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본교리. .
성 령3
(성서대백과:기독지혜사 p79-98)
III. 성령의 신학적 문제와 교회생활
성령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의 문제들은 위에서 서술한 개요에서 간단하게 다루어졌다. 그 문제들은 좀더 특별히 다루기 위해 보류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중요성이나 난해성 때문이며 혹은 기독교회가 나뉘게 되었던 문제이거나 특별한 관심사와 관련 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1. 성령과 삼위일체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거룩하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제 삼위"로서의 성령에 대한 교리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양식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크고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 술어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고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의 성경적 근거를 다루는 것이 꼭 필요하다.
구약성서에서는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성령에 대해 아무 교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구약성서의 성령이 모호하고 비인격적인 어떤 세력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성령은 인격적 속성을 지니고 있고 인격적 행동을 수행한다. 인격적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에너지로서 성령은 곰곰히 생각하고 통치하고 인도하고 격려하고 움직이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바로 그 곳에 그가 인격적으로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이 반역할 때 성령께서는 근심하셨다 (사63:10).
이러한 의인화시킨 표현에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 그가 떠난 후(요16:7) 성부께서 다른 보혜사(Paraclete), 곧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약속(요14:1628)은 성령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약속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한 인격으로서 교제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그의 위치를 대신한다는 말씀이 암시하는 바는 그 성령도 그 자신과 같은 한 인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이 떠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경우 그 보혜사에 대한 약속은 제자들에게 거의 위로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알지 못했으나 그 위대한 계시적 사건이 주어진 후 그들은 성경과 주님 자신에게서 배운 바에 의해서 준비되어졌다. 즉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나 어떤 애매모호한 영향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 나타나심으로서의 성경에 관하여 배우 srjt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느 sgksksla이신 성령께 거짓말하는 아나니아를 책망할 수 있었다(행5:34). 성육신과 오순절에 대한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와 성부와 구별되는 분으로서 성령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자로서(행1:9) 성부로부터 성령에 대한 약속을 받으셨다(2:33). 성령의 이러한 인격적 혹은 실체적 구별은 고린도 교회 성도에 대한 바울의 삼중의 축도에서 볼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신약성서 가운데 삼위일체적 표현이 가장 명백하게 서술된 곳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하신 곳인데,"....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다. 교회의 논의 가운데 크게 부각되었던 성령에 관한 한 구절은 요한복음 15:26절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proceeds from the Father)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삼위일체 교리에 관련된 한에 있어서 이 구절은 고전적으로 성령의 발현(procession)에 대한 교리를 세우는데 사용되어 왔다. 성자는 성부의 "나신"(begptten of) 자이므로 보편적 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현(proceeds from)되신다고 고백한다(어거스틴의 영향 아래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한 모든 서구 교회는 성령이 성자에게서 발현되신다(filioque)고 고백하였으나 이것은 성령에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두 절에 주목해야 한다. 성자가 보내려고 하는 분은 보혜사이며 성부에게서 발현(proceeds from)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앞의 구절은 분명히 성결케 하는 자(Sanctifier)로서의 그의 역할(직분)로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언급하는 듯하다.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당시에 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은 아직 미래사였으므로 주님은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I will send")그가 보내실 분으로서의 성령에 대해 언급하였다. 전문적인 신학 용어에서 이것은 "섭리적"(economical)의미의 구절이다. 즉 이 구절은 구속의 "섭리"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who proceed from the Father)이라는 뒤의 구절은 대조적으로 성령 자신의 본성을 묘사하고 있다. 즉 이것은 "본체론적"(ontological)절이다. 성령은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proceeds from)이다 이 마지막 견해에 대해서는 모든 학자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모두 오순절의 성령 강림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하곤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오순절에 성부와 성자께서 교회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명백하게 계시된 사실에 근거하여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성령의 신비적인 삼위일체적 상호 관련성을 어떤 유추적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오순절에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에 대한 유추에 따라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영원히 나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2. 성령을 거스리는 죄
