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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이준 목사(감리교)

Joyfule 2009. 6. 19. 04:47

순교자 김이준 목사(감리교)

 

김이준 목사(1912-1945)


김이준은 1912년 8월 1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출생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굶기를 밥먹듯했다. 가난한 그의 부친은 남보다 높은 향학열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이준을 그곳 소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시켰다. 남아이며 최소한도 자기 이름자는 쓸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겨우 소학교를 졸업할 때 죽어도 땅을 파다 죽을 각오를 하고 부친을 따라 남만주지방으로 이민을 갔다.

 

임자 없는 땅을 부지런히 파혜쳐 생활이 낳아지자 부친은 아들 김이준을 용정에 독립투사들이 설립한 중등학교에 보냈다. 고향에서부터 예수를 믿은 그의 가족은 만주에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 하게 되었다. 일제 탄압에 못 견디고 외국까지 밀려 고생하는 동포들을 볼때 가슴이 쑤시는 아픔을 느낀 김이준은 중등교육을 마치는 대로

 "내 동포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리라 ."

결심하고 만주신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제 1회로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된 김이준은 재만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 자체를 항일 독립군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은 애국운동을 하기 위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집결지 용정에 기독교를 그들이 세운 괴뢰정권을 통해 교회를 탄압하였다. 김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한 1941년은 장. 감. 성 교파의 독자성이 무너지고 만주조선기독교도연맹에 통페합되어 있었음으로 교회의 독자적인 신앙행위도 인정을 하려하지 않고 중앙에서 명령하는 처지였다.

 

감리교는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국가의 의례로 받아들였지만 김이준 목사는 달랐다. 신사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완강히 거절하고 교회에서도 신사참배를 죄라고 가르쳤다. 일경은 김이준 목사를 국헌위반자로 체포하여 죽음보다 못한 옥살이를 시켰고 고문과 영양실조 정신적인 압박속에 건강하던 김목사도 견디어내지를 못하고 끝내 쓸어졌다 1945년 8월 1일이었으니 그의 나이 3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