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성찬- 천국 잔치 맛보기, 이성호, 그라티아
머리말
이 책은 단지 성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성찬을 통해 역사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고자 합니다.
들어가는 말
성찬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
흰 보자기, 흰 장갑,... 마치 장례식을 연상케 한다.
왠지 모르게 슬퍼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찬식을 예수님에 대한 장례식이나 추도예배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주님의 죽으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이다. 더 나아가서 성찬의 본질이 과연 주님의 죽음에만 국한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 성찬에 관한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성찬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의미에서 중요한지는 잘 가르치지 않는다.
성찬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다 보니 성찬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즐길 수 없다. 이 책을 쓴 가장 큰 목적이 여기에 있다.
1장 성경에 나타난 식사
1. 식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복
창조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먹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먹어야만 한다는 말은 인간이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연약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눈으로만 볼 때, 열매와 보는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열매를 먹는 순간, 그 열매는 먹는 사람의 일부분이 된다. 맛을 느끼는 것은 천사와 달리 몸을 가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큰 특권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 선하심을 인간들이 보고만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우리가 창조 세계 중에 일부를 맛을 보아 알기를 원하셨고 이를 위해서 모든 식물을 먹거리로 우리에게 주셨다. 이 먹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이라 할 수 있다.
피조물인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통해서 그분을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의 금도를 정하신 것은 이것을 통해서 인간이 모든 식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모든 식물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들은 선악과를 통해서 배워야 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당하게 되었다. 이런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야말로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드러내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상실되었던 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동산에서 회복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에덴동산이 진정으로 표상하였던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만드신 동산에서 자기 신부가 자신의 체취를 맡으면서 열매를 먹고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미래의 기쁨을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미리 누리는데, 그 구체적인 현장이 바로 주께서 베푸신 성찬이다.
2. 만나: 광야교회가 누린 하늘의 양식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만나로 가르치셨다(~너로 주리게 하시며~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8:2-3). 만나에 대한 세 가지 규칙을 내셨는데 첫째는 한 사람이 한 호멜 씩만 거둘 수 있다. 한 호멜은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만나의 정신이다. 둘째는 당일에 다 먹어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보여 준다. 셋째는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분의 양식을 거두어서 하루의 양식을 저장해야 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에만 그들에게 양식이 됨을 알게 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순수한 주의 말씀을 따라 올바로 성찬을 시행하고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을 때에라야 성찬은 우리에게 하늘의 양식이 된다.
3. 유월절 식사: 영원한 규례
천지창조와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떠한 존재이신 지를 보여주셨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면서 구속주이시다.
하나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유월절이다. 이 유월절 식사는 개인적인 식사가 아니었다. 가족 식사였다. 게다가 식구가 너무 적으면 자기 이웃과 더불어서 잡아먹었다. 따라서 유월절은 자기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돌아보는 절기였으며 유월절 식사는 거대한 무리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먹는 공동체 식사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믿는다면 예수의 피를 문에 바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린 양이신 그분을 자기 집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그 몸을 교회 공동체와 함께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찬의 본질이고 신약교회는 이 성찬 속에서 유월절 식사를 지킨다.
4. 예수님: 양 무리의 목자
오병이어 사건에서 남은 떡이 열두 광주리라는 사실이 증명하듯이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하여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먹이시는 메시야임을 보여주셨다.
4000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긴 기적은 가나안 일곱 족속, 즉 이방인을 향한 표적이었다.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고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기쁨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최상의 포도주를 풍성하게 제공함으로 잔치를 회복시키셨다. 이 기적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신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함께 식사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문을 두드리시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2장 성찬의 본질
1. 주님께서 베푸신 식사
성찬의 본질은 ‘식사’이다. 다시 말해서 왕이신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식사가 바로 성찬이다.
