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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을 복제할 수 있는가?

Joyfule 2019. 11. 17. 13:57



 
    성령의 사람을 복제할 수 있는가?



영화 쥬라기공원은 사람들에게 공룡에 대한 갈급함을 채워주며 고대시대의 아련한 환상을 현실로 착각하게 만들어주었다. 과학 스릴러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쥬라기 공원>1993년 개봉 당시, 전세계 박스오피스 1, 9억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린 것은 물론, 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지금까지도 영화사를 대표하는 SF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내용인즉슨, 코스타리카 서해안의 한 섬에 세워진 테마 파크 쥬라기 공원’. 최신 복제 기술로 살아난 공룡들이 활보하는 이곳에 공룡학자를 비롯한 각계의 전문가가 일반 공개에 앞서 정밀 안전 진단을 위한 투어에 나선다.

그러나 최첨단 컴퓨터 시스템으로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공룡들이 예기치 않은 사고로 폭주하게 되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태풍까지 몰려오면서 일행들의 투어는 순식간에 생존을 위한 사투의 현장으로 뒤바뀌며 관객들의 호흡을 멈추게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과연 고대시대에 멸종된 공룡을 어떻게 복원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영화 쥬라기공원에서는, 송진이 굳어진 호박(amber)에 갇혔던 모기가 빤 공룡의 피에서 DNA를 축출해서, 이를 공룡으로 복원시켰다는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DNA는 잘 보존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설령 구했다고 하더라도 공룡의 난자를 구해야 한다. 또 복원시켰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기후와 환경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먹이 또한 그 시대의 식물이나 동물을 섭취해야 한다는 등 첩첩산중이다. 말하자면 공룡을 복원하려면 중생대의 환경까지 복원시켜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사박물관의 공룡 뼈를 보면서 고대시대를 추억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그런 일이 교회에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추억 속의 인물은 바로 성령의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은 성경의 주인공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교회에서는 영접기도행위를 마치면 성령이 안에 들어오신다고 가르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재현하는 성령의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교단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은, 성령의 사람은 성경이 기록되었던 시대에만 가능했던 일이라고 에둘러 덮고 있다. 말하자면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사람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한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단속을 하며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에게만 말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영성학교는 아니다. 중생대시대의 공룡을 복원하는 것처럼, 성령의 사람을 복제하는 거창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하고 싶다.

 

1. 성령이 내주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도 말하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을 일컫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일생을 살아갔던 사람인 셈이다. 말하자면 성경의 위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는 증거에 대해 살펴보자.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영접하는 기도에 동의하고 교회에 나오면 그 때부터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는 아무런 느낌도 없고 성령이 이끄시는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이 내주하였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일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위인들이 소개되어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이 그러하였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이 안에 거주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이들처럼 탁월한 증거가 없더라도, 적어도 삶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꾸로 삶은 고단하고 팍팍하고 마음은 건조하고 영혼은 냉랭하다. 그런데도 교회에만 나오면 성령이 함께 계시다고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해주시며,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 강조하는 성경공부나 각종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담임목사의 설교를 빠짐없이 들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런 교육 프로그램이나 성경공부를 평생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필자가 교회에서 시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새 신자나 성경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런 교육프로그램이나 성경공부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매년마다 비슷비슷한 교육 프로그램을 들여와서 공부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G12, 40일 양육, 두 날개, 알파코스, 전도폭발 등,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제목은 바뀌었지만 내용이 그만그만한 교육프로그램을 해마다 들여와서 공부하라고 성화를 대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절대 미덕인 줄로 아는 교인들은, 교회내의 성경공부와 더불어 외부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느라고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교인들이 탁월한 능력의 제자가 되어 교회를 부흥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는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위의 말씀은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신신당부한 내용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성령이 임하시면,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받아 탁월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라고 번역한 헬라어 내용은, 에펠돈테스(have come) 투 하기우 퓨뉴마토스(the Holy Spirit) 엡 휘마스(upon you)이다. ‘너희에게 성령이 위에 오시면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오시면 예외 없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다면 1분짜리 영접기도를 마치면 성령이 자판기처럼 들어오신다고 말하는, 작금의 우리네 교회의 교인들은 예외 없이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가야 할 것이다.