비록 신약성서는 자비와 용서와 화목의 메시지, 곧 복음의 메시지가 충만하지만 어떤 냉정하거나 진지한 구절도 지니고 있다. 즉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5:16)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하므로 하나님의 형벌을 초래하는 죄(히10:29)와 성령을 훼방하는 죄(막3:2829절과 그 밖의 병행 구절)가 있는데 이 죄는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도 결코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라고 했다. 복음서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표현된 이 특별한 죄는 귀신을 쫓아 내는 예수의 능력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힘입은 것으로 돌림으로써 마치 예수 자신이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것처럼 취급한 것이었다. 이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약간의 견해 차이가 여러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죄가 지닌 용서 받지 못할 성격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 자비로운 사역을 마귀적 능력의 것으로 간주할 정도로 진리에 대해 눈이 어두운 의곡되고 타락한 소망없는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고, 구속의 은혜에 무감각할 정도로 뿌리 깊은 악의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한 듯 하다. 기독교회가 오류없이 이러한 죄를 인지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으며 더군다나 이러한 죄에 대해 파문을 선고할 권세가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이러한 경고는 그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과 마땅히 하나님을 고려해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타락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히6:4절 이하 10:29)함으로써 배교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배교자는 거짓이라고 말하는 자이며 그의 본래의 신앙 고백에 따라 살지 않는 자이며 그의 본래의 신앙 고백에 따라 살지 않는 자이며 그의 생활로써 그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자이다. 이러한 변절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저는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라볼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지른 죄의 심각성(행5장)과 그들에게 즉시 내린 심판에 대해 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은 성령께서 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우리는 어떤 영향력에 대해 범죄할 수 없다. 죄는 인격적 차원 안에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매우 악한 형태의 죄이기 때문에 그 범죄에 결과는 명백한 것이다. 그 죄는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신성의 인격에 대한 죄이다.
3. 성령과 영적 은사
"카리스마"(charisma)란 단어는 주로 바울서신에서 사용된 전문 용어이다. 그는 교회의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바울 서신에 열거된 어떠한 명단도 철저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그 여러 본문을 대조하고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은사의 쓸모 있는 명단을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은사들은 말씀의 선포와 진리의 보존과 가르침에 관계되어 있다(예언,롬12:6.고전12:10,영 분별,고전 12:28,방언과 통변, 고전12:102830,이적 12:10,28,29,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12:8).다른 은사는 봉사하는 일과 관계가 있고 어떤 것은 성격상 아주 현세적인 것이고 또는 그리스도인의 형제애와 관련된 것이다(병고침, 고전 12:92830, 다스리는 것,12:28,돕는 것,12:28).이러한 은사의 범위는 신약성서에 의해서 성령이 한 몸으로서의 전 교회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으므로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분명히 사도들은 이 모든 은사들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마치 대부분의 경우에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성령의 뜻에 따라(12:11) 그 은사들이 교회원 개개인 중에 부여된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하였다(12:4절 이하) 교회원은 감사함으로 이 은사를 받아야 하며 신중한 자세로 이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신중한 자세로 이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은사들은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고전13:13)처럼 여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성령의 정상적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인데 이러한 열매들은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만들어 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요3:8)라고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성령의 주권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 은사가 주어지는 어떤 획일적인 절차나 방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제자들이 기대하는 자세로 모여 있었을 때, 오순절 날 성령의 주도적인 부어 주심에 있어서 갑자기 성령은 강한 바람이 돌진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임하였고 각 사람 위에 머문 불 같은 혀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른 경우에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동안 성령이 고넬료의 집안이 임하였다(행 10:44).또 다른 경우에서는 말씀 전파가 아니라 안수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은사(charismata<카리스마>)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는 귀신을 쫓아 내고 병든 자를 고쳤는데(행8:78), 그 당시에 믿고 세례를 받았던 신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그들에게 안수해 줄 때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행8:17).에베소에서도 바울의 안수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제자인 12사람이 성령을 받았다(19:1-7).
