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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민 케인 · Citizen Kane

Joyfule 2013. 1. 11. 04:43

 

 

시민 케인 · Citizen Kane · 1 & 2 & 3

 




 

  ㆍ영화사에 획을 그은 작품

      역사상 최고의 영화는 무엇일까.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권위 있는 리스트들 중 상당수가 오선 웰스가 주연·감독한
      1941년작 <시민 케인> (Citizen Kane, Charles Foster)을 1위에 놓는다.

<시민 케인>은 한 기자의 시점에서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의 삶
을 재
구성하는 형식으로 됐다. 케인은 ‘로즈버드(Rose Bud)’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둔다. 가난하지만 순진무구한 아이였던 케인은 예기치 못한 유산을 상속받는다. 야심만만한 청년으로 자라난 케인은 신문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뒤 성공을 거두지만 결혼생활에는 실패한다. 정계에도 입문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케인은 자신의 대저택에 틀어박혀 쓸쓸히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뜬다. 기자는 ‘로즈버드’의 의미를 끝내 알아내지 못하지만, 관객은 어린 시절 케인이 즐겨 타던 썰매 이름이 로즈버드란 사실을 마지막 장면에서 본다.

영화는 당대의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의 삶
에 기반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허스트는 <시민 케인>의 개봉을 막기 위해 압력을 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자신이 소유한 수십개 언론사에서 이 영화를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인지 <시민 케인>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오선 웰스(Orson Welles)는 이후 다시는
<시민 케인> 같이 많은 예산을 들인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시민 케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영화사에 혁신적인 작품이다.
이전까지 영화는 화면의 특정 부분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시민 케인>은
화면의 전경, 중경, 후경을 모두 명확히 보여주는 ‘딥 포커스’를 실현했다. 딥 포커스 덕에 영화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는 ‘텍스트’가 됐다. 또한
<시민 케인>은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 음악·음향 사용 등의 면에서 모두 과거의 영화와 단절하는 창의성을 보여줬다.

오선 웰스가 데뷔작 <시민 케인>을 내놓았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이 조숙한 천재는 <시민 케인> 이전에도 ‘사고’를 친 적이 있다. 한때
라디오 드라마 연출가로 일했던 오선 웰스는 HG 웰스의 <우주 전쟁>을 연출했다. 라디오 버전 <우주 전쟁>이 워낙 실감나게 꾸며진 나머지, 청취자들은 실제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한 줄 알고 놀라 거리로 뛰쳐나오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1년 오선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  ㅣ경향신문 · 백승찬기자ㅣ



ㆍ언론재벌의 성장과 몰락, 그 허망함

▲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 (미국, 1941년) - 김석 기자의 영화읽기 -

위대한 <시민케인> (Citizen Kane , 1941).
6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빛을 발한다.
신문 재벌 윌리암 허스트의 일생을 그린,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내용과 연기 뿐 아니라 촬영과 조명, 구성 등 기술적인 면에서 아직도 따라
갈 만한 영화가 없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영화狂 ‘오손 웰스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작이다.


1940년 ‘뉴욕 인콰이어러’誌를 비롯, 수 많은 신문들의 발행인이었던 찰스 포스터 케인(Charles Foster Kane: 오슨 웰즈 분)이 죽는다. 그는 당시 70세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죽음 직전에는 쿠빌라이 칸의 궁전 이름을 딴, 플로리다의 대저택 '재나두(Xanadu)'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정치인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고, 미국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 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여러 얘기들에 대해 그는 “ 나는 현재
미국인이고, 과거에도 미국인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미국인일 것이다.”
(“I am, have been, and will be only one thing - an American.”
- Charles Foster Kane) 라는 말로 일축하곤 했다.

잡지 편집장인 록스톤은 그의 죽음 내면의 것을 취재하고자 기자인 톰슨
(Jerry Thompson: 윌리암 알랜드 분)에게 케인이 죽기 전에 말했다는 '장미꽃 봉오리(로즈버드,Rose Bud)'가 무슨 뜻인지 알아오라고 한다. 톰슨은 케인의 주변 인물을 샅샅이 취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한다.


‘찰스 포스터 케인’ 은 1860년대 중반 콜로라도 뉴 살렘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부(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하숙비 대신 받은 문서 한 조각으로, 쓸모없는 광산에서 노다지가 쏟아져, 그의 운명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고, 평범한 시골아이는 주체할 수 없는 부를 가지게 되고, 케인 가족은 풍요함을 누리게 된다. 케인은 25살이 되었을 때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뉴욕 인콰이어러’誌를 인수한다. 처음 신문 발행한 날,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해나가겠다는 케인의 야심찬 선언이 실리고, 폭로 기사들로 인콰이어러지는 발행부수가 급격히 늘어나는데...

