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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자우환 (識字憂患) - 윤모촌

Joyfule 2013. 8. 8. 09:17

 

 

식자우환 (識字憂患) - 윤모촌

 

 

 

어줍지 않은 글을 쓰게 되자, 내 필명(筆名)이 어려운 글자이니 고치라고 하는 이가 있다. 모(牟)도 그렇고 촌(村)의 옛글자 邨도 흔하게 쓰는 글자가 아니다. 기왕에 '촌'을 쓰기로 한다면 알기 쉬운 '村'을 쓰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아닌게 아니라 웬만한 자전(字典)에는 邨자가 수록돼 있지도 않다.

 

당초 당선 작품에 썼던 이운(伊耘)을 牟邨으로 고칠 때, 문화부 기자가 왜 그렇게 어려운 글자만을 쓰느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문사에서 보내 온 시상통지 겉봉엔 한글로 윤모순이라고 적혀 왔는가 하면, 미지의 독자로부터는 윤모춘 윤비둔 윤발촌 윤모천 윤모돈이라고 해 온다. 담당기자의 말을 들으니, 대체 자전에도 없으니 무슨 글자냐는 문의 전화가 많았다고 한다. 하찮은 필명으로 이토록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된 것은 미안한 일이다.

 

내가 모촌을 필명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5, 6년전의 일이 된다. 교육 잡지·주간지 등에 독자투고를 하면서 쓴 것인데, 늘 전원서경(田園抒景)이 좋아, 보리가 패고 소가 우는 마을―牟村으로 자작한 것이다. 그런데 애초의 村을 邨으로 바꾼 것은 몇 해 전에 있었던 월간 서예지의 지우회원전(誌友會員展)에서 고자(古字)가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는데다가, 邨자의 호를 가진 석촌(石邨)의 인품에 매료되어 바꿔 쓰기로 한 것이다.

 

석촌은 한말 고종 때 예조·이조판서를 지냈고, 법부·탁지·내부 등 대신의 명을 10여 차례나 받았으나, 한번도 그 직을 수락하지 않은 윤용구(尹用求) 그분이다.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본이 주는 작위(爵位)도 받지 않고, 지금의 장위동으로 나가 은거를 하면서 서화를 벗하며 지냈다 한다. 그래서 그분의 서화에는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는 호도 보인다.

 

글자가 의사 전달의 기호이고 보면, 알기 쉽고 쓰기 쉬워야 하는데, 한자는 그 수가 많고 어려워서, 어려운 글자를 쓰면 유식한 것으로 안다. 한문에 능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글자를 알기란 쉽지가 않은데,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 필명의 경우는 그저 취향에 맞는 글자를 찾아 쓴 것 뿐이다.

 

이름에 대해 다른 글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어려운 글자의 이름을 가지면 조상 덕에 글깨나 배운 탓이라고 빈축을 사기도 한다. 인간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자고 문자를 만들어 냈으나,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그것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문자의 역기능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글자로 해서 불행을 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만이 지니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은 이래서 생겨난 것이지만, 사람이 문자를 알게 되면 걱정이 따른다는 뜻이다.

 

부모덕에 글깨나 배운 자가 있었다.

처가엘 갔다가 장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을 청했다.

 

'원산대호(遠山大虎)가 자근산래(自近山來)하여, 오지장인(吾之丈人)을 착거(捉去)하니, 유창자(有槍者)는 지창이래(持槍以來)하고, 유궁자(有弓者)는 지궁이래(持弓以來)하고, 무창무궁자(無槍無弓者)는 지봉이래(持棒以來)하여 오지장인을 구지(救之)하렷다.'

 

이렇게 외쳤지만 마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리 만무했고, 장인이 호랑이 밥이 된 것은 말할 것이 없다.

이 말을 풀어 본다면, 먼 산 호랑이가 가까운 산에서 나와 내 장인을 물어가니, 창을 가진 사람은 창을 들고 나오고, 활을 가진 사람은 활을 가지고 나오고, 창도 활도 없는 사람은 몽둥이를 들고 나와 내 장인을 구해라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원이 그 자를 잡아다가 꾸짖으며,

'네 이놈! 또 그런 문자를 써서 불효를 저지를 테냐' 하고 볼기를 쳤다.

 

그랬더니 그의 입에선 또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아야둔야(我也臀也) 갱불용문자호(更不用文字乎)

―아이쿠 볼기야, 다시는 문자를 쓰지 않겠습니다.'

 

볼기를 치다말고 원은 탄식하면서 '식자우환이로다' 했다 한다.

누가 지어낸 말인지 지식인을 잘 비꼬았다.

 

처음에 나는 한글로 '모촌'이라 쓰기도 했다. 그때 소설가 오영수(吳永壽)선생이 소설집을 주면서, 내게 묻지도 않고 '茅村(모촌)'이라고 써 주었다. 이와는 달리 지방의 모인은 편지를 보내면서 봉투에 큼직하게 毛村이라고 해 왔다. 난데없이 '털난 마을'로 변한 필명을 들여다보면서 혼자 웃었다. K출판사 부사장이 책을 주면서 역시 毛村이라고 적어 주었다.

 

앞의 모촌(茅村)은 써준 분의 안식이 드러나 좋은 호가 될 수도 있으나 조금 어렵고, 후자는 많은 사람이 쉽게 아는 글자를 쓴 셈이다. 그러고 보면 많은 사람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털난 마을'이 좋은 필명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쉬운 글자를 두고도 어려운 글자를 쓰는 것은 쓸데없는 고집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쉬운 글자를 쓰라고 하는 이가 있지만, 이름 알리는 일이 무슨 대수로운 일인가. 완당(阮堂)은 추사(秋史)라고 해야 사람들이 더 잘 알지만, 그분은 2백도 넘는 호를 썼다고 한다. 때와 처소에 따라 즉흥적으로 지어 쓴 것 같은데, 사람들이 호는 몰라봐도 글씨로 완당을 알았을 터이니, 그분은 자신의 호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도 허욕을 부린다면 필명 따위에 집착할 필요없이, 문장만으로도 남이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썼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필명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려운 글자를 고집하는 내 필명도 '식자우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