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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개수 장로 (기장)

Joyfule 2009. 6. 12. 00:29

순교자 김개수 장로 (기장)

 

김개수 장로(1900-1950)


1900년 4월 6일에 전남 장흥에서 김문오의 외아들로 출생 1927년 5월 20일 안장례씨와 결혼하고 같은 날부터 목포 양동교회 출석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 교회 민족주의자 박연세목사 밑에서 신앙행활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어묵을 만들어 사업에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교회를 봉사하든 중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하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순교하기 까지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조실부모하고 외로움을 경험한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교회학교 교사로 또는 밤 늦게 박연세 목사의 뜻을 받들어 부녀자들과 청년을 위한 야학당을 개설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29년 박연세목사의 목회 지침에 의해서 목포 동쪽 연동교회를 기도처로하여 출석하여 봉사하고 1934년 초대 교역자 문명록 전도사부임 초대목사 이남규목사가 부임 교회가 부흥하고 김개수는 여러 집사들 틈에 끼어 스데반 처럼 살겟다고 다짐한 일등 집사였다.

1946년 6월 장로임직 이남규목사의 영향을 받아 애국적인 신앙인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자리잡았다. 신사 참배에 항거하다가 박연세 목사, 김창옥 장로, 이남규 목사 등 20여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순교 등 고문을 당했고 김개수장로는 조선교 조선교단으로 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 이남규목사를 모시고 30리 밖에 시골인 무안군 일로면 상리교회로 출석하면서 신사참배 없는 예배를 드렸다. 해방 후 정부수립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국방장관 표창을 받았고 해방 후 첫번선거를 공정하게 치른 공로로 국회의장의 공로표창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무법천지에 동네 파출소를 손수 지어 6명의 순경을 두어 악습에 빠진 청년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당시 연동교회를 시무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옷도 벗어주는 자애롭고 경건한 최명길 목사를 존경했고 최목사는 김장로를 든든한 동역자로 여겼다. 그는 행동하는 애국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그의 강연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유모어와 탁월한 설득력이 있어 청중을 사로잡아 이끄는 거인이었다. 그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식구까지 불러모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에도 모범이 되고 자녀들을 철저한 신앙의 사람으로 양육하며 아브라함이나 고넬료를 흠모하였다. 6.25전란으로 애국청년단체의 단장으로 숙청대상 1호였다. 제주도는 이미 빨지산에 수중에 들어가고 목포도 시간문제였다.

연동교회 당회가 모여서 교인들을 어디로 피난을 시켜 보호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특별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문밖에서 김개수 장로가 최명길 목사에게 "그러면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최명길 목사도 김개수 장로를 붙들고 "그래요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인사를 하면서 헤어졌다.

김개수장로는 최목사와 약속한대로 총칼로 무장한 공산당들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그의 신앙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를 전하고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애국청년단의 일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변호하고 1950년 음력8월 16일 밤중에 대박산으로 끌려가 기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집단 처형 당해 순교했다.

 

장남 김옥남 목사. 차남 김승남 목사. 장녀 김옥금권사. 차녀 김순자 김갑배목사부인.(장남 김종현목사 차남 김종철목사) 삼녀 이순이 권사. 사녀 김순옥 권사 국제어린이 재활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