안수는 기독교회에서 용인된 관례가 되었다. 신앙의 확증이나 성직 임명에 있어서 성령의 전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이러한 영적 교제 가운데 은사의 부여가 추구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는 일은 안수와 동반되었다. 손은 언제나 사람들에게서 뜻 있게 사용되었는데 고대로부터 안수하는 것은 축복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창 48:13-16,막10:16).안수하는 것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최상의 축복을 받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족히 받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족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영적 은사의 배열에 있어서 그것은 능력의 가장 뚜렷한 표현으로부터 낮고 천한 것으로 배열되어 있다. 사도행전 19:12절은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어서 그 병을 고친 일을 서술하였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자들 중에 "돕는 것"(helpers)과 "다스리는 것"(administrators)을 언급하였다(고전 12:28). 그러나 이 은사가 어떤 뚜렷하고 기적적인 것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실제적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지혜가 있고 그의 영적인 능력으로 연약한 지혜가 있고 그의 영적인 능력으로 연약한 자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는 신자들이 교제 가운데 있는 은사들은 교회를 세워 나가나는데 쓰임을 받도록 성령으로부터 선물로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역의 영감적인 면은 점점 쇠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장로와 집사직의 형태로 된 조직을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도 사라져 갔다. 교회를 빈약하게 만든 이러한 경향과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적 영감의 사실과 더불어 교회가 인간 사회 안에서 단순히 제도적 기구로 전락되지 않으려는 투쟁은 기독교회의 전 역사에 걸쳐서 계속적인 요인으로 남았다. 오늘날의 오순절 운동의 등장과 급속한 성장은 영적 갱신을 바라는 제도적 교회의 요청을 강력히 증거해 주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을 때 교회는 단순히 하나의 사회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4. 방언의 은사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주권과 교회의 갱신과 은사(카리스마)의 폭넓은 배열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방언의 은사에 관한 문제보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보다 빠르게 보여 주는 제목은 결코 없다.이 주제에 대해 오늘날 새로이 관심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성령론을 일반적 관점에서 간단히 논의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이 은사의 곤란한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사도직이 제일 먼저 나오는 명단(고전 12:28)에서 이 은사를 맨 끝에 두었고, 그 독자로 하여금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으며(고전 12:31),일만 마디 방언보다 교회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다섯 마디의 말 더 낫다고(14:19) 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방언의 은사에 대한 문제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살펴볼 때 사도들 중에 으뜸인 바울이 이 은사를 성령이 주신 은사로 인정하였다는 사실도 명백하다(12:11).또한 바울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방언 또한 바울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방언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14:18).더우기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오순절 사건과 기독교회의 설립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순절 사건 당시의 최초의 방언의 은사가 후에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것인지의 여부는 전혀 명백하지 않다. 동일한 단어 "글로싸"(glossa)가 이 두 경우에 모두 사용되었고 성령의 동일한 영감이 전제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사도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며 비난 하였고(행2:13)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정신 이상자로 간주하게 된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고전 14:23).그러나 사도행전에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그들 본토의 방언으로 말하는 사도들의 말을 들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행2:8). 그 소리는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방언"(tongue)으로 묘사되었음에 반하여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언어"(language)로 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의 경우가 아니다. 그린도 교회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묘사된 현상이 있었다. 왜냐하면 듣는 자를 깨우치기 위해서 통역자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열매를 맺지는 않지만 영으로 기도하는 방언의 황홀한 체험에 대해 바울이 이야기한 것(고전 14:14)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그 고린도 교회의 은사는 결코 "언어"가 아니며 단지 횡설수설하는 말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문법적으로 아주 조악한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어떤 학자는 매우 애매모호한 언어의 의미에서 그 방언이 알 수 없는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언어의 분석은 이 학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불신앙은 이 모든현상을 단순히 어떤 열정적인 상태로 기각시킬 것이며 따라서 그 현샹을 설명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것의 힘을 빌릴 필요가 전혀 없다. 사랑과 분노의 표현 가운데분비선이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방언의 사용에 있어서 감정이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용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경험조차도 분비선의 분비물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도 감정 이상의 것일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감정일 것이다.
