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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Joyfule 2019. 12. 5. 12:20

 

 

       성찬

 

3장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먹는가?


성찬에서 무엇을 먹는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먹는가라는 질문과 떨어질 수 없고 이 질문은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하며 어떤 교제를 누리는가라는 질문이고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을 어떤 식으로 주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본질로 규정한다면 여기에서 제기 된 질문들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바 신앙을 최대한 체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1. 화체설: 우상숭배
로마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눈에는 분명히 떡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실제 예수님의 살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본질 혹은 본체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겉모습은 떡 그대로지만 그 떡 속에 있는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로 변한다는 것이 화체설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이 반성경적 교리는 자연히 교회 내에서 수많은 미신들을 양산하였다.

2. 상징설: 미흡한 합리주의
쯔빙글리는 떡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상징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을 가리킨다.”로 이해하였다.
상징설의 가장 큰 한계는 성찬의 신비를 제거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 결과 성찬이 은혜의 수단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행사가 되어 버렸다.
또한 상징설은 성찬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빈약하다. 이런 빈약한 이해를 가지고 성찬에 계속 임한다면 성찬이 주는 풍성한 유익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성찬은 주님께서 시행하시는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경험이나 감정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3. 공재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오해
루터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단호히 거부하였지만 쯔빙글리의 상징설도 그에 못지않게 정죄하였다. 루터는 쯔빙글 리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무시했다고 생각했다.
칼케돈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양성은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는다는 교의가 확립되었다.
루터는 칼케돈 신조를 따르면서도 그리스도의 양성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서 두 본성이 서로 교류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였다. 이것을 속성의 교류하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간의 교통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전달되고 신성이 신성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인성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속성의 교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어디에나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편재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늘에 갇혀있거나 하늘의 어떤 장소에 제한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성찬에서 그 떡 ‘속에’ 떡‘위에’ 떡과‘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공재설이다.

4. 영적, 실재적 임재설: 성령의 놀라운 사역
칼빈은 성찬에서 성령의 역할의 중요성이 무시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결하는 끈이다. 역사를 통하여 성찬 속에서 신자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이룬다. 따라서 영적 임재설에서 “영적”이라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가리킨다.

칼빈은 임재를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과 정반대로 해석한다. 즉 승천하셔서 존귀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다시 이 땅으로 끄집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로 들려 올려 져서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그러한 임재이다.

영적 임재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오해는 “영적 임재”를 “실재적 임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영적 임재설의 반대말은 육체적 임재설이지 실재적 임재설이 아니다. 성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정말로 참되게 교제한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실재로 임한다. 육체적으로 임하지 않을 뿐이다.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령적/ 실재적 임재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는 영적인 모든 유익을 성찬 속에서 실재로 누린다. 성찬에서 우리의 영혼이 누리는 영적 유익은 실재적이다.

칼빈이 말하는 성찬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5. 경이로운 그리스도의 몸: 육체적, 신비적, 그리고 성례전적 몸

1)육체적 몸
성육신하신 이후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몸이 왜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는지를 잘 설명하여 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 보좌 옆에 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2)신비적 몸
하늘 높이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누가 먹을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한 백성만이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오늘날 교회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이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머리와 몸이 연합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와 교회도 가장 친밀한 형태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몸을 그리스도의 신체적 몸과 구별하여 신비적 몸이라고 부른다.

3)성례전적 몸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저 멀리 하늘 보좌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이 두 그리스도의 몸을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찬이다.
적어도 성찬에서의 떡은 그리스도의 실제 몸의 어떤 본질을 드러낸다. 성찬에서의 떡도 그냥 떡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제 몸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인 몸과 신비적 몸과 구분하여 성례전적 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그리스도의 세 몸을 연결시키는 장치가 바로 식사라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교회)는 그리스도의 성례전적 몸(떡)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피와 살)을 먹는다. 우리의 육체적 몸은 우리의 입을 통해서 보이는 떡을 먹을 뿐이다. 그러나 성찬에서 이와 유사한 현상이 우리의 영혼에도 일어난다. 우리의 영혼의 입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몸을 먹는다. 이는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고 성령의 신비한 사역으로 성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성령의 사역이 없다면 성찬의 식사는 영적인 식사,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령적 식사라 할 수 없다.

4장 성찬의 실제


1. 성찬과 직분

직분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현장은 예배이다. 예배 속에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직분자는 이 일을 돕는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은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더 이상 예배에 있어서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희생제사를 단번에 다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에서 필요한 직분은 제사장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근거하여 영적인 식사를 나누어 주는 직분, 즉 목사가 필요하였다. 또한 목사 혼자서 다 감당할 수 없기에 장로와 집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성찬은 단지 식사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식사를 위한 영적인 돌봄, 즉 목양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직분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성찬을 장로가 맡아야 하는 중요한 직임이라고 생각해 보자. 먼저 그는 세례 교육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례 교육은 당회가 전적으로 맡아 해야 할 본질적인 일이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에서 세례 교육은 목사와 장로가 나누어서 맡는다. 더 나아가서 장로는 성찬에 참석한 사람 중 누가 세례 교인인지는 적어도 알아야 한다. 이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꾸준한 심방, 관심, 기도가 필수적이다.

2. 성찬과 권징
말씀은 그 자체로 가시적 교회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성례는 선포된 말씀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권징은 말씀과 성례를 보존하고 보호한다. 성례로서 성찬은 이 세 번째 표지가 없을 때 쉽게 그 거룩성을 상실할 수 있고 성찬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때 권징은 그 영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공허한 말장난이나 사람잡는 재판이 될 뿐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이 식사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들로 인해 그 거룩성이 훼손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상이 더럽힘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권징은 필수적이다. 권징을 통하여 교회는 주님의 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이 권징이 있기 때문에 설교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게 되고 성찬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
권징은 순수하게 영적인 권세이다.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수찬정지와 같은 권징은 옥에 가두는 형벌보다 훨씬 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수찬정지는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의미한다.

나가는 말: 소망의 식사인 성찬
우리가 성찬 속에서 즐기는 식사는 참된 식사이지만 완전한 식사는 아니다. 그 참된 식사는 요한의 계시록이 보여 주듯이 마지막 날에 성대하게 베풀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궁극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망 가운데서 그 식사의 배부름과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본다. 성찬에서 말이다. 이 점에서 성찬은 종말론적 식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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