1900년 케인은 대통령의 질녀인 에밀리 노튼(Emily Norton: 루스 워릭 분)과
결혼하고 아들 찰스 쥬니어가 태어난다. 그러나 그는 미모의 여가수 수잔 알렉산더(Susan Alexander: 도로시 코밍고어 분)와 사랑에 빠진다. 선거에 나선 케인은 그러나 그의 부정한 애정 행각이 발각돼 낙선한다. 그후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1918년에는 에밀리와 그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케인은 수잔과 결혼하고 그녀를 가수로 데뷰시키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케인은 그녀에게 계속 노래를 부르라고 종용하지만 그녀의 자살 소동으로 그만 둔다. 1929년에는 그의 신문사 중 가장 중요한 신문사가 문을 닫는다. 1932년 수잔도 그를 떠나고 그는 극도로 난폭해진다. 더 이상
누구도 케인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 그는 결국 홀로 숨을 거둔다.

이상의 기사 작성 과정에서 톰슨은 끝까지 ‘장미 꽃봉오리’가 무슨 뜻
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단지 그는 같은 인간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케인 때문에 슬픔만을 느낄 뿐이었다. 이제 쓸모없게 된 케인의 물건들이 불 속에
던져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케인이 어린 시절 즐겨 타던 썰매였다.
그 썰매에는 ‘장미 꽃봉오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그 썰매의 이름이 ‘장미꽃 봉오리 (rose bud)’였던 것이다.

케인은 부족함이 없는, 부(富)를 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이용했고, 마침내는 성역도 터부도 없는 발행인이 됐다. 하지만
그 안의 무언가가 그의 신념을 바르게 기능하는 걸 방해했다. 그는 변질했고, 남은 것은, 아집과 자존심 뿐이었다. 커다란 성안에서 붕괴된 그의 영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되뇌인 것은 ‘로즈버드’ 다른 운명이 껴지기 전,
백지 같았던 그 썰매 위의 삶.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 자신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신이 운명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리기 전, 장미봉오리 문양이 박힌 썰매를 타던 그 고향처럼 눈발이 휘날리는 유리구슬이다. 도시로 떠나온 어린 시절의 케인이 선물들이 한껏 놓인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조차 놓지 않고 부둥켜안은 썰매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이 같은 결말을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패기와 재능으로 모든이의 주목을 받으며 헐리우드에 등장한
오슨 웰즈(Orson Welles)만큼이나 빛나는 청춘을 가졌던 케인(young Kane).
<시민케인> 이란 첫 작품에 묻혀, 완료되지 못한 자신의 야망을 안타까워
하면서 오슨 웰즈는 이 사나이, 케인를 외면하고 싶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이 둘(오슨 웰즈 & 케인)은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다.

끝내 출구를 못찾고 비틀거리다 쓰러진 마지막 순간,
케인이 죽으면서 중얼거렸던 장미꽃봉오리는 시들어 져버리기 전,
자신이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 세계에의 열쇠였다.

   ▲ '시민케인' 포스터    



ㆍ언론재벌의 성장과 몰락, 그 허망함

젊은 신문재벌 케인은 어느 날 불쑥 자기 신문 1면에
'원칙 선언문(Declaration of Principles)'을 싣겠다고 한다. 그러자 케인의 심복이 묻는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선 안 됩니다." 케인의 대답은 단호하다.
"지킬 거야." 원칙 선언문의 내용은 이렇다. "본인은 시민 여러분께 정직한
기사만을 담은 신문을 공급하겠습니다. 또한 본인은…."

어느 날 케인은 49만 5000부를 발행하는 뉴욕 최고의 신문 <크로니클>의
사옥 앞으로 경영진을 데려간다. "여러분을 이곳에 모셔온 이유가 있소.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 줄 테니까. <크로니클>의 좋은 아이디어를 알게 되는 거지." 6년 뒤, 케인은 무려 20년에 걸쳐 꾸려진 <크로니클>의 임원진을 모조리 스카우트해 버린다.

유럽여행에서 막 돌아온 케인은 황급히 자기 신문의 사회면 편집자를 찾아 쪽지 하나를 건넨다. "저… 사회적으로 발표할 게 있는데… 이걸 다르게 편집하지 말아주길 바래요. " 그리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잠시 후 쪽지 내용을 본 사회면 편집자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케인과 대통령의 조카 에밀리 먼로 노튼의 약혼 선언문이었다.

케인의 두 번째 아내인 재능 없는 가수 수전 알렉산더의 첫 오페라 공연에
대한 평론을 케인의 동료 릴랜드가 맡는다. "수전 알렉산더는 예쁘지만 형편없는 아마추어다…"로 시작되는 악평 일색의 기사를 손수 마무리한 케인은 릴랜드를 해고해버린다. 얼마 후, 릴랜드로부터 편지가 온다. 안에는 케인이 발표한 '원칙 선언문' 원본이 들어있었다.



