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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령 2

Joyfule 2023. 6. 20. 09:11

 


 

     기독교 기본교리.

성 령2


(성서대백과:)


 II. 신약성서에 나타난 성령

1. 서론

"영"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프뉴마이다. 그것은 헬라어 동사 프네오세에서 나온 말로써 "숨을 쉬다", "바람이 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뜻과 상이한 히브리어는 루하이다. 신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이 용어는 "성령"또는 단순히 "영"이라는 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 "주님의 영" "아버지의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다. 이 용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다소 차이가 있다. "성령"이라는 구절은 구약성서에서 단지 시편 51편과 이사야 63장에서만 나온다. 그렇지만 신약성서에서는 80-90회나 나온다. 신약성서에서 다른 용어들은 "너의 아버지의 영으로서"(마10:20). "그의 아들의 영"(갈4:6). "예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행16:7, 롬8:9, 빌1:19, 벧전 1:11)으로서 나와 있어 전적으로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그 영이 지금 그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표현으로 기대되는 인격적 이는 또 "위로자"또는 "보혜사" 이다(요14:16-26, KJV,ASV).

2. 예수와 성령

복음의 시대는 성령의 특별한 활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메시야보다 앞서서 온 선구자 세례 요한은 그의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기술되어 있다 (눅1:1580). 성령의 힘을 입어 시몬은 아기 예수의 인격 속에서 메시야의 임재를 예언했다. 천사로부터 그의 아들이 "성령으로"(마1:18). 그 영은 새 인간성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활동적이었고 인간 부패의 흔적을 없이 해 주었다(동정녀로부터 나온 분은 "거룩하다"눅1:35).참으로 흠 없는 잉태는 동정녀가 잉태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30세쯤 되었을 때 그는 세례를 받았다.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예수가 성령에 의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 받을 때도 예수는 바로 그 영에 의하여 메시야임을 확인 받았다. 그 영이 비둘기의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다(마 3:16,눅3:22).그것은 "평화 중의 평화"로서 오신 분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건에 대하여 그럴듯한 언급을 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의 첫 번 설교에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던 분으로 설교하였다(행10:38). 요한복음 3:34 절에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되 충만하게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여 한 말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후부터 예수의 삶은 성령의 표현으로 가득 찼다. 요단 강으로부터 올라온 후 곧 바로 예수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나갔다 (막1:12 f.그리고 병행귀절들). 둘째 아담으로서 참 하나님인 예수는 승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으로 악령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셨다. 그후 주께서 성령으로 다른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다(마12:28). 그 영은 그의 가르침에도 해당한다. 누가복음 4: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선포했다. 예수 안에 역사하던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행하신 활동을 살펴보면 더 훌륭하게 알 수 있다.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갔다(막3:21).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 같지 않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막1:22). 그는 때때로 육적 배고픔을 잊으셨다(요4:31),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악마에 사로잡힌 자라고까지 생각했다(요8:48). 70인인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 왔을 때 누가는 어떻게 예수가 성령으로 기쁨이 충만했는가를 잘 말해 준다(눅10:21).

만약 예수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라면 왜 성령의 힘이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예수가 성육신했을 때 받았던 실제적 인간성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예수는 신이기 때문에 마치 그가 신의 전능을 인간의 약점으로 가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단순한 하나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영으로 만들었던 이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여 살았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가 인류와 하나인 것처럼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구원의 섭리 가운데서 왜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의 역할을 맡았는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이 메시야임과 신적 절대적 권위를 알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그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야웨께서 이렇게 말하신다"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했다.

3.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1) 서론
세례요한은 예수가 그 영을 충만히 받을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성령과 관련시켜 말했다. 요한복음 1:33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론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하여 예수와 세례와 성령을 관련시켜 설명하였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일어난 두 사건은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능력과 은사를 주기 위함이었다. 첫째는 부활 바로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요20:22) 고 했을 때 일이었고 둘째는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임하심이다(행2장). 이 두 사건들을 조화시기 위해서 전자 사건은 마치 "너희는 머지않아 성령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었던 것처럼 후자는 이 전자의 말을 입증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쉬었을 때 그 영이 실제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제자들은 50일이 지나서 다락방에 사도들과 함께 모여 믿는 자들의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내쉰 것은 창세기 2:7절에 하나님이 생기를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신 활동과 같은 것이었다. 또 이것은 부활의 새 생의 시작을 의미하며, 제자들과 몇몇 무리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실제적으로 살아야 할 새 삶의 원리를 부여한 것이었다.

