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적은 돈 자주쓰기
실버타운 내 소극장 무대에서 몇 명의 오카리나 연주단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서울에서 동해까지 와서 노인들을 위로 하는 것이다. 방청객이 많지 않았다.
공연이 막 끝났을 때였다. 잘 걷지 못하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무대 쪽으로 가서 공연한 사람에게 슬며시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들의 연주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실버타운에서 외롭게 있는 그 할머니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 노인을 보면서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마음기슭으로 밀려왔다. 그 돈은 한 조각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런 경험들을 종종했다. 내가 인권을 유린당한 한 사람을 무료변호할 때였다. 그 사실을 우연히 신문에서 읽은 미국의 할머니가 백불짜리 한 장을 보내왔다. 집의 텃밭을 가꾸어서 얻은 수익금이라고 했다. 그 할머니는 육이오 전쟁 후 미군 상사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 백불짜리도 돈이 아니라 사랑조각이었다.
칠십대 말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나의 인권운동을 격려하면서 봉투를 하나 내놓았다. 작은 돈이지만 온기가 들어있는 돈이었다. 노인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깨끗하지만 허름한 옷차림이었다. 형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았다.
그 노인의 주소를 받아 두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 노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까치산역 부근 언덕의 신흥주택에 살고 있었다.
아들 집이었다. 노인은 대문 옆 차고를 개조한 방에서 혼자 지낸다고 했다.
근처 음식점에 노인을 모시고 가서 저녁을 대접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저도 감옥의 독방에서 오래 지냈어요. 변호하는 그 사람에게 알려주세요. 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고.
그런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자유로워지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고 말입니다.”
알고보니 그 노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독재정권시절 대놓고 바른 소리를 했다가 감옥생활을 한 목사였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돈도 불공평하죠. 어떤 사람은 썩어나가고 또 어떤 사람은 뼈가 휘도록 일해도 돈이 없고 말이죠.
그렇지만 꼭 많은 돈이 있을 필요는 없어요. 작은 돈이라도 그걸 좋은 효용으로 쓰면 되요.
더 나아가 돈이 없어도 되요. 친절한 말한 마디로 실망해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괜찮은 일이죠.
가난하지만 좋은 글을 써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도 좋고 청빈하지만 즐거운 생애를 보내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보이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닐까?오히려 돈으로는 할 수 없는 큰 일도 많아요.”
나는 내공이 깊은 멋진 노인을 만났다.
향기를 뿜어내면서 늙어 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까.
그에게서 나는 돈 쓰는 방법을 배웠다. 작은돈이라도 남을 위해 자주 쓸 줄 아는 노인이 멋진 노인인 것이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노인이 죽어가는 젊은이보다 낫다.
내가 아는 어떤 할머니가 있었다.
아들에게 얹혀살다가 며느리 눈치가 보이는지 집을 나와 작은 방을 얻었다.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현금으로 만들었다. 그 할머니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손자가 올 때마다 이십만원씩을 줬다. 그렇게 하니 손자가 바빠도 할머니한테 자주 왔다. 아들이나 며느리가 오면 백만원씩 줬다. 며느리가 찾아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서도 돈을 쓰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콜택시를 불러서 타고 갔다. 이웃에게도 틈틈이 돈을 썼다.
할머니는 단골 지압사에게 의료 침대를 사 주기도 했다.
노인이 죽었다. 그래도 통장에는 돈이 많이 남아 있었다.
몇 년 전 나는 소송을 당해 변두리의 작은 땅을 날릴 뻔 했다.
그때 나는 소송에서 그 땅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팔아서 다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나는 재판에서지지 않았다.
그 땅을 미련없이 팔아 버렸다. 그리고 작은 돈을 자주 쓰는 법을 택했다.
주위에서 바람을 넣고 그럴듯한 명분에 붕 떠서 기부하는 돈이 재미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걸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직접 쓰는 재미를 느끼기로 했다. 노숙자와 눈이 마주치면 한끼 밥값이라도 손에 쥐어 주었다.
길거리 공연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친구들 모임에서 지갑은 활짝 열고 입은 닫았다.
땀흘려 번 돈을 가족과 친구 이웃과 함께 먹고 마시는데 쓰는 게 행복이라는 성경속 솔로몬의 지혜를 뒤늦게 깨달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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