 

성령이 누구신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분이 우리에게 들어오시면 악한 영과 싸워서 귀신을 쫒아내며, 귀신들이 일으킨 고질병을 치유하고, 기적과 이적으로 삶의 지난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들어오셨다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목회자들조차, 자신에게 그런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죄다 자의적으로 해석한 성경말씀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살펴보라.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가르치고 성령이 내려오는 기도를 훈련시키고 교제하였을 뿐이다. 예수님의 행적으로 가르치고 교제하는 것은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내려오는 기도훈련을 시키는 일은 없다. 1분짜리 영접기도를 마치면 성령이 자판기처럼 들어온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이 내려오는 기도훈련이 필요 없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이 주시는 탁월한 영적 능력이 없이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야 한다.

 

2. 성령의 사람이 되는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예수님은 제자의 조건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결단을 요구하고 계시다. 그래서 당신의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을 충족하고 계신가? 우리네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앙행위는 영접기도와 주일성수, 십일조와 희생적인 교회봉사를 말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예배의식과 신앙행위들이 제자의 조건으로 성경에 언급된 적이 없다. 그래서 성령께서 필자에게 지켜보시겠다고 말한 5가지 조건을 말씀드리겠다.

 

1) 쉬지 않는 기도를 하는지 지켜보겠다.

 

성령께서 처음 목록으로 하신 항목이 바로 쉬지 않는 기도를 하는 지에 대한 여부였다. 우리네 크리스천 중에서 이 항목에 합격한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쉬지 않는 기도를 가르치는 교회도 없고, 개인적으로 이런 기도방식을 삶에 적용하려고 하는 이들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도 깨어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였으며,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게 죄라고까지 말씀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크리스천을 거의 볼 수 없는 게, 우리가 마주한 차가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하는 것일까? 이 역시 성령께서 말씀해주신 것을 옮겨드리겠다. “아침, 저녁으로 하고 시간 나는 대로 틈날 때 나를 찾으라고 하여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은 장소와 시간인, 아침과 밤에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낮에도 틈나는 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며,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기도를 하는 기도방식을 말한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첫 번째 항목부터 부족함을 보이는 것이다.

 

2) 믿음을 보이는지 지켜보겠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그런 선물은 믿음을 보이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다르다.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야 비로소 믿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네 믿음이 크다라는 칭찬을 들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민족이 개로 비하되는 모멸감을 참아가며 예수님께 간청했을 때, 믿음이 크다는 칭찬과 함께 응답을 받았다. 자신의 종의 병이 낫기를 간구한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예수님이 가보자는 명령에 말만 하시면 순종하겠다는 대답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이만한 믿음이 없다는 최고의 칭찬을 들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말할 나위없다. 자신의 외아들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라. 그래서 당신은 믿음을 보이며 살아가는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성경에서 약속한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없는 셈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을 보이는 자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날마다 쉬지 않고 자신을 찾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행위로 믿음을 보이고 있는가?

 

3) 시험을 이기는지 지켜보겠다.

 

시험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라죠이며, ‘시험에 든다는 뜻은 죄에 걸려 넘어진다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그래서 사탄의 다른 이름으로, ‘시험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시험은 죄와 동일한 뜻이며, 시험을 이긴다는 의미는 죄와 싸워 이긴다는 말이 된다. 죄란 하나님이 싫어하는 생각과 성품, 말과 행동을 아우르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멀리하려고 애쓰고, 죄의 덫을 놓고 죄를 부추기는 악한 영들과 싸워 이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만이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 놓겠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그래서 당신은 죄와 싸워 이기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계신가? 아니면 죄에 대한 경각심조차 잊어버리고 무딘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신가? 우리네 교회에서는 구원을 기정사실화하여 가르치고 있으므로, 죄를 아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설교를 듣기 어렵다. 그래서 교인들은 죄를 잊어버리고,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기도문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를 부탁하였지만, 대다수의 우리네 교인들은 죄에 대해 인지하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천국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을까?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4) 귀신을 쫒아내는지 지켜보겠다.

 

이 항목도 우리네 교회에서 부족함을 보이는 내용이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거룩한 교회에 어떻게 귀신이 들어오며, 세상의 빛인 교인들에게 귀신이 공격할 수 있냐고 말하면서 안심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한 교회이며, 교회등록을 하고 예배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인지 어떻게 증명하는가? 그 증명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귀신을 쫒아내고 고질병을 고치며, 이적과 이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확장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네 교회에서 이런 사역을 하고 있는가?

