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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브네(Yabneh), 얌니야(Jamnia),

Joyfule 2015. 9. 21. 08:18

 

텔 야브네 정상부                 (출처- http://blog.naver.com/paul3377/173178190)

 

야브네(Yabneh), 얌니야(Jamnia), 얌니야 공의회(the Council of Jamnia) 

1. 야브네는 히브리어로 '신의 전당'이라는 뜻이다.

2. 텔아비브-야포 남쪽 26km, 지중해에서 동쪽 8km, 예루살렘 서쪽 65km, 해안 평야지역(블레셋 평야)에 위치한다. 

3. 이곳은 국제해안도로인 '해변길(Via Maris)'이 지나가고 있으므로 군사적, 지정학적, 적략적 요충지 였다. 

4. BC 8세기에 웃시야가 블레셋으로부터 야브네성을 헐고 차지하였다(대하26:6). 

4. BC 122년, 요한 힐카누스가 야브네를 점령하면서 하스모니안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마카비 상 4:15; 5:55-62; 마카비 하 12:3-9).  

5.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얌니아'라는 도시가 세워졌다. 

6. AD 70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고,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야브네에 세운 야브네 학당(Beitei Midrash, 현재의 예쉬바)이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7. 야브네를 빼놓고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를 말하기 어렵다. 

8. 성전이 파괴된 후 더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율법을 더욱 더 철저히 지키게 되었다(성전에서 율법으로).

9. 라반 가말리엘의 지도 아래의 야브네는 성전이 존재했던 때에 산헤드린이 행하던 모든 기능을 회복하였다. 

10. AD 90년, 야브네 공의회에서 계속 의문이 제기되었던 전도서, 아가서의 정경성을 인정함으로써 구역 정경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에 레이만, 레위스, 백위드 등의 학자들의 거센 반론이 제기 되었다. 그러므로 성서학계에서는 여전히 온란의 쟁점으로 남아 있다.   

11. AD 200년, 랍비 유다 하나시(AD 135-219)는 티베리아에서 미쉬나를 편집하였으나 실제 산실은 야브네 공동체 이었다.

12. AD 12세기, 십자군 시대에는 '이벨린'이라고 불려졌고 요새가 세워졌다.

13. 요하난 벤 자카이- 그는 예루살렘 성이 로마 군에게 포위 당했을 때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허위로 퍼뜨렸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인 요슈아 벤 하나니아와 엘리아자르 벤 힐카누스 등이 관에 그의 시체를 넣고 성 밖으로 나왔다. 관에서 나온 요하난 벤 자카이는 "야브네를 (파괴시키지 말고) 남겨 달라"고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요청하였다(탈무드 Gittin 56a-b). 대신 자기가 로마 군대를 위해서 성문을 열어 주겠다고 약속 하였다. 그리고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약속이 받아들어졌고 다음 날 성과 성전은 불탔다. 반면에 야브네와 유대교 학당 만큼은 보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텔 야브네의 유적                 (출처- http://blog.naver.com/paul3377/173178190)

 

12세기 십자군 시대의 타워                (출처- http://blog.naver.com/paul3377/173178190)

 

텔 야브네의 동쪽 해안 평야 지대               (출처- http://blog.naver.com/paul3377/173178190)

 

텔 야브네에서 바라 본 기차와 동쪽의 중앙 산악지역     (출처- http://blog.naver.com/paul3377/173178190)

 

텔 야브네의 북쪽에 위치한 현대 야브네                (출처- http://blog.naver.com/paul3377/173178190)

 

텔 야브네 길건너 북쪽에 위치한 유대교 회당        (출처- http://blog.naver.com/paul3377/173178190)

 

<얌니야 회의에 대한 새로운 연구>          (출처- http://cafe.daum.net/Eliyahu/8IRE/156?)

 

1. 1세기 말~2세기 초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적 배경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 살아남은 유대 민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로서 알려진 유대 기독교 공동체 일부는 주님의 동생(사촌) 시므온의 영도로 요르단 강 동쪽의 펠라라는 곳으로 옮겨갔고 이후 에비온파 공동체로 전환되었다. 바리사이파 주요 세력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영도로 서쪽으로 이주하여 지중해 연안 얌니야(현재는 텔-야브네라고 불림)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그 외 세력들.. 사두카이파나 에세네파, 열심당은 예루살렘 파괴와 그 이후에 이어진 마사다 항전에서 무자비한 로마 군대의 토벌에 의해서 소수만 살아남고 사실상 진멸되었다. 그리고 얌니야 지역에 정착한 바리사이 계열 유대 랍비들은 민족성과 종교의 생존을 위해서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1) 민족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규제를 강화하였다.