고대 교회와 오늘날의 어떤 교파에서 이 은사가 인기 있었던 까닭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황홀경(ecstasy)에 빠져 들어 갈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영을 느끼며 따라서 그는 강하게 하나님의 은총 중에 있는 상태를 알고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교제 중에 있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체험을 반대하는 법은 확실히 아무 것도 없으며,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하는 (고전 14:28) 그리스도인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공허한 편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 은사는 드러나게 나타나는 허식적인 것이었고 개인적인 탁월함을 갈망하는 사람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 은사에 대한 고전적 평가에 있어서(고전 12-14장) 바울은 방언을 하나님이 주신 신적 은사로 인정하였고(12:10) 그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서 이 은사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현하였다.(14:18). 그러나 이 은사는 결코 절대 긴요한 것은 아니었고 더 나은 방법은 사랑의 방법이었다(12:31). 사랑없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은 것이다(13:1).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을 포기하고 몸된 교회의 덕을 위해야 한다(14:4). 이러한 규칙이 준수될 때 방언을 하는 것이 천박해질 이유가 전혀 없다. 문제가 있는 개인이나 교회 생활의 영적 능력의 결핍이 특별한 은사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운동이 전 교회에 대하여 외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대신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이 단지 사도 시대 당시만을 위한 것이라고 입증된 적이 있었는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의 등한시된 은사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삶이 나타내야 할 최상의 유일한 의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5. 세례와 성령
좀 더 제도화 된 형태의 교회가 성령 임재의 뚜렷한 증거에 벌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신학이 세례에 대한 신학과 밀접하게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신학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치며 따라서 그 밖의 성령 체험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 것이다. 첫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이러한 교훈이 성경과 어긋난 것 같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의 물 세례와 그의 계승자 (그리스도)가 수행할 성령과 불로 주는 세례를 분명하게 대조시켰기 때문이다(마 3:11; 그 밖의 병행 구절).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대조시킨 이 두 세례를 어떻게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결합시킬 수 있는가?
첫째로 불과 성령으로 주는 세례에 대한 예언은 오순절에 성취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는 불의 혀같이 나타나서 제자들 위에 임하였다(행 1:5). 어떤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 경험을 물 세례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자상 사역 기간 중에 있었다(요4:1). 게다가 베드로가 성령의 세례(행 11:6)라고 칭한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의 부어 주심은 물세례와는 독립적으로 물세례 이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명백하게 성령 세례와 물세례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 준다.
물 세례에 대한 성령과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성령 세례(baptism in the Holy Spirit)라는 표현이 지닌 의미를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성령 세례는 교회 창릷 당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사건을 묘사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체험을 추구해야 하는가?