2) 오순절
오순절은 지나치게 강조될 수 없는 사건이다. 성육신의 사건과 같이 오순절의 사건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질서의 사건이었다. 성령을 강하고 급한 바람으로 상징한 것은 영이라는 말<루하>숨)의 기본적인 의미에서도 볼 수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성령도 이와 같다"라는 요한복음 3:8절의 구절 속에서 니고데모에게 한 예수의 말에서도 물론 명백하다. 동시에 불의 혀처럼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바로 이 사실은 예수는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에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마3:11). 불같은 혀들이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성령의 새 시대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영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고전12:11).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전체나 개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집합적이면서도 개인적이다.

성령에 의하여 권능을 부여받고 사도들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팔디아(parthia)나 혹은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하나님의 능하신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행2:7-12). 베드로의 성령에 감동된 설교에 대한 반응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 결과 초대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성령을 부어 주신 이 오순절 사건과 더불어 소위 "성령을 나누어 주심"(dispensation of the Spirit)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실 것이라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욜2:28 이하). 또는 성령이 오시면 친히 제자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성취되었다(막 13:11, 눅 12:12).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주님의 교훈의 가장 정교한 내용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 사이에 있다. 이 내용이 명백히 보여 주는 말씀을 전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가 오순절 사건과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에 의한 사도들의 전파로써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다(요16:8,행2:37).

사도행전에 의하면 오순절로 시작하여 결국 보편적 교회를 세우게 된 모든 역사적 운동은 성령의 세례에서 시작되었고(행1:58),성령의 지시와 통제하에 있었다. 성령의 임재는 기독교 사회의 독특한 표식이 되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구스 내시에게 가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에 "빌립을 이끌어"(빼앗아,caught up)갔다 (행8:2939).욥바에서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였고 그를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 인도해 주셨다(10:19,11:12). 성령께서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우는 일에 함께 하셨고(13:2) 그 선교에서 야기된 중요한 문제를 협의하는데 있어서 교회를 지도하셨다(15:29). 성령께서는 바울이 아시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고(16:6) 특별히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꾀하는 악한 의도에 대해 바울을 경고하였다(20:23,21:11).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성령께서 그 교회를 돌보도록 그들로 감독자를 삼으셨다고 했는데(20:28). 아마 바울은 모든 교회에 대해 이 사실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나이는 성령의 나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이전의 시기는 성령이"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한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요7:39). 비록 그 절대적 의미를 글자 그대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오순절 사건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매우 엄청나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에서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4. 바울서신 속에 나타난 성령


바울 서신은 신약성서에서 성령론에 대해 충분히 다루었다. 성령에게 탁월한 지위를 부여해 준 사도행전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영적인 능력(살전 1:5)과 내적인 기쁨(살전 1:6)과 도덕적 정결함(살전4:4-8)과 종교적인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과 더불어 관련시켰다.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은사를 무시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예언의 은사를 멸시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령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삼가라고 권면하였다(살후2:12). 이러한 중요한 문제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른 곳에서 명백하게 표현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계시로 간주할 수 있는 성령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며(롬8:16)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분(롬8:15,갈4:6)은 성령이시다. 그들의 기도를 도와 주신다고 되어 있다(롬8:26).