2) (제사장 계급이 진멸하였으므로) 유대교 예배의 중심을 제사 의식에서 기도로 이동시켰고, 기도문을 공식화하였다.

3) 제사의 성실한 참여보다도 자비와 희생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2. 얌니야 회의 가설을 둘러싼 논란

 

이 시기에 바리사이파 유대 랍비들이 유대 민족 내부의 타 당파 배척을 통한 주도권 획득을 위해서, 특히 나자렛파라고 불리던 기독교 세력을 이단으로 몰아서 배척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상당 기간 동안 학자들에 의해서 널리 인정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주장 중의 하나는 19세기 후반 유대인 학자 하인리히 그래츠에 의해서 제기된 이른바 '얌니야 회의' 가설이었고, 이 가설을 당시에 명성이 높던 기독교 진영의 구약학자인 프란츠 불과 에드워드 라일이 적극 지지함으로서 그 후 약 60년 동안 이론의 제기조차 없는 학계의 정설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천주교 진영에서는 얌니야 회의 가설에 힘입어 외경 논쟁에 있어서 그동안의 학술적인 열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얌니야 회의 가설에서 나온 유대교의 타나크의 목록 결정과, 70인 역을 저주하면서 그니자로 만들어 폐기한 것은 유대교에서 기독교의 배척을 의도한 일련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교의 성경 목록을 적극 수용한 개신교 측에 대하여 본격적인 반격의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 측의 반격에 대처하여 개신교와 유대교 측에서는 얌니야 회의 가설 자체의 신빙성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얌니야 회의의 실존성을 의문시(아우네)하거나, 타나임 전기 시대의 얌니야 공동체에서 기독교가 배척되었다는 명백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유대교의 타나크 목록 확정은 기독교의 배척 의도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고 1960년대에 들어서야 레위스로부터 반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련의 학술적인 연구를 통해서 기존의 얌니야 회의 가설로 인해 통념적으로 인정되어 왔던 가르침.. 1세기 말에 있었다는 소위 얌니야 회의에서 성경 목록 확정 작업을 통해서 유대교 내부에서 70인역을 사용하는 기독교 세력에 대한 축출을 의도했다는 종전의 가설은 신뢰성 있는 역사적인 사실적 근거의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던 개신교 측의 주장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성서학계의 인정을 점차 획득하고 있다. 개신교 측에서는 실제로 얌니야 모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존 가설의 산 헤드린(공회) 주장처럼 기독교 배척을 위해서 갑자기 성경 목록을 결론지은 회의체가 아니라 학당(베이트 미드라쉬)나 랍비 학교(예쉬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설령 성경 목록 결정의 산 헤드린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특정 종파 배제를 위해 없었던 성경목록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서 유대교 안에서 정경으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목록을 산헤드린의 명의로서 공식적으로 선포한 경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요세푸스의 증언(레위스)과 프로토-루시아닉 교정본의 존재(레이만), 그리고 집회서의 서문(백위드)을 그 근거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현재는 유대교 및 신/구교를 막론하고 학계 내적으로는 그래츠가 제시한 종전의 얌니야 회의 가설에 비해서 더 높은 설득력을 인정받아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념은 얌니야 회의 가설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 극복을 위한 학술적인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 측에서 제시하고 있는 얌니야 회의 가설 극복을 위한 논리는 일찌기 근대 초반에 천주교와 개신교 진영에서 전개되었던 '외경 논쟁'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성경 목록 결정, 특히 2경전의 경전성 인정 문제에 대한 개신교 측의 맹공격에 대하여 당시 천주교 측에서 방어적 입장에서 제시하였던 논리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점이다. 