그렇다면 이 성찬에 제대로 참여하여 적어도 무엇인가를 먹었다는 생각을 하여야 하고 배부름을 느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을 미사라고 부르면서 성찬의 본질을 희생제사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성찬의 본질을 희생제사로 이해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현저히 욕보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희생제사는 주님께 우리가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이고 식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다.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본다면 성찬식의 분위기는 지금과 현저히 달라져야 한다. 식사는 근본적으로 기쁘고 복된 시간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다. 성찬식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적인 음식을 나누어 주는 시간이다.
2. 성도의 교제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제에 해당되는 원래의 문구는 ‘코뮤니오 상크토룸’인데 앞의 단어는 ‘서로가 하나 되어 나누는 것’을 의미하고 뒤의 단어는 ‘거룩한 것’ 혹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즉 ‘거룩한 자들의 하나됨’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거룩한 것들에 참여함’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자들이 거룩한 것을 통하여 하나됨을 누리는 것이 성도의 교제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것은 바로 성례를 가리킨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리고 하나가 된 성도들은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하나됨을 누린다. 이 하나됨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친밀한 교제라고 할 수 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행2:42)에서 떡을 떼는 것과 교제하는 것이 밀접하게 병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제대로 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성찬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성도의 교제는 사도신경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역할과 거룩한 공교회를 세워 가시고 거룩한 무리들인 성도들을 그 교회에서 교제하게 하시고 거룩한 무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내리시는 역할을 하신다.
3. 언약적 식사
성찬은 기본적으로 언약적 식사이다. 언약적 식사라는 말은 이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제한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 즉 언약 안에 있는 사람만이 이 식사에 참여할 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별도의 좌석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들에게는 떡과 포도주가 배분되지 않았다. 초대교회부터 세례교육은 기본적으로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교육이었다. 세례를 통해서 불신자와 구분되는 언약 백성이 되는데 이 언약 백성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바로 성찬이었던 것이다.
비록 성찬이 언약적 식사이긴 하지만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이 식사의 영적 유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떡과 포도주는 은혜의 수단이지 은혜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은혜를 받지는 않는다.
식사는 기본적으로 주린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고 배가 고픈 자이고 목마른 자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이 복을 받을 수 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아무런 유익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신의 가난과 비참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4. 잔치로서의 성찬
성찬은 특별한 식사, 즉 잔치이다. 성찬이 하나의 잔치라면 성찬은 기쁨의 식사이다.
이 잔치는 주님께서 베푸신 잔치이기 때문에 그 잔치 속에서 주님이 나누고 싶은 기쁨을 다같이 누려야 한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가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백마리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두 아들 중 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들을 보혈 값으로 지불하고 되찾았는데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자신만이 간직할 수 없어 잔치를 베풀고 그 기쁨을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신다.
성찬은 바로 신랑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함께 기쁨을 나누는 잔치이다. 이 잔치를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찬은 바로 마지막 날에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현재 미리 맛보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은 가장 생생한 종말론적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찬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베푸신 결혼 잔치가 바로 성찬이다.
이 혼인식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 나라의 영광을 기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된다.
예배는 기쁘고 즐거워야만 한다. 문제는 그 기쁨이 과연 어떤 기쁨, 더 나아가 누구의 기쁨이냐에 있다. 예배에서 누리는 기쁨은 주님의 기쁨이어야 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어야 한다.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성찬이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5. 화목으로서의 식사
성찬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상에 참여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성찬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과분한 은혜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베푸신 식사인 성찬이야말로 죄로 인하여 그분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어떻게 화목하게 되었으며 그분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를 가시적으로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이 되어 자녀가 갖는 모든 특권을 모두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여 그분이 베푼 식사를 함께 즐김으로 그분의 약속이 단지 빈말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성찬이 그리스도께서 원수였던 자들을 향한 화목의 선물이라면, 이 선물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먼저 신자들은 자신들의 형제들에 대한 미움, 시기, 질투를 내려놓아야 한다. 더 나아가 식사는 세상을 지향하여야 한다. 주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택한 백성들이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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