NO TRESPASSING (출입금지)

Obituary : XANADU'S LANDLORD - News On The March -

“In Xanadu did Kubla Khan a stately pleasure dome decree - -”

전설적인 제나두...는 쿠빌라 칸이 포고한 웅장한 쾌락의 궁전이다.
최근엔 플로리다의 제나두는 가히 전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개인소유의 저택인 것입니다. 걸프만에 사막의 산에 성공적으로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제나두의 산에는 10만 그루의 나무와 20만 톤의 대리석이 쓰여졌습니다.
거기다 제나두의 다른 궁전에는 철, 그림, 조각, 온갖 보석... 모든 수집품은 실로 엄청나 분류하거나 기록할 수조차 없으며 박물관 10개를 채울만합니다. 파라오의 왕들처럼 제나두의 주인은 그의 무덤에 많은 보석들을 남겼습니다. 피라미드 이후 가장 값진 유적을 자신을 위해 건설한 것입니다.

In Xanadu last week was held 1941's biggest strangest funeral.
지난주 여기 제나두에선 제나두의 주인이 휴식의 잠이 들었다. 우리 시대를 살다간 미국의 쿠빌라 칸이신 찰스 포스터 케인의 장례식인 것입니다.

To forty-four million U.S. news buyers, more newsworthy than the names in his own headlines, was Kane himself, greatest newspaper tycoon of this or any other generation.
쓰러질 듯한 건물에서 초라하게 시작하여 케인의 왕국은 영광 속에서 37개가 넘는 신문사와 두개의 기업연합, 하나의 라디오 방송국을 석권하여 확고한
왕국을 건설한 것립니다. 잡화점에서 시작하여 제지업, 아파트건물, 공장,
목재업과 해양업까지 이 왕국은 장장 50년간 끝없는 성장을 거듭하여 지상에서 31번째로 가치 있는 금광이 되었고 미국의 전설적인 케인의 부의 원천이 되었다.

1868년 당시 하숙집 주인 메리 케인(Mrs. Kane's Boarding House)은 하숙비를 못낸 하숙인에게서 버려진 광산의 가치없는 증서를 어떻게 양도 받았을까? 콜로라도 광산을... 57년 후 의회 조사위원회 직전에 월스트리트의 거물인 월터 P. 대처는 여러해 동안 "신탁"에 관해 케인의 신문이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그는 젊은 시절에 했던 여행을 회상했다.
우리 회사는 케인의 부인으로부터 신탁자로서 선임되엇습니다. 그 당시
그녀가 얻은 재산의 신탁자로 그 소년, 찰스 포스터 케인을 맡아 달라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었습니다.

1895 to 1941 : All of these years he covered, many of these he was.
1898 - 케인은 한(스페인, 미국) 전쟁에 미국의 참전을 강력히 권했고,
1919 - 다른 전쟁(1차 세계대전)의 참가는 반대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수백만 미국인을 위한 대변을 했으나 증오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40년 동안 케인의 신문이 일정한 관점에서 다루지 않은 미국의 참전을 강력히 권했고, 케인이 지지 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공인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지지하다가도 그 다음에는 비난하곤 했다.

Few private lives were more public.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대통령의 질녀인 첫 번째 부인 에밀리 노턴은 1916년, 그와 헤어진다. 그 후 1918년 그의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결혼 후 16년 만의 일이었고, 그 일후, 2주일 만에 첫 번째 이혼을 하고, 수잔 알렉산더와 결혼을 한다. 가수였던 그녀와 뉴저지 트랜톤의 시청에서 결혼을 한다. 한때, 오페라 가수였던 수잔 알렉산더에게 케인은 시카고의 시립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준다. 거금 3백만불을 들인 수잔 알렉산더 케인을 위한 건물은 절반도 완성되기 전 이혼을 한다.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제나두...
비용은 실로 엄청나다.

In politics - always a bridesmaid, never a bride.
케인은 야망의 틀을 짜왔으나 유권자들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한번도
당선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문은 더욱 강하게 작용했고, 그의 노력의 대가는 한때 그의 것인 것처럼 보였다. 1916년 주지사 후보로서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그에게 있어서 주지사야말로 백악관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는 정치적 경력이었고... 갑자기 선거일 일주일도 못 남기고 좌절되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게도 20년 동안이나 닦아온 정치적 야망은 영원히
케인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1929. 그리고 대공황이 시작된 첫해에 케인의 신문사 하나가 문을 닫았다.
케인은 4년에 걸쳐 11개의 신문사가 합병되거나 팔리거나 해체되었다.

