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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영윤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6. 18. 06:51

순교자 김영윤 목사 (장로교)

 

김영윤 목사(1902-1950)


1919년 3.1운동시 3월8일 대구 장날을 기해 계성학교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평양신학교 재학중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 대치한 것이 일경의 노여움을 사 투옥당했다가 1935년에 출옥하여 안악읍교회 조사로 봉사하다가 193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안수받고 안악읍교회 담임으로 부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몇번의 옥고를 치루었지만 교회는 그때마다 다른 목사를 두지 않고 기다렸다가 김목사를 다시 당회장으로 환영하기를 몇차례 목회경력이 16년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 후 황해노회 노회장으로 노회를 재건 교회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안악읍교회는 대지가 1200평 본당규모 160평 화강암 석재건물로 장년만도 500-600명이었다. 성전아래층을 교육관으로 하여 완벽한 여성훈련의 도장으로 만들었고 당시로선 생각지도 못한 선견자적 목회자였다. 교회운동장에는 정구 코트와 운동시설을 갖추어 놓고 앞서가는 모범교회상을 심었다. 청년회로 하여금 밴드부를 조직케하여 월 1회 정기연주회 겸 노방전도를 벌려 시민들의 눈을 교회로 돌리게 했다.

교회학교내에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해 스스로 교장이 되어 농어촌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

 

1946년 조직된 기독교도연맹 가입에 거절하자 시시콜콜 박해를 받았으나 이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한목사는 양들을 버릴 수가 없다'는 이유로 월남하지 않고 탄압을 견디었다. 1950년 6.25동난 하루전 공사군에 체포당해 해주형무소에 감금당했다. 전쟁이 길어지고 유엔군이 북진이 이루어지게 되자 공산당은 감옥에 반체제 목사들을 위시해서 반공인사 반동지식인들을 반공호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터뜨려 죽이거나 우물에 넣어 생매장을 하고 손도끼로 찍어 죽이기도 했고 해주형무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나오면 해주 앞바다 용당포에 던져넣어 수장을 시켰다.

 

김영윤목사는 고문에 온 몸이 상하고 찢어졌는데도 원래 건강하다보니 끝까지 견디었지만 용당포에 던져 넣을 때 던지워 한많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나라로 옮겨갔으니 49세였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신덕권사. 장남 김정식장로는 뉴져지주 의사. 차남 김정환장로는 해성여상 교감을역임. 현재 평양신학 신학연구원 교학처장. 삼남 김정권 장로는 와싱톤 거주 기독교사상 편집국장 역임. 장녀 기정순권사는 계성고교 교목실장 이삼열목사의 사모. 차녀 기정심권사. 삼녀 김정실집사 등 선친의 순교신앙을 전승하며 각 분야에서 선한열매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