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茶 - 이일헌
바람이 소슬하다. 잠시 거니는 윤중로, 가로수 철 이른 단풍 두서너 잎이 발 앞에 내려앉는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모양도 빛깔도 각각이다. 이 잎들은 이른 봄 인편(鱗片)을 벗으며 눈을 떴으리라. 그로부터 세 계절을 걸치면서 제 삶에 충실하다가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슬에 젖어 아침 햇살을 영롱하게 반사하던 너, 푸름을 자랑했었지. 신선한 산소를 내뿜는 엽공(葉孔)은 뒷면에 있다. 그리고 병충해와 기상력(氣象曆), 이 도시가 뿜는 다이옥신도 카드뮴도 함유하고 있을 잎사귀. 서서히 붉게 물들면서 마침내 한 잎 낙엽이 된다.
불혹에 접어들면서 우연히 만난 것이 차(茶)다. 거기에는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루 몇 잔의 차를 음미하면서 삶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또 그 후에 들어선 글쓰기가 어느덧 팔 년, 그러나 이 두 삶이 ‘한 집’을 이루기는커녕 아직 어느 하나도 턱없이 미흡하다 생각되는 요즘이다. 『다경(茶經)』에 이르기를,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이 있나니, 첫째는 만드는 법이요. 둘째는 차 고르기, 그리고 그릇, 불, 물, 굽기,가루내기, 끓이기, 마시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장원의『다록(茶錄)』에는 차가 조금이라도 오염되면 향기· 빛깔 · 맛의 참된 성품을 잃는다 했다. 마음을 비우고 가지런하지 않으면 좋은 차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법, 문학의 길도 어찌 이와 다르랴. 수필과의 만남, 그 바다를 헤맨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본다. 차에 깊이 빠졌던 세월은 나의 생애에 가장 생기롭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가끔씩 맑고 향긋한 차가 가슴 속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울림은 언제나 지나고 나면 퇴색해 버리는 것, 어디엔가 가두어보고 싶었다. 또 선인(先人)들의 글을 접할 때, 그들의 마음을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 편린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90년 정월이었던가. 남쪽지방으로 여행하고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문득 뒷방의 낡은 상자를 꺼냈다. 거기에는 많은 자료들이 포개진 채로 잠자고 있었다. 80년 9월, ‘東茶軒’에서 처음 차를 공부하던 때의 노트가 있다. 그 이듬해 차의 성지인 ‘일지암’ 복원 일주년 기념행사에 갔다가 ‘녹우당’과 ‘다산초당’을 방문했던 이야기며, 어느 날 재질이 다른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서 그 특성을 적어 놓은 글들과 각종 스크랩도 적지 않다. 또 일간지 ‘주부 수필란’에 발표했던 글과 몇 편의 시도 있다. 82년 3월에 흘려놓은 ‘茶’라는 제목의 詩다. 그대는 마음을 잡고 서안을 마주하였다. 그러나 막막하다. 웬일인지 며칠을 보내도 원고지 한 장 메우지 못했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과 그 동안 공부하며 고뇌했던 차의 세계는, 붓만 잡으면 문장이 줄을 설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졌다. 글쓰기가 예삿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고심하다 늦게나마 전통문화를 두루 공부하기 위해 박물관대학에 등록을 하고 문장수련도 시작했다. 관심을 끄는 장르는 산문이었다. <솔바람 소리> <한 마리의 학> 등을 쓰고 또 퇴고했다. 그러나 붓을 들 때마다 느끼는 두려움과 좌절은 언제나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다 어느 날 어울리지 않게 문단의 말석에 이름이 오르고, 또 문우들과 어울려 공저 몇 권도 펴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필문학은 먼 그대처럼 그 자리에 있다. 글을 쓰다보니 문(文)과 차(茶), 격이 걸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성품이 삿되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려면 자신을 수없이 돌아보아야 하지 않는가. 풍부한 정서로 삶의 이상과 멋을 추구하는 장르라는 것도, 평범한 일상을 언제든지 누군가와 진솔하게 나눌 수 있음도 마찬가지다. 색향미가 잘 어우러진 한 잔 차는 한 편의 시요 수필이다. 마음속에 핀 꽃이다. 저 천지만엽이 지금 단풍으로 익어 가는 것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저들의 마지막 소임일 것이다. 그 중 붉은 잎 하나, 잘 우러난 찻물로 물들여진 수필이 나였으면 싶다.(1998. 가을 수필공원)
내 영혼의 오후에
살며시 스며든 녹색 실바람
안개 걷혀
소쇄한 산마루에
영롱하게 맺힌 감로수
시름 여위고
티끌에 묻혀
회빛 자욱한 가슴
두어 모금 작설로 씻어 내리면
찻잔에 마알갛게 뜨는
청자빛 하늘
신선했던 추억과 아직도 체온이 느껴지는 감회와 아쉬웠던 시간들이 다시 살아난다. 어느 해, 구 소련의 망명 작가 조지프 브로드스키에게 기자들은 왜 글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인간이 이루는 것들과 시간은 항상 기록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 <수필과 차>는 2005년 문예한국사 간『21세기 한국대표명수필선』에 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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