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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이야기 - 도월화

Joyfule 2012. 7. 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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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이야기 - 도월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예쁜 여자로 태어나 패션모델이 되어보고 싶었다. 대체로 단조로운 남성 의상에 비해 여인들은 갖가지 옷을 다양하게 차려입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경제적으로 좀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 때는 옷가게를 지나다가 사고 싶은 예쁜 옷이 눈에 띄면, 나보다 부유한 이웃의 친구에게 가서 그 옷을 사라고 권했다. 같이 옷가게에 가서 입어보라고 그러고 어울리는지 봐주었다. 만약 친구 마음에 들어 옷을 사게 되면 바라만 보면서라도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대학에 다니는 큰애가 어릴 때이다. 아이를 업고 친정 나들이를 가는 길에 친정 집 앞 단골 약국의 약제사와 마주쳤다. 그 분은 나와 같은 대학을 다닌 아득한 선배님인데, 하이고, 네 엄마가 처녀 때는 일류 멋쟁이였는데, 너 때문에 동네 아줌마 다 됐구나, 하고 업힌 아기를 보며 웃었다. 나는 얼른 나의 행색을 내려다보았다. 흔히 할머니 신발이라고 하는 편한 단화, 집에서 막 입는 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머리는 뒤로 아무렇게나 묶어 그야말로 편안한 아줌마 차림이었다.

순간적으로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아기 엄마에게 걸 맞는 옷이면 되지 싶어 금방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무리 예쁜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은 시대이지만, 자신의 상황이나 수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허한 사치는 허영일 뿐 참다운 멋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패션모델 이란 직업은 그 속내는 잘 모르겠으나 겉으로 봐서는 모든 여성이 선망할 만하다. 다양한 디자인, 온갖 장신구를 다 해볼 수 있으니 여자로 태어나 여한이 없을 것만 같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의상 모델이 되고 싶다. 봄에는 옷소매에 로맨틱한 주름 장식이 있는 상아빛 실크 블라우스에 집시 풍의 꽃무늬 화려한 스커트를 입고 싶다. 치마 끝단에는 레이스 프릴이 달려있으면 좋겠다. 가을에는 와인 색과 검은 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샤넬 라인 체크 원피스의 단추를 얌전히 채우고 우아하게 다운타운을 거닐어 볼까. 가끔은 단추를 풀고 검은 색 터틀넥 셔츠에 하얀 진주 목걸이를 하고, 그 위에 기다란 와인 색 머플러를 아무렇게나 자연스레 두르고 갈바람에 물결치는 갈대밭에 서 볼까.

값비싼 브랜드 옷을 제외하고는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옷쯤은 사 입을 수도 있지만 패션모델처럼 멋지게 입는 것을 꿈꾸어 본 것이다. 어차피 모델처럼 될 리는 없고 그럴 바에는 나 자신에게 맞는 옷, 나의 체형만이 아니라 나의 처지에도 어울리고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는 옷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행착오도 겪었다. 눈으로 감상만 하기 좋은 옷과 내가 입을 옷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된 때는 이미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가 있었다.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샤넬은 디자이너들이 여성의 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옷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샤넬 라인을 고안했다고 한다. 최근에 국내 출판된 '코코 샤넬'(앙리 지델 지음)에서도 그녀는 일관된 패션 철학과 자유롭고 간편한 복장을 권유하고 있다. 그녀에게 일관된 패션 철학이 있듯이 옷을 입는 소비자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겠다.

나는 요즘도 사 반세기 전 처녀 때 입던 허리 라인이 들어가지 않은 박스형 실크 블라우스나 니트 원피스를 코트나 재킷 안에 바쳐 입고 다닌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은 한 옷가게 주인은 사람들이 모두 손님 같으면 옷 장사들 다 굶어죽는다고 엄살이었다. 누가 뭐래도 남들이 얼굴 찌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옷이 좋다. 굳이 경제성을 떠나서라도 오래 된 의복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 날의 추억도, 꿈도 고스란히 담겨있을 테니.

딸이 없는 나는 공주처럼 예쁘게 꾸민 여자 애들이 부럽다. 백화점 쇼 윈도우에 걸린 화려한 원피스를 보면 무작정 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럴 때는 조카나 주위의 친구 딸들에게 불쑥 사서 선물도 한다. 그것도 그 애들이 크고 나니 요즘 애들의 다양한 취향을 맞출 재주가 없어서 그만두게 되었다.

세상에 옷이라는 것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인체의 아름다움도 여성의 신비감도 옷이 있기에 가능한지 모른다. 현존하는 생물체 중에서 유일하게 옷을 입는 존재가 사람이다. 인류 사상 처음 등장한 옷은 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를 먹고 수치심을 느낀 이브가 몸을 가린 무화과 잎사귀다.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도 바늘이나 실을 잦던 도구 등이 출토되고 있으니 의복은 인류역사와 함께 해왔다 하겠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대자연은 신의 의복' 이라고 했다. 그는 '의상철학'에서 세상 모든 것을 의복에 비유, 세상 부귀영화도 모두 옷과 같다고, 영혼과 의지의 힘을 강조했다. 하지만 옷은 삶의 활력을 주는 면이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을 볼 때 나는 의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본다. 내가 입을 것도 아니고, 슬하에 딸이 있어 입힐 것도 아니건만 그 장면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생생한 연기를 펼치는 영상 속의 배우들을 보면 활기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피천득님의 '맛과 멋'이란 수필에 '맛은 몸소 체험을 해야 하지만, 멋은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는 구절이 있다. 옷은 입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는 즐거움도 있다. 옷, 꼭 입어야 멋인가. 바라만 보아도 멋지다. 이제 곧 겨울이 가고 산과 들에 꽃이 피면, 화사한 옷차림의 여인들이 거리를 장식할 것이다. 봄은 여인의 옷차림으로부터 온다던가. (2002. 2)


- 도월화 수필집 ' 여월여화 (如月如花)'/2007년 봄 선우미디어 출간,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