But America Still Reads Kane Newspapers and Kane Himself Was Always News.
1935. 케인은 세상의 개혁에 기여하였으나 그의 세상은 역사 속에 묻혔다.
위대한 언론인은 역사 속에 힘을 잃고, 묻혀버린 것이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듯한 그의 쾌락의 궁전은 붕괴되고 사진기자조차 찾지않은 쓸쓸한 여생이
시작된다. 신문의 황제는 그의 궁전과 함께 계속 몰락되었다. 그는 예전처럼 미국의 운명에서의 자신에게 믿음과 귀를 기울여줄 사람을 찾아 다녔으나 헛된 시도였다. 드디어 지난주에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만 할 죽음이 찰스 포스터 케인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The End News. -



언론재벌 허스트, 협박과 회유 통해 영화 개봉 막아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863~1951)  
이것이 찰스 포스터 케인, 아니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의 면면이다. 이런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까발리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허스트가 가만히 있었을 리 있겠는가.
허스트 진영은 개봉 전에 필름을 파기하지 않으면 사생활과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에다 개봉을 하지 않는 대가로 제작비 전액을 보상해주겠다는 회유까지 갖가지 압력을 가했지만, 끝내 영화 개봉을 막지 못했다.

웰즈가 주장한 '표현의 자유' 앞에서는 제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언론재벌 허스트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스트는 한때 신문사 37곳, 잡지사 13곳, 통신사 2곳을 포함해 라디오 방송국과 영화사까지 광대한 언론제국을 품안에 거느렸던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어느 날 불쑥 '원칙 선언문'을 1면에 싣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만큼 대중적 감각을 지닌 '타고난 신문인'이었지만, 이 시대 언론의 가장 큰 고질병인 신문의 체인화와 독점화의 '원조'이기도 했다. 예컨대, 경쟁지의 유능한 임원들을 대거 스카우트한 데 대한 세간의 비난에 허스트는 이렇게 응수했다.

"다 그냥 빼앗아버리면 됐지 규칙이 어디 있어? 다들 그렇게 하잖아."
허스트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신문을 사유물로 만들었고, 편집권
독립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을 뿐 아니라 경쟁사의 유능한 직원들을 닥치는 대로 빼오는 일도 서슴지 않은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신문 사주의 전횡은 지금도 '현재진행형'

영화는 이 야심만만한 자본가가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예리하게 추적한다. 그리하여 쿠빌라이 칸의 궁전 이름을 딴 대저택 '재너두(Xanadu)'에서 '로즈버드(Rosebud)'라는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쓸쓸하게 운명한 케인(허스트)의 삶의 궤적이 그려내는 미국 자본주의 성장사는 케인이 건설한 부와 사치의 바벨탑 '재너두' 만큼이나 허망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시민케인 (Citizen Kane 1941년 미국)

감독 =오슨 웰슨 (Orson Wellses)
주연 =오슨 웰슨. 조셉 코튼. 루스 워릭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한 어느 한 시민의 삶.
한 시민, 케인의 인생역정을 추적하는 영화다.

권력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듯도 싶다.
어린시절 가난 때문에 입양하게 된 소년 케인, 어른이 된다.
지방 일간지 '인콰이어지'를 운영하면서 일약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
'사실만을 보도할 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문구를 발행인의 맹세로 신문 1면 TOP으로 낸다. 청년 케인의 대단한 포부, 그러나 케인이 장년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이런 맹세들은 사그라 든다. 권력욕에 의한 결혼(시민 케인이
정치적 야망으로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는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성악가)와의 만남. 케인은 이른바 두 집 살림을 한다. 자기 자신의 야망에 도움을 주는 진짜 부인과 우연한 만남으로 사랑이 된 여인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부분은 그리 중요하게 처리 되지 않는다. 선거 하루전에 케인의 두 집 살림은 만인에게 드러나고(언론에 공개된다) 케인은 실패의 길로 접어든다. 이혼과 재혼(성악가와)은 이어진다.
성악가 부인을 위해 오페라 하우스를 짓는다.
부인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케인 자신을 위해 지었을 지도 모른다라는 것을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유추해 낸다. 그녀의 노래 솜씨는 형편없었다. 그러니까, 케인의 고집에 의해 부인이 오페라의 주인공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몰라요"

케인은 어느 날 죽고, 그가 일생동안 모았던 유물들은 화면 가득 영상에
가득찬다. 그리고 허망한 인생처럼 유물들은 활활 불길 속에서 없어진다.
케인의 끝없는 자기 사랑 혹은 자기 욕심. 어쩌면 우리 자신도 케인의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부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몰라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싶다.
이 영화는 '영화는 이런 것이다'라고 관객에게 말해 주듯이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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