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 관하여 - 임보
남보다 많이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사람을 망친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면 남의 은밀한 주머니속까지 엿보게 되어 드디어는 범죄에까지 이르는 수고 있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분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이 욕심들로 말미암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현들은 욕심 버릴 것을 역설해 왔다.
맑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무욕청정(無慾淸淨)을 수신의 독목으로 삼아 평생 이에 매달려 지내기도 한다. 고승들의 삶이 그렇게 단출한 것은 바로 이 무욕의 실천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들에겐 집도 가정도 없다. 한 벌의 승복과 바리 그리고 염주가 전 재산일 뿐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번뇌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가지지 않는 것 곧 무소유가 가장 마음의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방편이 된다.
어느 스님은 난초분 하나를 소유하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 것인가를 글로 써보인 적이 있다. 그 난초분 하나를 곁에 두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공력을 쏟아야만 한다. 때를 놓치지 않고 물을 주어야 하면 적당한 햇볕과 온도를 좋아 자리를 옮겨주기도 해야 한다. 그놈에게 매어서 마음대로 외출할 수도 없다. 생각 끝에 그 스님은 그 난초화분을 남에게 넘겨주고 만다. 그리고 그 난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무소유’의 즐거움을 찬미한다는 글이다. 수긍이 가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읽고난 뒤 무언가 좀 개운찮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스님의 손길에서 벗어난 난초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스님보다 더 정성껏 보살펴주는 새 주인을 만나 잘 자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게으른 사람을 만나 푸대접을 받다가 시름시름 앓아 죽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난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떠나간 난초는 출가한 여식이 부모의 가슴 속에 남아있듯 옛 주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만일 그런 생각조차 지워버린다면 이는 마치 자신이 진 짐을 벗어 남에게 지우면서도 편안해하는 심정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는 생명의 유기(遺棄)행위와 무엇이 다른 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낳은 자식을 길거리에 버리기도 한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그 자식으로 말미암은 근심걱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이 버린 장애아들을 데려다 자신의 자식처럼 기르기도 한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 혼자만이 근심걱정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소유에 대한 욕심을 모든 생명체가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능이다. 삶이라고 하는 생명활동 그 자체가 수유지향의 행위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호흡의 동작이나, 끼니를 거르지 않고 음식을 열심히 섭취하는 것이다. 소유지향의 행위이지 않는가?
생명체는 생태적으로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다. 과욕이 문제이지 적절한 욕구는 삶의 활력소가 아닐 수 없다.
상상해 보라.
소유하기를 거부하는 수행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다면 얼마나 그 사회는 생기가 없을 것인가? 깊은 산 속의 고찰처럼 무거운 적막에 쌓여있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서로 많이 갖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집단이 있다면 이는 얼마나 처절하겠는가? 아비규환의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바람직한 세상은 서로의 적당한 욕구가 성취되고 적당한 이해와 양보가 실현되는 사회다.
이상향이란 근심걱정이 전혀 없는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 약간의 갈등과 기쁨을 번갈아 맛 볼 수 있는 다채로움의 세상일 것만 같다.
한편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의 과다보다는 소유자의 본심이다. 많이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진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냐가 문제라는 뜻이다. 하나를 가졌더라도 가진 자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하나는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열 개를 가졌더라도 가진 이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그 열 개는 세상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필요로 한 것은 자기만의 해탈을 꿈꾸는 열 사람의 승려보다는 보시를 행하는 한 사람의 장자다. 그래서 승려들도 소승의 닫힌 방에서 벗어나 대승의 열린 광야에 몸을 던지기도 하니 않던가.
그대가 만일 세상의 편에 있다면 적게 가진 것보다는 많이 가진 편이 낫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만큼 세상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비록 난초에 물을 주는 일이 힘겨울지라도 남의 손에 넘길 일이 아니다. 그대가 하는 것이 곧 세상의 짐을 그만큼 더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간 에세이21, 2006, 겨울호)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산 어머니의 바다 - 윤형두 (尹炯斗) (0) | 2013.08.14 |
---|---|
인생의 캔버스 - 박연구 (0) | 2013.08.13 |
어머니의 향기 - 임영숙 (0) | 2013.08.10 |
흙을 밟고 싶다 - 문정희 (0) | 2013.08.09 |
식자우환 (識字憂患) - 윤모촌 (0) | 2013.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