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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철훈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6. 20. 00:18

순교자 김철훈 목사 (장로교)

 

 

김철훈 목사(1904- 1948) 


김철훈은 1904년 10월 7일 경기도 양평에서 독립유공자 김경덕 목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헌병에 검속되어 4년의 옥고를 치렀다. 부친의 옥살이로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김철훈은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 마저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민족지도자가 되기위해서는 배워야했기에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4년의 옥고를 치룬 부친을 지켜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김철훈은 한으로 얼룩진 민족애를 배웠다. 그리고 고학을 결심하고 평양을 택했는데 이는 부친 김경덕 목사의 친구인 선교사 곽안련 목사의 도움이 있었기 가능했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의거사건이 발생하여 서울을 거처 동년 12월 14일 숭실전문학교로 번저 평양시에 독립운동의 격문이 붙기 시작하여 진행되었다. 겨울 방학 시 잠시 주춤하다가 1930년 1월 21일과 22일 양일 숭실전문학교 종교부장이던 김철훈 학생과 그의 친구 강태민 학생이 주동이 되여 숭실전문학교 전교생과 평양시 12개교 학생이 참가하는 대규모 학생 만세 사건을 일으켜 14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김철훈은 최초의 1개월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뼈가 꺾이고 갈비뼈가 우골 드는 고문 속에서 그는 이를 다물고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예수를 만나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후 평양신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1936년 3월 목사안수 후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채용되었으나 학생시절 평양 학생만세사건으로 옥살이 하던 자에게 학생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수업 중 일본 경찰에 끌려가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부임 후 3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1936년 8월에 용강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년여 기간이 지났을 때 당국에서 교회 뜰에 일장기를 계양하고 예배 전에 일본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낭독하도록 강요한 것을 김철훈 목사의 강직한 성격은 즉각 거절하고 그 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2월에 송산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여서 당시 일본 식민정책으로 조선인의 목을 조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가혹한 옥고를 치루고 9개월 만에 출옥했다.

동년 11월 의성교회 시무했던 유재기 목사가 평양신학교 학생시절 배민수, 박학전, 송영길, 김철훈 등 10여명을 상대로 농우회(農友會)를 조직하고 졸업 후에도 이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위장 단체라 하여 일경이 평소 감시하던 김철훈 목사를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내 사정이 악화되어 만주로 가려고 시무하던 송산리교회 까지 사임했다. 1939년 3월 삼성리교회 장로들의 간청에 이끌리어 삼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지나던 중

1942년 3월에 성서조선 잡지 158호의 수필부분에 “조와”를 문제 삼아 폐간시킬 의도로 독자인 김철훈 목사를 그 잡지의 필화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하여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고대하던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되자 1945년 9월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고당 조만식 옛 스승을 보필하게 되여 고당은 김철훈 목사를 밀사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공문을 휴대 월남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 선생을 만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1945년 10월에 800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동평양교회에 부임하였고 총회를 잠정 대행(통일될 때까지)하는 이북5도(16개 노회) 교회연합회 서기를 맡아 연합 사업을 했으나 공산당의 교회탄압은 날로 가중되고 있었다. 1947년 강양욱은 기독교연맹을 조직 가입을 권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동년 11월 3일 주일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기독교인을 앞장세우려 했으나 이북5도 회장 김진수 목사와 김화식, 김길수, 김철훈 목사 등이 반대하자 교회탄압에 광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배출한 산정현교회는 해방 후 온건파와 강경파로 내분되어 1947년도에는 7개월 동안 강단에 공백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계준 장로를 중심으로 산정현교회를 평양노회에 복귀시켰다. 일본의 탄압과 교회분쟁으로 인해 교인은 1000명에서 200여명으로 줄고 교회사정은 몹시 어려웠다.

이때 유계준 장로는 김철훈 목사를 방문 간청함으로 편안한 동평양교회를 뒤로하고 어려운 산정현교회를 택하고 김철훈 목사는 산정현교회를 위해 죽으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메시지로 알고 1948년 2월에 부임해 오직 교회의 부흥과 선교에만 매진하다가 그해 6월 25일 서평양역 근처에서 공산당에 체포당하여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유족으로는 연금봉 사모가 2009년 현재 101세로 건강하며 아들 김기영 목사와 딸 김명희 권사(사위 이금세 장로) 김성희 장로(산정현교회, 유치원장)가 그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