읽어보면 다른 경전들이 사람들의 합리적인 교훈과 철학을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
성경은 철저하게 주인공들의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여 기록하고 그 궁극에는 신의 구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강력하게 교회와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경계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교회가 타락하여 배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어떤 교회의 내부에는 사탄의 회가 있다고 경고합니다.
신실한 예수쟁이는 그 사탄의 회가 있는데서 나와야 합니다.
끝까지 신의 입장에서 신앙을 지키는 자만 상급을 얻습니다.
성경의 한쪽면은 구원의 소식이고 그 이면은 심판의 소식입니다.
주권자이신 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책입니다.
진정한 예수교인은 이 책에 따라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고 배타적인 부분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
이처럼 기독교의 배타성은 뿌리가 깊은 것이고 세상과의 화합이나 타협이 근본적으로 차단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배타성을 지키는 자만이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배타성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방법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기독교가 그 배타적인 성서의 교훈을 버리고 세속의 종교들을 포용하고 흡수하면 결국 종말적인 세계통일종교가 되며,
적그리스도의 정치권력에 빌붙은 음녀(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실제 생활에서 세상의 문화와 성서적인 문화 사이에서 그 충돌되는 부분을 합리적으로 비켜나가도록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예컨데 제사문제 같은 것, 그리고 다른 종교가 사용하는 신상에 관한 태도, 일반 문화 예술에 대한 성서적 해석,
기타 성도덕 등 윤리문제에 대한 성서적 해석 등이 그 주요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보다 성서적이고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비기독교인들도 만일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적극 반대하고 나서는 사항이 있다면 그 주장을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절대로 비합리적이거나 무근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장차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나름대로 내린 합리적이고 정당한 결론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광신도들의 행위를 마치 기독교 전체의 공식적인 의사인양 착각을 하고 분개하면 실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에도 범죄자가 있는 것처럼 교회 내에서도 금지하는 사항을 개인적으로 어기는 자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것이 사회적으로 악한 일이라면 법에 따라 심판을 받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 일들로 해서 하나님 찾기를 외면한다면 스스로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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