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좌(座) - 김우현
자정이 넘은 집안은 고요하다. 아내는 엷은 땀기가 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잠들어 있고, 나는 그 곁에 깔린 요바닥에 배를 붙인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가민히 들여다본다. 가슴께까지 덮인 엷은 이불이 주기적으로 가늘게 떨고 있다.
그 새 잔주름이 꽤 늘었다. 순하디 순하고, 조금은 심약하고 그리고 어디에 내어 놓아도 금시에 몽고족 후예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얼굴. 이 얼굴이 나와 함께 있은지가 어언 20년이 되었다.
나의 청년기를 쭈욱 지켜보며 살아온 한 친구가 당시의 나를 회상하면서 꼭 야생마 같았다고 한 적이 있다. 괴팍하고 고집세고 곧잘 우쭐대고 하던 나를 지금에 와서 내가 돌이켜보아도 좀 무안하다. 남편감으로서는 분명히 하품이었다.그런 나와 함께 20년을 탈없이 걸어왔으니 참으로 용하다.
돈은 없고 벗은 찾아왔고, 그럴 때 부엌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아내에게 나는 어느 유족한 선비인 양 예사롭게 술상 보아오라 일렀었고, 아내는 행주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어깻죽지가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집 모퉁이를 돌아 동리의 구멍가게로 가는 것이었다. 미처 못다 갚은 외상값이 그대로 있는데 혀 굽은 소리를 거듭하고 소주병과 명태마리를 얻어 와서 상을 보아 올리던 아내.
나와 벗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에 취해갔지만 아내는 설움을 달래며 부엌에 선채로 있었다. 결혼반지를 팔아 시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치루던 날 아내는 에써 쓸쓸히 웃었다. 저 어질디 어진 얼굴의 어느 구석에 그토록 질긴 인내력과 강인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었음인지 암만 생각해 보아도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여인들이 겪는 아픔의 그 절반 만큼이라도 잘 참고 견디어 낼 남정네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밖으로 약하면서 안으로 강인한 존재, 오직 인고로 얼룩진 하고한 나날을 묵묵히 감내하며 남편과 자식들을 순결한 사랑으로 고이 감싸며 있는 그 엄청난 저력이 놀랍다. 세상의 남정네들이 철없는 이기(利己)로 그들의 생을 점철할 때, 이것을 오히려 미소로 품어주는 한량없는 모성.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이 아니라도 여기 잠들어 있는 저 심약한 여인이 나와 내 아들 딸의 그 많은 응석을, 그것도 20년을 하루같이 받아 주며 지순한 사랑으로 대해 왔으니 참으로 조화라 아니할 수 없다. 간혹 여권을 운위하는 거리의 여인을 본다. 우습다. 내 아내는 여권을 말하지 않지만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거의 절대적 존재가 되어 있다.
밤이 깊었다. 사방이 고요하다. 나는 홀로 깨어 있어도 외롭지가 않다.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로와 세로 - 徐相祿 (0) | 2012.11.15 |
---|---|
재미있는 이야기와 답답해서 - 윤모촌 (0) | 2012.11.14 |
면학의 서 - 양주동 (0) | 2012.11.12 |
아내가 변했다. - 임재문 (0) | 2012.11.10 |
다시 그려보는 내 얼굴 - 윤모촌 (0) | 2012.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