성령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 중에 좀 더 어려운 면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성령의 관계에 관한 그의 개념이다. 후에 더 언급하게 되지만 교회의 보편적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은 성삼위 한 분으로서 신성의 구별된 한 인격(Person, 혹은 위이시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 바울이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성령이 상호 관련된 방법에 대한 "형이상학적"문제가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로마서 8:9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그리스도"를 서로 바꿀 수 있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 모든 표현은 광의로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즉 성령은 신자가 사는 삶의 영역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해방] 시켜 준 새로운 능력의 삶의 영역이다(롬8:2).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가운데 나타나실 때 그는 단순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인가?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바를 상기해야 했다. 어떤 학자는 이 문장을 뒤집어 [성령은 주시니]라고 읽으므로써 성령의 주권과 신성을 확증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주]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주이신 그는 바로 성령 그 자신이시다(18절의 끝맺음을 보라). 따라서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과 [성령 안]이라는 두 관용적 표현 사이에 어떤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성령이 그의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시고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한에서 성령은 영광을 얻으신 주 곧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바울은 그가 전도한 회심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고통하심"(고후13:13)을 기원했는가? 삼위 하나님의 축도를 tkdydg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은 바울서신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도 불리웠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혹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라고 했다.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다. 성령께서 거하시고 일하시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이 인간의 일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이다 (고전2:11). 이것은 바울의 심중에 그가 성부로 보여준 하나님과 신자의 마음 가운데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하시는 성령으로서의 하나님 사이에 아무 구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주님과 사람으로 하여금 주 예수를 부르게 하는 분, 곧 성령 사이에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했다고 추측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전 12:3).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표현은 이들 사이의 동일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학적인(dynamic)동일시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그의 교회 안에 거하시고 신자들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라는 관용적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로서 같은 뜻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성령에 대한 대부분의 참고 구절들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께서 한 사람 안에 "거하실"(indwells)때 그 사람의 생활 속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는 이러한 덕성과 은혜와 더불어(고전3:16) 부활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리라"(롬8:11).

바울이 인간의 영(spirit)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의 영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특히 이러한 어려움은 육체와 성령을 대조시키는 구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육체적 욕망은 성령(혹은 영)을 거스리고 성령(혹은 영)은 육체를 거스린다(갈5:17).육체(flesh)는 인간성의 약하고 죄된 면으로서 이해할 수 있고 이에 반하여 영(spirit)은 인간의 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즉 육체적 욕망과 더불어 싸울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능력을 준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육체와 더불어 싸우는 영의 사람은 영(혹은 성령)을 좇아 영(혹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다(롬8:5). 이와 유사한 대조를 고린도전서 3:1절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들 사이를 구분하였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의 저급한 본성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다. 반대로 신령한 자(영적인 사람)는 성령이 지도하고 다스리는 영(spirit),즉 고등한 본성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성령은 그 작용에 있어서 동일하다(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여 삶의 매 순간에 성령의 인도와 돌보심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그는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인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다(롬14:17).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넘치는 사람이다(롬15:13).

보통 웨슬레(Wesleyan) 전통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신약성서 개념에 아주 기본적이기 때문에 그 교리는 결코 곡해될 수 없는 기독교적 메시지이다. "완전주의"의 모든 형태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사람도 물론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할 수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비록 그 나무의 뿌리는 볼 수 없게 감추어져 있지만 그 열매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열려 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을 권면하였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맏으라"(엡 5:18). 만일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하였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그렇다면 술취함의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구속적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삶 가운데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차이점도 그들이 알아 볼 수 없겠는가? 올바른 태도를 취하기 위해 신중을 기해야 랄 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소위 "더 높은 수준의"(higher) 혹은 "승리하는"(victorious)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 "완전"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결코 어떤 용이한 법칙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러한 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지만(롬 8:2) 아직도 여전히 또 다른 율법이 남아 있다(7:21절 이하). 이 음흉하고 사악한 "죄의 법"의 세력에서 구원받는 것은 어떤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즉석의 순간적이며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육신"(육체)과 "영"(성령)의 개념 배후에 있는 또 다른 대조는 바울이 영과 의문(the letter)사이에 묘사하는 대조이다. 우리는 율법(기록된 법전)d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죽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고 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묘사하면서 말하기를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6)고 했다.그러나 율법을 영적으로 무가치하다고 본 것이 아니라("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롬7:14)인간이 그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의 외적인 법적으로 보았으므로 율법은 단지 사망을 집행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그 죄로부터는 결코 구원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롬3:20).유대주의자가 이해하는 바 대로 생각해 볼 때 그 율법은 성령을 대적하고 성령은 그 율법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구원의 방법으로 그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성령에 관한 바울의 교훈을 끝맺기 전에, 성령과 교회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말이 있다. 성령은 진정한 교회의 표식 중에 하나로 여겨지는 보편적 연합의 띠이다(엡4:3).여기서 바울의 사상을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그의 상징과 연결 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전 12:12-27).성령은 그 몸에 생명을 불어 놓는 분이시다. 한 성령으로 모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전 12:13).이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고전14:2).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골1:8). 그들은 성령 안에서 교제한다(빌2:1).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빌3:3).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불어 지어져 가는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엡2:22). 따라서 교회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고후3:3).

