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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화식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6. 21. 00:59

순교자 김화식 목사 (장로교)

 

 

김화식 목사(1894- 1947 연행)    


김화식은 평양의 숙천에서 김찬성 목사의 두 아들중 맞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찬성목사는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으로 슬하에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다. 첫째 아들이 김화식이요 둘째 아들이 김성여 목사였다.

 

1919년 김화식의 나이25세가 되던 해 아버지 김찬성목사는 평안북도 안주군 안주읍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때 3.1운동을 맞아 부자는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시위를 벌리다 아버지 김찬성목사와 함께 부자가 일경에 체포당해 주동자로 2년 6개월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

 김화식은 감옥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옥중에도 전도해 목사가 되게 한 이만 8명이 되었고 그중에 33회 총회장을 지닌 이원영목사가 그 중 한사람이다. 김화식목사의 목회는 경건주의 일변도로 수면하는 만큼 독경을 해야한다고 강조했고 성경연구에도 조예가 깊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빌립보서 강해와 두권의 강도집을 갖기도 했다 .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총회적으로 결의할 때 주기철 이유택 등과 함께 묘향산에가서 기도하고 힘을 합해 저지하려고 했지만 감옥에 끌려갔다. 일제하에 감옥을 안방 드나들듯 하며 고통의 세월속에 해방과 함께 장대현교회로 강단을 옮겼다.

 

 이북교회의 중심인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며 기독교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무실론 이데오로기인 공산당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평양의 염혈 목사들과 기독청년들을 규합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김화식목사가 결성한 기독교자유당은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남북통일 문제가 협의되고 난 후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여론화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정 때문에 고한규장로를 당수로 추대하여 1947년 11월 19일 결당 날짜를 정했는데 하루 전 11월 18일 내부고발로 창당도 못하고 40여명 전원이 연행되어 중형선고를 받았고 김목사도 13년 형을 선고받고 이들은 시베리아 아오지 탄광에 강제노동에 처해지고 김목사를 위시한 몇 목사들은 총살형에 처해져 기독교의 인맥을 끊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