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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아름다운 그림책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1. 29. 05:52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세상은 아름다운 그림책



사십대 중반의 친척 여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여동생은 한동안 심하게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우울증에서 건져내 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요. 딸의 학교에서 알게 된 학부형 두 명인데 방에만 박혀 있던 저를 형님이라고 불러주면서 자기 집에서 김치전을 만들었다고 오라고 하기도 하고 자꾸만 밖으로 끌어내 말을 걸기도 하고 들어주기도 하는 거예요. 그 덕분에 제가 우울증에서 벗어났어요. 그렇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정말 감사했어요.”​

불행한 이웃에 미소 한번 지어주고 손을 한번 내밀어 주는 관심도 봉사라는 걸 알았다. 꼭 돈이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니었다. 변호사를 해오면서 나는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온기를 발견했다. 소설 속의 쟝발잔 같이 징역을 오래 산 죄수가 이런 말을 했었다. ​

“눈이 하얗게 세상을 덮은 새해 첫날 아침이었어요. 감방안의 냉기가 정말 면도날같이 날카로웠죠. 저는 바닥에 최대한으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감방문 철창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거예요. 신문지에 싼 고기덩어리 몇 점이더라구요. 설날 차례를 지낸 교도관이 고기를 싸서 졈퍼 안에 숨겨 가지고 들어와 모르는 척 하고 던져주고 가는 거였어요. 규칙상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되거든요” ​

그 말을 듣는 나도 가슴이 따뜻해졌었다. 또 다른 천사같은 교도관이 있었다. 그는 면회 한번 오는 사람이 없이 고독하게 지내는 재소자들을 상대로 그 딸이나 친척 명의를 사용해서 선물을 사서 보내곤 했다. 물론 자신의 박봉을 털어서 말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것이다. 그 교도관의 행위는 감옥안의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었다. 또 다른 형태의 인간이 있었다. 징역을 살던 한 소설가가 면회를 간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

“감옥 안에 들어와 보니까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다시 생각이 되네요. 입에 욕을 달고 사는 험악한 폭력범이 있어요. 아주 질이 좋지 않은 놈으로 보였어요. 그런데 하루는 그 놈이 복도를 지나가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신입이 한 명 있었어요. 단번에 힘이 없고 배가 고파하는 걸 알 수 있었죠. 이 험한 폭력범이 그 신입을 보자 주머니에서 빵을 꺼내 지나가는 신입의 입에 넣어주면서 ‘쳐 먹어 새끼야’하는 거예요. 그 속에는 분명 연민과 사랑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인간이라는 걸 단정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성경은 겉 사람을 보지 말고 속사람을 보라고 했나보다. 

유럽으로 패키지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여행객 삼십명 가량이 대형버스를 타고 다녔다. 

여행객 중 유난히 매너가 형편없는 사십대의 남자가 있었다. 함부로 말을 하고 처음보는 사람들을 막 대하는 타입이었다. 여행객들이 모두 속으로 그를 싫어하고 피했다. 나도 그랬었다. 

여행도중 어느 날 오후였다. 지친 여행객들은 자신들의 짐이 든 무거운 트렁크를 버스 옆에 팽개치듯 버리고 자기 좌석으로 가버렸다. 수십개의 육중한 짐들이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버스 기사가 그 짐을 들어 버스 아래 화물칸에 밀어넣으면 그 속에서 한 사람이 그걸 받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치면서 화물칸 안을 들여다 보게 됐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그 남자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행객들의 짐을 챙겨주고 벅차하는 버스기사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에게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면서 잘못 봤었다고 사과를 했다. 

그는 씩 웃었다. 사람마다 남을 돕는 방법이 다른 것 같았다. 


나환자촌에서 학춤을 추는 춤꾼 부부를 본 적이 있다. 부인은 소리꾼이었다. 

그 부부는 평생 남의 집 잔치에 가서 춤추고 소리를 해주고 받은 돈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집도 없이 교회의 구석방을 그냥 빌려 살면서 그 댓가로 청소를 해 준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딸도 노래를 잘했다. 아버지 엄마와 함께 나환자들 손을 잡고 함께 노래를 했다. 

춤꾼은 나환자들이 자기 가족의 공연을 보고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보면 기쁘다고 했다. 

나환자촌 위로공연에는 삼류캬바레에서 노래를 하는 무명 가수도 끼어 있었고 워커힐 극장에서 가야금병창을 하는 여성이 잠시 시간을 내서 합류했다가 가기도 하는 걸 봤었다. 


중국음식점의 오십대 배달원이 비좁은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면서 월급에서 얼마씩을 떼어 매달 고아원의 아이 몇 명에게 돈을 보내는 걸 보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세상은 아름다운 그림책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러사람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위해 자유롭게 봉사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내게 은밀하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희열과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 맛은 아는 사람만 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