 

3. 타나임 시기 얌니야 유대교 공동체의 기독교 저주 기도 문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서서 기도(아미다)를 하고 축복 기도문(쉬모나 하스레)을 외운다. 이 아미다 기도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실질적으로 행할 수 없게 된 성전 제사를 대신하여 새로 제정되었고, 쉬모나 하스레의 종전 18개 기도문은 타나임 1세대 랍비 가말리엘 2세에 의해서 대폭 수정되었다. 이 수정된 기도문의 가장 초기 형태의 원문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토세프타 브라코트'에 나온, 논란의 출발이 되는 12장의 '저주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행악자에게는 희망이 없게 하소서, 무례한 왕국(로마?)이 근절되게 하소서. 이단들이 속히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 백성의 적들이 넘어지게 하소서. 그들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소서,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그런데 이 아미다 기도문에 나온 '이단'의 구체적인 예로서 '나자렛 인'이 좀 더 후기 형태의 기도문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자료들은 얌니야 회의와 함께 천주교 진영에서 이른바 외경 논쟁에 있어 개신교 측에서 유대교 성경 목록 전통을 채택한 것에 대한 비판의 보조적 근거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찌기 초대교회의 교부 에피파니우스와 히에로니무스는 유대교 안에서 바리사이파의 나자렛파에 대한 저주에 대해서 증언하는 결정적인 기록을 남겼고, 이 자료는 나중에 얌니야 회의 가설과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유대교 성경 목록 결정을 따른 개신교를 논리적 궁지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 역시 개신교 측의 노력에 의하여 얌니야 회의 가설과 마찬가지로 기존 자료의 신빙성에 대한 반박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유대교 내의 기독교 축출 작업이 가말리엘 2세에 의한 타나임 1세대, 세칭 얌니야 회의 시기를 전후하여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는 증거 불충분의 이유로 인해 인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서는 통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앞의 기도문에 나오는 '민'(이단자)의 정체에 대한 단서는 유대교 랍비 자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1) 랍비 엘리에제르 벤 히르카누스(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제자)의 할라카

=> 부활의 축복을 고백하지 않는 자, 하느님의 통치 섭리를 부인하는 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축원하지 않는 자,

무례한 자들의 패망을 기도하지 않는 자

 2) 랍비 아키바(랍비 엘리에제르 벤 히르카누스의 제자)의 '민' 대상 추가

=> 벤 시라 등의 외경을 읽는 자, 이단 서적을 읽는 자 (마술 서적, 이원론적 영지주의 서적 등)

(필자 주 : '벤 시라'는 기독교 측에서는 '집회서'라고 부른다.)

 3) 기타

=> 사마리아 이단(미드라쉬 하가돌), 우상숭배자들(토세프타 훌린), 조로아스터교도(바빌론 탈무드)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제 2차 유대 항쟁(C.E. 132~135)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세기 전반 로마의 압제에 맞서서 유대 민족의 항쟁을 이끌어 나간 바르코크바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당시 바르코크바의 민족 저항 운동을 물심 양면으로 적극 지지한 유대교 지도자가 바로 랍비 아키바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메시아를 자처했다는 이유로 인해 바르코크바를 지지하지 않았던 유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유대교 내부에서 본격적인 출교 작업이 전개되었던 것이 유대교 및 신/구교의 진영에 상관없이 대다수 학자들에 의해서 현재 통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크코바 반란이 있던 시기인 타나임 3세대에서 본격적으로 유대교로부터 기독교 세력에 대한 축출 작업이 이뤄졌고, 그 주도 인물인 랍비 아키바가 이단 축출의 명분으로서 타나크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벤 시라의) 외경을 읽는 자'를 아미다 기도문 12장에 나온 이단자의 유형으로서 제시하였다는 점은 오히려 기독교 배척을 위해서 얌니야 회의를 개최하고 타나크를 확정하였다는 종전의 가설보다도 원시 유대-기독교 공동체에서 집회서 등의 외경을 성경으로서 받아들였다는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역사적인 반증으로서 제시된다. 이에 대해서 개신교 측에서는 랍비 아키바가 이단의 구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단 서적'의 구체적 범주 안에 신약 복음서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벤 시라 등의 외경을 (경전으로서) 읽는 이단'이 바로 '나자렛파'를 의미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랍비 자료에서 직접적으로 언급이 된 '벤 시라를 제외한 다른 '외경'들은 구체적인 문헌의 이름이 증명될 수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라는 소극적인 반론만을 일찌기 레위스가 내놓았을 뿐이며, 그 이후에는 랍비 자료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외경인 벤 시라(의 집회서)의 문제에 대해서 어느 다른 개신교 계의 저명한 구약학자들도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기조차 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참고문헌