본 필자의 판단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교회에 대한 성령의 최초의 은사에 대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막 1:8)과 부활하신 주님(행 1:5)이 모두 사용한 그 용어는 명백히 오순절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오순절은 분명히 구속 역사에 있어서 독특한 것이다(이 독특한 사건은 교회력에 있어서 성령강림일에 기념하나다).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받았다고 말한 사도행전 11:16절의 고넬료의 가정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독특하게 누가만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최초의 사건이었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장로들 앞에서 그 사건을 되풀이해 말할 때 그는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이방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오순절의 최초의 성령 강림과 이 사건의 유사성을 직접 연결시켰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인정하고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행 11:18)고 했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해 복음의 문을 연 것은 오순절 사건의 완성이었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 모든 나라에서"온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성령의 새로운 시여에 대한 축복과 특권에 포함되어 있음을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두 사건을 모두 "성령의 세례'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사건들에 대해 유일하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성령의 세례는 단순히 성령께서 초대 교회에 새롭고 영구적인 방법으로 임하신 것을 묘사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성령께서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한정된 영역에서 역사하신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성령께서는 최종적이며 충만한 나타나심으로 임하셨기 때문에 개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성장 및 교회의 선교 사업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모든 영적인 은사와 추복을 주시려고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 가운데 현존해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영원히 교회와 더불어 거하시려고 임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행하며"(갈 5:16) "성령으로 충만하라 "(엡 5:18)는 명령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음"(카리스마)이 있다고 했다(요일 2:20-27). 그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기업의 "보증"(arrabon〈알라본〉)이시다(엡 1:14). 이 마지막 표현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장차 지불을 하게 하는 "첫 번의 불입금"(first installment) 혹은 "down payment"(분할 지불의 맨 처음 내는 맞돈) 혹은 "저당물"(pledge)에 대한 용어이다. 사도 바울의 생각에는 그리스도 안에 신자의 기업에 대한 첫 번의 불입금으로써 성령이 주어진 것이다.
비록 성령 세례는 물 세례와 구별되어야 하지만 결코 성령 세례가 물 세례를 대신할 수 없다(퀘이커 교도들은 대신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령의 사역은 신약성서에서 물 세례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우선 첫째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지상 명령을 하시면서 세례를 주라고 하실 때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28:19). 이러한 명령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하는데, 즉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그의 전 여생에 있어서 성령께 의존하는 관계에 놓여져 있고 성령께서 고무시키는 봉사를 위해 성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 자체는 이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나 성령과 세례받은 사람 사이의 이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진정한 세례일 수 없다.
세례와 성령 사이의 관련성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내용에 의해 보다 더 정확히 규정지을 수 있다(요3장). 예수께서는 영적인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성령에 의해 거듭나는 그 생명의 기원에까지 거술러 올라 가셨다. 동시에 주님은 성령에 의해 효력이 미치는 이 내적인 갱신을 물과 관련시키면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명백히 기독교의 세례에 대해 언급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본문이 세례와 전혀 관계없다고 추측하는 것도 역시 타당성이 없는 듯 하다(이 물을 풍유적으로 풀이하여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목욕재계나 정결 의식의 종교적 목적을 의해 시작된 기독교적 의식의 의미 가운데 포함되었다. 당시에 니고데모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 목적을 위한 물의 사용을 잘 알고 있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때에는 이미 "물....로 나지 아니하면"이란 구절을 세례의 외적 표식으로 이해하였고 반면에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란 구절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내적인 은혜로 이해하였다고 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성례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볼 때 외적인 표식과 내적인 은혜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신중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상징적 의미와 내적인 실제(혹은 실체)는 서로 병행을 이루어 나간다. 그러므로 세례는 성령의 내적인 갱신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다. 그러나 세례 자체가 이 갱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중생(거듭남)은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의 결과이다(요6:60절 이하를 보라)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사역이 세례와 연관을 맺고 있으나 세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도행전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사도행전 8:17절에서(사마리아 사람들),세례 후에 성령이 카리스마적 은사로 임하셨다.19:5,6절에서 (에베소의 제자들),세례를 베풀 때 즉시 성령의 임하심이 나타났다.
이 마지막 경우는 흥미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의 세례에 대해 질문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의 마음 가운데 성령과 세례 사이에 아무 관련성이 없었다면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를 물어보고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바울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면 너희가 누구의 세례를 받았느냐?"(행19:3).바울은 자연스럽게 세례와 성령받는 것을 결합시켰으며,이 사실은 고린도전서 12:13절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성령은 세례가 그 가운데 집행되는 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하여 한 몸이 되는 교회에 생기를 불어 놓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같은 구절에서 바울은 계속 말하기를 "...또 다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이 구절은 성만찬을 암시할 수 있으나 너무 무리한 해석인 듯 하다. 전체 구절이 모두 세례에 대한 말씀인 듯 하다. 문자적으로 그 의미를 옮기면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흠뻑 적시운"(watered 혹은 saturated)바 되었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성령 안에 잠기운 바 된 것이나 새 생명의 잔으로서의 성령을 마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다.
