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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도둑 맞은 가난

Joyfule 2023. 5. 11. 00:44


[신동욱 앵커의 시선] 도둑 맞은 가난


입력2023.05.09. 오후 9:52 수정2023.05.09. 오후 9:56

고아가 된 봉제공장 여공이 도금공장 공원을 기댈 곳으로 삼아 단칸방 동거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시켜서 가난 체험에 나선 부잣집 대학생 이었습니다.

"덕택에 진귀한 경험을 했다"며 돈을 내미는 그를 내쫓고 여공이 낙담합니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박완서 소설 '도둑맞은 가난'은 이제, 가난이 상품이 되고 마케팅 수단이 되는 지경까지 진화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임명하면서 그의 낡은 가방을 살펴봅니다.

늘 들고 다니면서 청렴의 상징처럼 부각됐던 가방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택정책을 기획 총괄하는 청와대 정책실장 시절,

자신이 소유한 청담동 아파트 전셋값을 14퍼센트나 올렸습니다.

임대차법이 시행되면서 전세값 인상이 5퍼센트로 묶이기 바로 이틀 전이었지요.
법을 어긴 건 아니지만 문 대통령은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그를 경질했습니다.

위선, 파렴치, 내로남불 같은 단어를 떠올렸던 게 아닐까요.

그해 말 김남국 민주당 의원은 "민주당도 이제 고급 명품 가방 들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속된 말로 위선 떨지 말라는 얘기였습니다.


"집은 막 30억, 40억 아파트에 사는데 가방은 다 낡은 가방 들고 다니고…

이젠 그런 콘셉트 버려야 합니다"
그랬던 김 의원이 수십억 원대의 가상화폐를 지녔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가 내세웠던 가난한 청년 이미지들이 소환됐습니다.

앞부리에 구멍이 난 3만7천원짜리 운동화를 신는다,

"매일 라면만 먹는다", "모텔 방 하나에서 보좌진과 셋이서 잤다"고 했습니다.

그 덕인지 정치 후원금을 가장 많이 걷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후원을 해주신다면 정말 더 큰 좋은 정치로 보답하겠습니다.

(한푼 줍쇼 하세요) 한푼 줍쇼"

금융당국의 조사에 이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대뜸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덮으려는 아주 얄팍한 술수"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거액을 투자한 가상화폐에 세금을 미루는 법안을 발의한 걸 두고

이해 충돌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곧바로 얼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법적으론 괜찮을지 몰라도 보통사람 눈에는 명백한 이해충돌이지요.

이게 이해충돌이 아니라면 대체 뭘 이해충돌이라고 하는 겁니까?

민주당이 애용하는 '법꾸라지'는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비판에 해명이 나오고 또 그 해명을 둘러싼 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주식 판 돈으로 코인을 샀다는데, 늘어난 예금은 하늘에서 떨어진 건가요?

전세보증금은 또 어디서 났을까요.

도무지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던지 오늘에 이르러서야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처신이었다"며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정도 사과로 넘어갈 단계가 지났습니다.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점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당당하다면 스스로 조사를 청하는 게 맞습니다.

그것이 국민들의 눈높이 일겁니다.
아니면 어떡할거나고요? 아니면 더없이 다행한 일이지요.

이건 법을 따질 문제이기 앞서, 인간의 문제입니다. 

개혁파를 자처하는 젊은 초선 정치인의 '인간 파산'을 보고 싶어 하는 국민이 누가 있겠습니까?

5월 9일 앵커의 시선은 '도둑 맞은 가난' 이었습니다.
신동욱 기자(tjmicm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