The Canonization in the Old Testament (Minister Paul Yoo, 2012)

- Lewis, J. P. ; “What Do We Mean By Jabneh?” (1961)

- Leiman, S. Z ; The Canonization of Hebrew Scripture: The Talmudic and Midrashic Evidence (1976)

- Leiman, S. Z. ; The Canon and Masorah of The Hebrew Bible (1977)

- Beckwith, R. ; The Old Testment Canon of The New Testament Church and its Background in Early Judaism (1985)

- Aune, D. E. ; “On the Origins of The “Council of Javneh” Myth.” (1991) 

유대교의 역사적 과정, 바리새파의 재발견 (정연호, 한국 성서학 연구소, 2010) 

 

<야브네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Rabbi Johanan Ben Zakkai)

랍비 요하난은 유태 민족이 사상 최대의 정신적 위기에 당면했을 때 활약한 사람이다. A.D. 70년에 로마인들이 유태의 성전을 파괴하고 유태인을 절멸시키려고 했을 때. 요하난은 매파가 항상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요하난은 유태 민족이 영원히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어떤 일에 관하여 로마의 장군과 협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 당시 유태인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출입이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나 요하난은 한 계교를 생각해 내어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거짓으로 환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랍비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이윽고 살아나기 어렵다는 소문이 퍼지고 얼마 뒤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제자들은 그를 관 속에 넣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 안에는 묘지가 없었기 때문에 시체를 성 밖에 매장할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매파의 경비병들은 랍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반신 반의하여 칼로 시체를 찔러 보겠다고 말했다. 유태인들은 절대로 시체를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시체를 직접 보고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관 위에서 칼로 찌르려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돌아간 분을 모목하는 행위라고 필사적으로 항의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드디어 로마군의 전선을 향해 갔다. 그런데, 전선에 이르자. 로마병 역시 칼로 관을 찔러 보겠다고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시, " 만일 로마의 황제가 죽었다면, 당신들은 칼로 관을 찌르겠는가? 우리들은 전혀 무장도 안 하고 있지 않느냐?" 고 주장하여 드디어 전선을 뚫고 나가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관 속에서 나온 랍비는 사령관을 만나고 싶다고 신청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로마의 사령관 앞에 나가자, 그는 사령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나는 당신에 대하여 로마 황제와 같은 경의를 표합니다." 하고 말했다. 황제와 같다는 말을 들은 사령관을 로마의 황제를 모욕한다고 화를 냈다. 그러자 랍비는, "내 말을 믿으시오. 당신을 틀림없이 다음 번 로마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사령관은. "당신의 말은 이해하겠소. 그런데 당신이 내게 하려는 말이 무엇이오?" 하고 말했다. "네, 꼭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하고 랍비는 대답했다. 이 경우 당신이라면 어떤 부탁을 하겠는가? 잘 생각해 보가. 이 때 랍비는 이런 부탁을 했다. "학교를 꼭 하나만 만들어 주십시오. 교실 하나라도 좋습니다. 10명의 랍비가 들어갈 수 있는 학교 하나만 만들어 주시되 어떤 일이 있어도 이 학교만은 파괴하지 말아 주십시오." 랍비는 조만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점령되어 파괴될 것을 알고 있었다.모든 가옥이 파괴되고 많은 유태인들이 학살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만 하나 있으면 유태인의 전통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청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령관은, "좋소, 약속하지요." 하고 말했다. 이윽고 로마의 황제가 죽고 그 사령관이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로마군에게 "그 작은 학교 하나만은 손대지 말라" 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 때 그 작은 학교에 남아 있던 학자들이 유태인의 지식과 전통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의 유태인의 생활 양식도 그 학교가 지켜 주었던 것이다. "착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다." 라고 요하난은 말했다. " 당신은, 인간이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와의 사이, 나아가서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요하난은 말했다

(글- http://blog.naver.com/80dosa/11413545)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Rabbi Johanan Ben Zakkai)