바울이 성령과 세례의 관련성을 맺어 주었다고 생각되는 다른 본문은 고린도후서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sphragizo<스프라기조>)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22절)고 했다. 2세기 초에는 세례를 "인"(seal)이라고 일컬었다. 따라서 바울이 인을 치는 비유 가운데 세례를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치 "인"과 같이 세례는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의 마음에 성령을 모신 것을 표시하고 확증하고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서신에 있어서 세례의 외적 성령에 대한 내적 영접간의 가장 밀접한 관련은 디도서에서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다"고 했다(딛3:56절). "씻음"(washing)은 명백히 세롈르 암시하는 말이고 "중생"(regeneration)은 새로운 출생(new birth,즉 거듭남)을 가리킨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내적 변화인데 이를 통해서 "성령의 (점진적인) 새롭게 하심"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세례와 중생에 관한 바울의 모든 기록이라면 전자가 후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례의 효력에 관한 그의 가르침의 더 큰 문맥 중에서 외적 표식의 의미나 성령의 능력 중에 그 어느 것도 무시하지 않는 면에서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세례는 그것이 상징적 양식 가운데 과거의 죄로부터의 내적인 정결케 함에 관계되어 있는 의미에서 중생의 씻음이다. 이로써 세례받은 사람은 세례(침례)의 물에서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삶으로 올라 오는 것이며 바로 이것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했다.
6. 성령과 안수
안수는 세례와 밀접하게 관련된 의식이며 여러 기독교회에서 그 형식에 따라 이 의식을 집행한다. 앞에서 논의했던 성경 구절들이 반영해 주는 바와 같이 성령을 받는 것과 세례 사이의 관련성 때문에 고대에는 교회가 세례 사이의 관련성 때문에 고대에는 교회가 세례 후에 즉시 특별한 의식을 집행하여 성령을 받는 것을 상징화시켰다. 새로 세례 받은 사람에게 손을 얹어 안수하고 그의 이마에 십자 형태로 기름을 발랐다. 이로써 그는 성령을 받아 신자의 영적인 제사장직에 성별된 것으로 보았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 의식이 오늘날까지 계속 시행되어 왔다. 오늘날 보통 유아 세례가 실시되기 때문에 그 유아의 성령 영접의 보증으로 갓난 아이에게 기름을 발랐다. 그러나 로마 교회에서는 성례로서 독립된 안수 의식이 사춘기 연령 때까지 늦추어졌다. 로마교회는 이 성례를 통하여 그들이 강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임하신다고 가르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의식에서 성례적 자격을 박탈하면서 조금도 완곡히 말하지 않았다. 루터는 이 의식을 가리켜 말하기를 "어리석고 거짓된 쓸데없는 것이며 주교들의 직분을 꾸며 주어 그들이 최소한 교회에서 할 일을 주려고 고안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비록 안수는 그 성례적 자격을 빼앗겼지만 유아세례를 집행하는 의식에서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질문한다면 고전적으로 그 답은 준비되어 있다(특히 루터교와 성공회에 있어서),즉 그 의식은 성령의 분여(나누어 줌)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국 공동 기도서"(English Book of Common Prayer)의 "안수 규칙"(Order of Confirmation)에 포함된 사상은 케블(Keble)의 "Christian Year" 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장식되었다. 그는 어린아이가 안수받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성령이여 우리들과 젊음의 정열 사이에 있는 일곱 겹 휘장을 당기소서. 성령이여 당신의 새롭게 하시는 강풍을 불어 보내시어 우리들의 열기 있는 이마를 달래소서.사도행전에 있는 두 실예에 있어서 세례에 뒤이어 안수와 성령받음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행8:17 사마리아 사람들.행19:6,에베소의 요한의 제자들)이와 똑같은 순서로 나타난 사건의 다른 예는 전혀 없다. 더욱이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장년들이었고 성령의 임하심은 카리스마적 은사를 포함하고 있었다(이것은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마술사 시몬이 안수의 효력을 주목하여 보면서 나타낸 반응은 상당히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반면에 오늘날의 안수 의식은 유아로서 세례받았던 자에게 시행하고 따라서 성령의 은사와 관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안수받을 때 성령을 받는다는 견해가 신약성서에 근거해서 확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중히 받아 들여져야 한다.
