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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기주복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6. 10. 21:06

순교자 기주복 목사 (장로교)

 

기주복 목사(1897-1950)

 

 


“김구와 이승만의 卒徒(졸도) 기주복을 타도하자” 시뻘건 글씨로 플랭카드를 만들어 든 젊은 공산당원들이 곡산읍교회 사택 앞으로 몰려와 소리를 질렀다. 1946년 11월 8일 새벽 2시 온 식구들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몰려 잠이 깨었다.

 그때 젊은 공산당들은 손에 망치와 삽 괭이를 들고 있었다. 얼마만큼 구호를 외치다 이제는 대문이며 방문을 짓부수고 광기어린 몸짓으로 집안을 부수고 수라장으로 만든 후 기주복목사를 잡아갔다.

 

기목사는 “11월 3일 선거 안한 것은 주일이기 때문이요 보시오 이게 민족해방을 외치는 붉은 당원들의 모습이란 말이요 ----” 기목사는 1897년 10월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대정리 두대동 뒤주터에서 기형달 영수와  정영애 여사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일날 낳기 때문에 주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졸업반 때인 1919년 2월 서울에서 올라온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만세운동을 부르기 위해 태극기제작 독립선언서 복사등 준비를 시켰다. 기주복은 황해도 수안의 만세운동을 책임지고 고향으로 파견되어 구두 밑창에 독립선언서를 깔고 다시 못질을 해서 신었다. 고향에 와 아버지 기영수와  교회대표들과 상의하고 동리의 뜻을 같이할 동지들과 협의했다. 그들의 결의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첩보 제공자에 의해서 주동자인 기영수의 집은 경찰에 포위되고 기주복은 그 어머니가 쌀독밑에 넣고 쌀로 덮어놓아 발각되지 않았고 기주복 부친 기영수는  잡혀가고 기주복은 동생과 함께 간도로 갔다.

 

이듬해 동생이 돌림병으로 죽자 어머니의 간청으로 귀국해서 숭실중학교 선생으로 일했다. 교육위원회에 자격상신을 했고 저녁에 집에와서 식사를 할 때 일경이 들어닥쳐 그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죄목은 수안면 3.1운동 주모자 평양감옥에서 2년형기를 치루었다. 형기를 마친 후 곡산학원 교사로 봉직했다가 부름을 받아 평신에 입학했고 1932년 제27회 절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천곡대정리 교회를 시무하다가 봉산군 사인면 계동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계동교회 기목사 주관으로 강병석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5개교회가 야유회로 정방산 대성사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대성사 안에 일본 천황의 영정을 보고도 고개한번 끄떠김 없이 지나친 강병석 목사의 일로 주지승과 다투다가 기목사가 책임지기로 했는데 몇일 후 황주경찰서에서 기목사를 연행해 천황불경죄로 해주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해방후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46년 11월 3일 주일 선거를 안했다는 이유로 반동분자가 되었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타도 주기복을 외친 것도 이같은 연유였다. 처남이 남한으로 피난가자고 했지만 교인이 다 간 후에 가겠다고 했는데 1950년 6월 24일 평양에서 전보가 왔다. “위독속래 평양 아들”평양에는 기목사의 장남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서 보낸 공산당들의 술책의 전보였다.

 

그날 새벽 기목사가 조반을 먹고 있었는데 평양에서 사모님께 전화가 와서 받으라고 해서 사모님이 나갔다 돌아오니 기목사는 공산당에게 끌려가고 보이지 않았다. 공산당들은 요시찰 인물들을 미리 잡아 감금함으로 후환을 없애려 한 것이고 그후 기목사는 소식이 없다 그를 잡아 평양으로 압송했던 이인형은 남한에서 붙잡혀서 죄값을 치루었다. 기주복목사의 뒤를 이어 아들 기현두목사는 2008년 현재 새온교회 담임목사로 충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