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향기 - 임영숙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다 익숙한 향기에 끌려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매일 오르내리던 지하철역 계단에서 나던 향기가 시내 한복판인 충무로역에서 났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출구 계단에서 만나던 할머니의 노점은 잡화가 계단 가득하게 쌓여 있다. 건전지를 시작으로 노란 고무줄, 휴대전화기 걸이, 바늘, 실, 옷핀, 무좀약 거기에 한 줌씩 담아 놓은 잡곡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만물상이다. 거기에 각종 야채를 한 줌씩 놓고 팔았으며, 항상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 마냥 더덕 향기는 늘 나를 다독였다.
할머니의 상점은 바쁠 것 없이 어느 날은 졸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근처 분식집에서 시킨 백반을 습관적으로 먹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명절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는 할머니의 속사정이 가끔 궁금하다. ‘자식은 있을까? 있다면 몇이나 될까? 아니면 자식이 없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좌판을 벌인 것은 아닐까.’ 초라한 행색을 보면 자식이 없는 것도 같고 자식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장사를 하는 것인지.
게이트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출구를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익숙한 향기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향기로 내 발걸음은 빨라지고 향기의 발원지를 눈으로 확인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다. ‘오늘도 건강하시구나.’
가끔 지갑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할머니 곁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가 껍질 벗긴 더덕을 담아 오기도 하고, 수입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서리태 한 줌을 사오기도 한다. 그곳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며 내 어머니를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 많은 자식을 혼자 키워야 하는 멍에를 메고 30년 넘게 살아온 질곡의 세월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늙은 어머니를 모셔본 까닭인지 길에서 나이든 어른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목이 아리게 바라보는 날이 늘어가고 있다. 나도 어느 날인가 저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지하철 계단에서 만나는 더덕 향기는 늘 나를 유년으로 이끌어 어머니를 만나게 한다. 봄이면 어머니와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었다. 어린 내 눈에는 먹을 수 있는 나물과 먹지 못하는 나물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잘도 가려 내셨다.
수리취(떡취), 참취를 구분하는 방법과 삽초싹이며 참나물, 도라지, 고사리, 고비, 더덕의 생김새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밤새 비가 내리다 말쑥하게 갠 여름 아침이면 장화를 신고 어머니와 버섯을 따러 산에 올랐다. 싸리버섯, 송이버섯, 꾀꼬리버섯. 어머니는 모르는 게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모르겠고 내 눈에는 띄지 않는 버섯을 어찌 그리 찾아내시는지 나도 크면 어머니처럼 세상 모든 것을 알리라는 희망을 품었었다. 어머니는 독버섯일수록 현란한 색상을 띄고 모양도 예쁘게 생겼다고 말씀하셨다.
더덕은 도라지처럼 뿌리를 먹는 약초이지만 도라지와는 달리 넝쿨을 뻗어 서로 엉키어 살아간다. 도라지는 그때도 텃밭에 재배를 했었기에 그리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더덕은 야생더덕 뿐이었다. 어머니는 산나물을 뜯으러 가실 때 늘 옥양목 행주치마를 두르셨다. 내게는 보자기를 허리에 매어주고 끝자락을 어머니의 행주치마처럼 허리춤에 양쪽으로 묶으면 나물을 뜯어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주머니가 되었다.
그늘 밑에 수런거리던 도라지꽃이며 청미래 넝쿨 하얀 꽃이 굽혔던 허리를 펴게 해주고, 장끼가 화려한 꽁지깃을 자랑하며 퍼드덕 대기도 했었다. 어머니는 나물을 뜯을 때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늘 조심을 시켰다. 그래야만 여름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뜯을 수 있고 내년에는 더 튼실한 잎을 내어 놓는다고 하셨다. 더덕을 캘 때도 어린 것은 두시고 몇 해 묵은 것을 캐셨다. 줄기만 보고 몇 년 묵은 것을 어찌 가려내시는지 어머니의 눈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야생더덕일수록 향기가 진하다. 산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캐온 더덕 껍질을 벗기며 어머니는 늘 말씀을 하셨다. “껍질이 투박하고 못생긴 것일수록 향기가 진하고 맛이 있단다.” 현란한 색상의 버섯에 독이 있듯 외모를 가꾸는 일보다 마음 가꾸는 일에 힘쓰고 투박하게 생겼지만 향기와 맛을 지닌 더덕처럼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했지만 늘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가르치신 내면 가꾸는 일이나 향기와 맛을 내기에는 난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다. 입버릇처럼 가르치신 어머니의 훈육이나 모자라도 내 손을 잡고 끝까지 지키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향기 나고 맛이 든 사람이 되도록 살아있는 동안 쉬지 않고 노력을 해야겠다. 지하철역 계단에서 더덕 향기가 흩날릴 때마다 어머니 향기처럼 그곳을 서성거리게 된다. 어머니의 향기에 취해 한참을 바라보다 돌아서며 나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향기를 품고 있니?’
수필가. 경기도 여주출생. 문학저널로 등단. 수필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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