1세기에 활동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현인(賢人). 얌니아에 아카데미와 권위 있는 랍비 기구를 설립했는데, 이 기구는 70년 성전이 파괴된 뒤 전통적인 유대교의 전승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든 〈탈무드〉 교사들(구전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경우도 엄밀한 의미에서 전기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탈무드〉와 미드라시 자료(주석과 해석)는 주로 현인들의 가르침과 그들이 대표하는 견해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하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70년 이전에도 바리사이파의 주요대표자로서 사제와 사두가이파 구성된 당국자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할 것과 구전전승을 표준으로 포함시킬 것, 전통적인 법령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여 해석할 것 등을 주장했고, 보수적인 소수 특권층이었던 사두가이파는 기록된 율법만을 권위 있는 표준으로 받아들였고, 더욱 문자적이고 고정적인 해석을 했다. 요하난의 학교는 유명했음이 틀림없으며,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입학허가를 얻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는 극단적인 행동까지도 하곤 했다. 요하난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로마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정책에 반대했다.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요하난은 70년(68년일 가능성도 있음)에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로마군 진영으로 이송됨으로써 유대아 해안 근처 얌니아(야브네)에 아카데미를 세우도록 허락을 받아냈고, 이곳에서 좋아하던 많은 제자들과 합세했다. 그 가운데 엘리에제르 벤 히르카누스와 요슈아 벤 하나니야는 예루살렘에서 스승을 관에 넣어 몰래 빠져나가게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1세기말과 2세기초에 자기 세대를 이끈 교사들이 되었고, 다음 세대의 대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요하난의 가르침은, 그의 이름으로 된 몇 가지 안 되는 진술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2세기 동안 명료하게 다듬어진 여러 견해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말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자비 행위는 과거의 성전 제사의식에 못지 않게 죄사함을 받는 데 유효하며, 창조 이래 우주의 핵심이다. 토라(하느님의 교훈 또는 율법) 연구는 인간 생애의 중심 목적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항구적인 형태이다. 한때 성전에 한정되었던 여러 의식과 규율은 '그 성소를 회상하는 역할을 하도록' 성전 바깥에서도 채용되어야 한다. 예루살렘이 성소이긴 하지만, 의식과 교훈에 대한 기본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는 권위 있는 학자에게 맡겨야 한다. 본래부터 급진적인 이러한 견해들은 랍비들의 표준적인 가르침과 유대교의 항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요하난은 얌니아에 주요 아카데미와 권위있는 랍비 기구를 세움으로써 기본 전통이 전승될 수 있는 여건을 확립했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상을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재해석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탈무드〉 및 랍비 유대주의가 그 뼈대를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하난과 제자들이 몰두한 것은 율법(할라카)의 연구와 계승발전이었다. 또한 이들은 특히 성서 내용에 관한 설명과 해석인 성서주석(미드라시)과 관련해서 비율법적인 주제들(학가다)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외에도 창조 문제와 메르카바(〈에제키엘〉 1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전차) 환상에 관련된 신비주의 주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심지어 그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도 이러한 주제로 강론을 했다. 또한 성전 파괴 이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이전에는 헬레니즘(로마 세계의 통속적인 철학 논쟁 특유의 윤리)철학 문제가 제기되어 논쟁이 일어날 경우, 요하난은 회의를 소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하난은 설교를 통해 성서를 해석하면서 뛰어난 방법으로 상징적인 해석과 논리적인 해석을 조화시키곤 했다. 왜 재단을 세울 때 정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 쇠는 파괴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지만, 하느님의 제단은 평화를 전하기 위해 있기 때문이다. 왜 종이 되기를 자원(自願)하는 사람은 귀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며, 시나이 산에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에 구멍을 뚫으라. 이것이 요하난의 전형적인 주석방식이다. 그는 메시아 선포가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보아 이를 물리쳤지만, 마지막 병석에서 요하난이 했다고 전해지는 한 마디 말은 메시아에 대한 사색이 그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1세기의 모든 팔레스타인 유대인 현인들 가운데 요하난 벤 자카이만큼 당대와 그뒤 여러 세대의 학자들과 신앙지도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었다. 그는 〈탈무드〉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힐렐파 전승을 이어갔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힐렐의 가르침만 물려받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글- http://cafe.daum.net/Cedar/O54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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