7.성령과 성서
교회의 전 역사에 걸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왔다.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유대인 성경의 권위는 분명히 성령의 영감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편을 기록하였다(마22:43,막12:36,행1:16).선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행28:25,벧전1:11,벧후1:21). 그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입어 "하나님께 받아 말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히브리서 저자는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성령이심을 명백히 밝혔다(히3:79:810:15).가장 포괄적인 서술은 디모데후서 3:16절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본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God-breathed,헬,theopneustos<데오프뉴토스> 기록되었다고 했다. 성경에서는 자주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표현을 하였다(막12:26,마1:22).이러한 표현이 "성령께서 이르시되"라는 말과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성령의 제3위로서의 완전한 신성을 더욱 입증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 주님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 것도 행치 않으셨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성령 충만하였고 그 말씀은 생명이었다. 이어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서 그가 떠날 때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기억나게 하시며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였다(요14:26).보편적으로 교회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의 이러한 인도를 사도들이 독특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과 교회의 교사로서 성령의 영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그들의 동참자들이 기록한 문서는 구약 성서와 나란히 교회의 최종적 권위인 것이다.
계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오순절 이후 계속해서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의 타당성을 확증하셨다(행1:82:1 절 이하).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과 그에 대해 증거하는 구약의 궁극적 목표였다(행2:22-41절). 이 증거는 신약성서 가운데 교회에 의해서 보존되어 왔다.
8. 성령의 내적 증거
스트라우스(D.F. Strauss)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킬레스의 발꿈치"(즉 유일한 약점)라고 칭하였다. 이것이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권위에 이르게 될 때 로마 교회는 교회의 마기스테리움(magisterium 혹은 teaching office)에 의존하여 도움을 청하였고, 종파심이 강한 사람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에 의존하였는데 이것은 계몽된 이성이나 양심 혹은 종교적 엑스타시(ecstasy)와 더불어 합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오직 성서(sola scriptura)에만 의존하여 결정하였다.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한 교리는 성령을 말씀하시는 동일한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그 진리를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 사람이 심중에 성경으로써 말씀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내적 증거는 기록된 계시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 밖에는 아무 계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적 증거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해 주므로 따라서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인 권위에 대한 충분한 신념과 확신은 성령의 내적 사역에 기인된 것인데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중에 그 말씀에 의해서(by) 그리고 그 말씀과 더불어(with) 증거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I.V).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자의 기름부음이 있어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사실을 알 수 있게 하신다는 요한의 말씀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요일2:20). 이 "기름부음"을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상의 해석인 듯 하다. 요한은 말하기를 이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시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고 했다. 이 말씀은 권면과 거짓 선생에 대한 경계를 하는 큰 문맥 중에서 선생들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하였다. 요한은 영감을 받은 사도로서 그 독자들이 처음부터 들어 왔던 진리 가운데 거하라고 강력히 요청하였다(요일2:24).
의미심장한 사실은 요한이 오직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사실상 그가 이 서신을 그들에게 씀으로써 이 권위를 행사해야 했던 상황에서 그의 사도권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거짓 교훈에 대항하여 또한 그 서신의 독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기름부음"에 대하여 그의 교훈의 진리에 대한 확증에 의존하였다. 이 거룩한 자의 기름부음을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성령은 본 서신의 독자들이 마음에 대해 그 사도가 그들에게 가르쳐 준 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확증해 주시는 것이며, 이로써 그들이 거짓 교훈에 미혹되는 위험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기름부음을 가졌다.