5. 바울서신 외에 신약성서 나타난 성령론


신약의 다른 기록들이 성령에 대해 자유로이 언급하고 있지만 바울의 교훈에 별로 보태는 바가 없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경의 영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을 인용할 때 종종 마치 그 말씀이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인 것처럼 인용하였다. 성령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말씀하는 분이고 성령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말하고 있다(히3:79:810:15).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는 개인적 범주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친숙한 구절을 이해야 한다. 그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뚫고 들어가서 그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감찰(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히4:12). 이 능력은 그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 영감된 말씀에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영감시킨 성령께서 듣는 자를 책망하여 뉘우치게 하는 방편으로서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묘사한 구절을 참고하라,엡6:17). 베드로도 히브리서 저자와 동일한 입장에서 성경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 선지자들 중에 계셨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장차 올 영광에 대해 증거하였다고 했다(벧전1:11). 히브리서 저자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성경 기록에 있어서 그 우선권을 인간 저자가 아니라 성령께 드렸다. 어떠한 예언도 사람의 뜻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었다(벧후1:21).

히브리서에서는 주님의 속죄적 죽음에 대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는데(히9:14) 이것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영(Hisown Spirit)을 영원하시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최상의 해석일 것이다. 짐승으로 드린 희생 제사와는 달리 주님은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으며 따라서 성부의 구속적 목적에 묵묵히 순종하였다(그리스도를 "살려 주는 영"[life-giving spirit]으로 표현한 바울의 묘사를 참고하라, 고전 15:45).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성령에 대해 구약 예언에 있어서 그가 차지한 역할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계시록의 저자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처럼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in the spirit)하였고(계1:10). 그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록하였다(계2:7).천사는 말하기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라"(계19:10)고 했다. 즉 그 선지자들을 영감시켰던 동일한 성령께서 그 천사로 하여금 요한에게 그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게 하셨고 또한 요한으로 하여금 그 사실들을 보고 기록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 천사는 요한의 동료 수종자였다. 요한계시록은 거듭해서 하나님의 "일곱 영"에 대해 말하였다(계1:43:14:55:6). 일곱이란 숫자는 일반적으로 교회에 미치는 성령의 우주적 효력의 충분함과 완전함에 있어서 그의 완전성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해석은 유명한 라틴 찬송가(Vent, Creator Spiritus)에 있는 구절의 기초가 되었다.

 성령이여 오소서
 하늘의 불로써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키시켜 밝혀 주소서
 당신은 기름을 부어 주시는 성령이시니 일곱배(seven-fold)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나이다.
 성령께서 교회에 대해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요청하는데 
있어서 교회와 더불어 그는 목소리를 발하였다(계22:7).

6. 결론


성경은 성령의 신성을 계시해 준다(아리우스가 주장한 것과는 다르다. 그는 성령의 천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피조된 지성이나 성자보다 열등하다고 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일하게 언급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과 구별하였게 언급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과 구별하였다. 그 사역에 있어서 성령은 만물의 창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만물을 보존하고 있는데 특히 생명의 호흡을 하는 피조물들을 돌보고 있다. 또한 성령은 인간의 구속 사역에도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는 도덕적 정결함으로 이끄는 장본인이며 또한 선지자들을 감동시켜 장차 오실 구주에 대해 예언하게 하신 성령이시다. 때가 이르매 구주에게 부으시고 모든 충만함으로 그에게 머물러 계셨던 분도 성령이시다. 마지막 날에 성령께서는 그의 은사들을 전세계에 널리 확대시킴으로써 새 이스라엘, 택한 백성, 보편적 교회를 일으켜 세우신 후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변화시킴으로써 성취되는데 성령께서 친히 그들의 심령 가운데 내주하시고 그들을 그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내적으로 정결케 하신다. 또한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께 대한 열망에 더욱 불붙여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능하신 능력으로 성령께서는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인데 이 성도들은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는 자로서 저희의 행한 일이 저들을 따르는 자들이다(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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