 

귀신들린 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오면 손사래를 치면서 교회 문을 닫아걸고, 정신질환자들에게 정신병원을 소개해 주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우리네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습인가? 예수님과 사도들은 귀신을 쫒아내고, 귀신들의 공격으로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회복시켜주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였다.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말씀하신 구원사역의 내용은,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데리고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고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하고 당하고 있으면서, 귀신들을 내쫓는 성령의 능력을 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거의 대부분의 우리네 크리스천들이 천국에 들어갈 확률이 없다. 성령께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통해서, 성령으로 거듭한 성령의 사람임을 확인하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지 지켜보겠다.

 

성경은 의인은 없으며 죄다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구원의 통로를 마련해 놓으셨다. 죄 때문에 가로막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죄를 용서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영접기도를 하고 교회에 나오셨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죄는 말끔하게 씻어졌는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죄를 회개한 뒤에도, 계속해서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지 않으신다면,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운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면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옷을 깨끗이 씻어, 희고 고운 세마포를 입은 자들만이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5가지 사항을 지키는 자가 바로 하나님께 목숨을 바치고 일생을 바치는 자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 반열에 오를 것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성령의 사람이 될 것이다.

 

3. 영성학교는 성령의 사람을 복제시키고 있는가?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2~14)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1,42)

 

성경에서 유일하게 성령의 사람을 복제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위의 구절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유언을 받아들여서, 사도들과 120여명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한 끝에 성령이 임재한 사건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 후에 베드로의 설교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교인들에게, 사도들은 자신이 성령의 받기 위해 했던 기도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대목이 바로 밑에 올려드린 사도행전 2장의 구절이다. 이 때 사도들이 훈련시켜 성령의 사람이 된 제자들이 바로 빌립집사나 스데반집사와 같은 인물이다. 이렇게 사도들은 성령의 사람을 복제하는 기도훈련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면서 초대교회를 세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300여년이 흘러 로마황제가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 초대교회는 성령의 사람을 복제하는 기도훈련이 끊겼다. 그리고 2천여 년이 흘러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간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인물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성령의 사람을 훈련시켜서 복제시키는 교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바톤을 영성학교가 이어가게 되었으니, 감개가 무량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한지 11년 차가 되었을 때,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기도훈련을 명하시고 말씀해주시면서 3년을 훈련받은 끝에, 충주의 한적한 곳에 영성학교를 열어주시고 사역을 시작하게 하신지도 벌써 4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으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기도훈련을 시작하였고 성령이 갓 임재한 증거가 나타나서 졸업을 시킨 이들이 백며 명이 넘었으며, 주일예배를 드리는 공동체 식구로 남은 사람들도 백오십 명이 훌쩍 넘어 주말에는 앉을 자리가 없는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성령의 사람을 복제하는 것은 실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고질병을 고치는 성령의 사람이 겨우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귀신을 쫓아내면서 정신질환과 고질병이 치유가 되고 갖가지 기적과 이적이 나타난 것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령의 사람들은 수수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사도들과 120여명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사도들은 예수님이 직접 뽑아서 3년 반동안 동고동락하면서 훈련시킨 제자들이었다. 나머지 120여명의 제자들도, 평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많은 제자 중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실망 끝에 죄다 사라졌지만, 끝까지 부활을 목격하고 남았던 제자중의 제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우연한 기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루살렘교회에 입교한 초대교회 교인들도, 유대교지도자의 핍박과 로마당국의 박해 속에서 생명과 재산과 가족 그리고 평안한 삶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 중에서도 성령의 사람이 된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영성학교에 찾아온 사람들이, 과연 그런 굳센 결심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령이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정신질환과 고질병을 치유하거나, 주리고 목마른 영혼과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견디지 모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육체를 치유하고 삶을 회복시키고 나서, 이들에게 성령의 사람이 되는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강철 같은 믿음과 불굴의 결심으로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결심했던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하나님께서 이 양들을 보내주셨으므로,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에 부합하려고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훈련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 관문을 통과한 이유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비록 열매가 풍성하지는 않지만, 우리 영성학교에서 성령의 사람을 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 해도 초대박 행운이 아닌가? 우리네 교회에서는 성령의 사람이 될 생각도, 훈련시킬 생각조차 없는 데 말이다. 초대교회 이후에 이천년의 세월이 흘러서 종말의 문턱에 다다른 시점에, 우리에게 이런 기막힌 기회를 허락하셨다는 게 경이롭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렇게 놀랍고 엄청난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성령의 사람을 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은 만큼, 앞으로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영성학교의 기도훈련에 동참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신이 먼저 이 기회를 선점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기회란 항상 오지 않기 때문이며, 이천년 역사상 이런 기회를 얻은 사람들조차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