"증거"라는 말은 성령의 사역 중에 이러한 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아주 적절하고 성경적인 용어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탁월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대해 증거하신 것처럼 성령께서도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증거한다. 이것은 바로 디모데전서 3:16절의 어려운 구절("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시고")의 진정한 의미인 듯 하다. 즉 믿지 않는 자에게 정죄 받으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께서 성령의 증거(성경이 증거하듯이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에 의해 그 진실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이 예수에 대해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바를 믿는 자의 마음에 확증시켜 주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3:16절의 해석에 있어서 성경이 관련되어 있는 한 인간의 심중에 역사하는 성령의 증거의 중요성은 이 증거로써 그 성경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개인적인 말씀이 된다는 사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단순히 인간적인 서적으로 남아 있게 되어 세계의 명작 가운데 하나로 읽히거나 뛰어난 산문의 맛이 나는 문학적 걸작품으로 읽히게 된다.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는 첫째 아담부터 둘째 아담에까지 펼쳐지는 거룩한 역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정죄받고 이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 성령의 내적 증거가 성경의 형식적(formal) 권위(종교 개혁자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도 이 권위를 인정함)을 실질적인 권위로 변화시키고 그 결과 성경은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말씀이 된다.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그의 선포와 성령을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례와도 관련 시켰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6-8).
이 구절은 매우 어려운 말씀이며 세부적인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물"과 "피"는 예수의 세례와 십자가의 죽으심을 암시하는 말인 듯 하다. 만일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식으로 예수의 세례와 죽음이 언급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까닭을 이해하려면 신자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성찬식의 참여에 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그 성찬식이나 세례식에 부과되었던 것이다. 성령이 인간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외적인 성례의 표식은 성령의 내적 증거와 "일치"하며, 이 세가지가 그 진리에 대해 공통적인 증거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의 교리에 대해 계속 반대하는 입장은 그것이 단순한 주관주의라는 것이다. 그 질문은 계속 다음과 같이 밀어닥친다. 어떻게 내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단순히 심리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사람은 어떤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마음 속으로 확신하거나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4:1-3절은 다음과 같이 답해 주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거짓 선지자가 있으므로 한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는 방법은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고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2)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 논쟁의 움직임은 내적 확신에서 성육신의 외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으로 향한다.
물론 이것은 신앙의 영역 안에 서 있는 자들만을 위해서 적당한 기준이다. 개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나 교회 전체에 있어서 성령의 임재를 확증할 수 있는 "중립적"(neutral)기준이 요청된다면 사랑의 기준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없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그의 이웃도 사랑할 것이다.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어떻게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신다(요일4:7절 이하). 심령과 생활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내주하심은 분명히 성령의 임재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되었기 때문이다(롬5:5). 그러므로 성령의 모든 열매 가운데 사랑이 가장 위대하며 뛰어난 방법이다(고전13장).
9.성령과 교회의 선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가운데 들어오셨고 또한 성령의 사역 안에서 그 사역을 통하여 계속 역사 가운데 참여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 세상에서 일하신 성령의 행전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3:7)라는 표현으로 성경을 인용한 바와 같이 사도적 교회의 선교 사업이 성취하는 바는 "성령이 행하신 일"로 묘사될 수 있다. 교회의 선교 사업은 주님이 최후의 적인 사망을 정복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듯이 복음을 사회 안에서 변화시키고 구속하는 실재(실체)로 만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상에 아무 교회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에 성령이시고(계2:7111729) 교회가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송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며(행13:1-4) 어떠한 환경에서나 충성되게 이 증거를 하도록 교회에 능력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심을 알아야 한다(히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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