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위인 - 크게 쓰인 작은 그릇, 무디
"이 세상의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일은
평범한 재능을 지닌 남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아주 적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있고, 세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있다.
나에게는 반 달란트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일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며,
그의 은사는 2배, 3배로 증가될 것이다."
저는 여러분에게 제 남편 드와이트 라이맨 무디(Dwight Lyman Mooddy)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가 남긴 이러한 말↑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그의 생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873년에서 1875년까지 영국에서, 1875년에서 1879년까지 미국에서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부흥의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고,
그 후에도 영국을 재방문하고 미국의 중소도시들을 휩쓴 복음사역에 사용된
제 남편 무디의 이름과 명성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도 익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제 남편 무디로 말미암은 부흥보다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사역에 임하여
주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사용됐는지 말하려고 합니다.
‘열매’보다 바로 그 ‘나무’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제 남편 무디는 1837년 메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청교도의 신앙을 이어받은 어머니와 석공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일곱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그가 네 살 때 파산한 채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이고 따뜻한 사랑 가운데 자랐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상태에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다섯 살 때 세례도 받았고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1855년 보스톤에 있는 삼촌의 구두 가게에서 일하던 때까지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요한복음을 창세기에서 찾을 만큼 성경에 무지했던 그에게
그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 관심을 가져 주었고,
어느 날 구두 가게로 찾아와서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던 것입니다.
"보스톤의 가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날,
모든 만물이 내게는 새롭게 보였고,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소.
그날 이후 나는 결코 그분을 잊어 본 적이 없다오."
▶사업가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제 남편은
그 후 서부를 향해 시카고로 옮겨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위한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맨 처음 했던 일들은 교회예배와 주일학교, 집회에 사람들을 모아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호텔, 하숙집 때로는 술집이나 도시 북쪽에 위치했던
빈궁한 수백 가구들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러한 작은 일들을 열심히 찾아서 했던 것은
자신이 스스로 그들을 가르칠 수는 없어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나는 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 없었소.
또 어느 누구도 나에게 어떤 일을 해보라고 제안하지도 않았소.
하지만 나는 그분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소."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졌던 한 가지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열심히 모으는 일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 생각했던 제 남편은
1858년 빈 술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 남편은 계속해서 제화업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직도 사업가로서 성공하고자 했던 제 남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카고에 처음 갔을 때 교회에서 네 개의 의자를 빌려 사람들을 데려와 앉게 했을 때도,
나는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해 주지 않았소.
그것은 장로님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소.
그 후 주일학교에 관계된 일을 하면서도 나는 숫자를 채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학생들이 천오백 명쯤 되었을 때는 의기양양하기도 했소.
그러나 난 그들 중 단 한 명도 그리스도께로 직접 인도하지는 못하고 있었소.
내가 운영하던 주일학교에 가장 질이 나쁜 여학생들로 이루어진 한 학급이 있었는데,
그 반의 담임교사가 병이 나서 내가 그들을 맡게 되었소.
그들은 나의 면전에서 나를 비웃었고, 나는 그들을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소.
그런데 그 주간에 그 교사가 나의 가게로 찾아왔소.
그는 자신은 폐출혈 증세로 이 도시를 떠나야만 하는데,
자기 반 아이들 중 어느 한 사람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본 적이 없다고 무척 마음 아파했소.
나는 그토록 절실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소.
나는 그 선생에게 반 학생들을 만나서 현재의 심정을 이야기해보도록 제안했고
함께 동행하기로 했었소.
그 선생님과 함께 한 소녀의 집을 찾아갔소. 그 소녀의 이름을 불러서
그 소녀를 앞에 놓고 그녀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을 때,
그 소녀의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비웃음은 찾아볼 수가 없었소.
그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소.
그 선생님이 생명의 길을 설명해 준 후 같이 기도하자고 제안하면서
나에게 기도를 부탁했소. 나는 이전까지 한 사람을 즉시로 회심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본 일이 전혀 없었지만, 우리는 함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소.
이런 일을 그의 힘이 다할 때까지 열흘 동안이나 계속했소.
그리고 열흘 후 그 반의 모든 학생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소."
▶이 일을 계기로 제 남편은 사업가의 길로 전진하느냐,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냐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영적인 축복을 맛본 제 남편은
사업가로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이나 돈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졌던 것입니다.
"내가 그때 받은 축복을 잃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소."
사업을 그만두기 전 8개월 동안 오천 달러를 벌던 그는
그리스도께 헌신한 첫해에 300달러도 받지 못했고,
치즈와 크래커로 연명하며, YMCA 강당에 있는 벤치와 의자에서 잠을 자여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생각되는 그 사역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주일학교는 부흥되었고
그 부흥에 의해 1864년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의 노력과 열정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고,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제 남편의 설교를 들은 한 청중이 남편의 문법실력을 지적하면서
공중 앞에서 설교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이 실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받은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문법 실력을 갖추신 당신은 과연 그 실력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 말은 제 남편에게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역에 쓰셨던 것입니다.
▶설교와 사역에 있어서 제 남편에게 깨달음과 큰 도전을 준 것 중 한 경우는
무어하우스라는 젊은 설교자였습니다. 제 남편은 처음 영국에서 그를 만났을 때
어린 무어하우스가 설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강제적인 무어하우스의 방문으로
우리는 그에게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어하우스는 요한복음 3:16을 들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훑으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말씀으로만 증명해 내었습니다.
그는 칠일 내내 이제는 다른 본문을 택하리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매일 밤 무너뜨리며,
계속 요한복음 3:16을 들고 설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양날 선 칼을 가지고
죄인의 배후에서 그의 마음을 쪼개려 한다고 설교하곤 했었소.
그런데 그때 바로 내가 그 사실을 체험한 것이오. 뿐만 아니라
그가 똑같은 본문으로부터 칠일 동안 놀라운 설교를 해내는 것은
나에게는 큰 놀라움이었소."
무어하우스의 설교는 제 남편에게는 말씀의 무한성을 깨닫고
더욱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흥의 큰 물결이 시작되던 1873년까지
제 남편 무디는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제 그는 설교자로서 많은 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안목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한 예가 바로 생키와의 연합 사역일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사람들의 찬반이 분분했지만
그는 생키의 찬양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했고,
실제로 제 남편이 설교하기 전에도 생키의 찬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연합 사역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부흥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제 남편을 인도했던 킴볼도, 사람들을 함께 모으던 스틸슨이나
또한 그 누구도 제 남편이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놀라운 일을 해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제 남편은 부적합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남편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자신을 드리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점차 더 큰 일로 그를 부르셨고 그 일에 쓰일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공급하심으로써
그를 부흥의 도구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진지한 열정이 있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신실하게 지속적으로 해나간다면,
어떤 환경이나 어떤 나약함도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여러분을 생애를 통해 그분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큰일을 이루시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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