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침례)를 귀하게 여겨라(롬6:3-4)
사람들이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아무런 절차와 방법과 과정이 없이
바로 믿듯 사랑도 자신의 의지대로 사랑해 보려다가 백년하청이 됩니다.
사랑이 안 되는 이유는 사랑을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없는 탓이 아닙니다.
주와 하나가 된 계명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며 주와 하나가 되지 못함은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지 않음이며 진리의 성령이 임하지 않음은 세례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성령세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Q. 세례(침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
A. 많은 학자들이 세례는 봉헌과 헌신의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종교적인 의식과 죄 사함의 표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헌신하고 봉헌하여 그분의 종이 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이 참 세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하는 의식입니다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넘겨드렸습니까?
그런데 넘겨줬긴 했는데 다시 찾아서 내 마음대로 이끌고 다니고 있을 때가 많지요?
그래서 날마다 세례와 부활을 점검하세요. 안 그러면 계속 육신의 생활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그런 의미로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하는 찬송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받은 자리로 돌아가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롬 7장, 8장에 가보면 알지만 육신의 사람은 절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합니다.
세례와 부활의 원리를 터득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고,
아량을 베풀 수 있고, 상냥하고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세례와 부활의 실제를 체험하지 못하고, 우리의 신분이 바뀌고 성분을
바꾸지 못하여 천성이 바뀌지 않으면 결코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아니 육체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담 안의 천성은 죄의 종의 천성이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죽이는 본성입니다.
다만 자기의 유익이 될때에 가까이 와서 달라붙을 뿐입니다. 절대로 타고난 그 본성은 남을 사랑할 수 없어요.
단지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공동의 적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교회에서도 평소에 친하지 않던 사람이 두세 사람이 친하게 다니면 그들의 원수가 생겼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이 육체로 사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의 모든 교육은 지성 교육입니다.
사람들이 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하면 세상의 지성 교육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교사 출신들이 성령을 받는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건 교육학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성 그 이상의 차원을 잘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교육은 지성 교육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본성이고 천성 교육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뭡니까? 다시 산다,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겁니다.
이 말은 내 속에 새로운 천성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공급되는 생명 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제2의 사주라고 말하잖아요.
거듭난 인생이며 제2의 인생 팔자란 뜻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은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며 천성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급이 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속성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천국의 패스포트라고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에 사랑의 속성을 우리는 영원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의 영광과 더불어 이 사랑을 영원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 장사 되었다는
이 말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았다 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통은 예수님의 것이고,
그의 부활만 내 것이라고 한다면 손해는 누가 볼까요? 우리가 봅니다.
고난은 예수님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은혜에만
참예한다고 하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과거가
처리되지 않으므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우리의 과거를 청산해야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내게 나타납니다.
예방주사 맞듯이 주사로 다 죽어가는 병균을 받아서 이를 이기므로 그 병에 대한 면역을 키우듯이
죽을 병은 그리스도께서 다 앓으시고 우리는 다만 그 분에게 동참하는 의미에서 주의 고난을
세례와 성찬으로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힘에 겨워 못하겠다고 엄살을 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엄청난 지옥의 형벌의 고통을 당했는데 그 죽음에
참여하는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자아와 욕심을 죽이는 곧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내게 임하는 겁니다.
따라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나를 넘겨줘야 합니다.
다 된 밥에 숟가락 들고 끼어들듯이 이미 우리 존재 자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아담 안에 있던 옛날의 나에게서 떠나 그분과
함께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옛것에 대한 애착을 그대로
가지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 하려고 하면 그 부활의 능력과 영광이 내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행2:38)
세례를 제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옛사람을 이미
끝내 버린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주겠다는 말씀이지요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은 자기 속에 마땅히 버려야 할 것 중에
이것은 내가 꼭 지녀야 한다고 여기고 그걸 놓질 않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님의 것이고 그의 부활만 챙기려면 손해는 내가 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과 그의 죽으심에 나를 영원히 파묻어 버리세요.
나를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파묻어 버리면 볼품없고
쓸품이 없는 나는 없어지고, 정말 괜찮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역사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주의 영과 생명이 살리심의 복이 항상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행하게 하려 함’이란 말은 그 생명으로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나 길이 살겠네’ 하는 거죠.
영생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영원한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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