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까지이니까?
김요한 선교사
(시 6:3-4)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신앙이 살아있으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자신을 포개어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부활과 연합한 세례를 묵상할 때에 역사하십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은 이후부터는 안팎의 싸움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다윗은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사단의 마수에 끌려 들어갈
자신의 죄 성과 독기와 악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주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 애통함이나
상한 심령의 기도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죽은 신앙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기름기가 흐르는 유들유들한 것으로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한 내적 갈등에 의해 탄식을 하며 눈물로 간구하므로
자신 안에 있는 원수로부터 승리한 얼굴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 얼굴은 치열한 전투로 사망을 이긴 주의 생명의 빛으로 반짝거려야 합니다.
다윗이 특별한 악당이어서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이며 스올의 맛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입니다.
밤마다 탄식할 수밖에 없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는 울음을 울 수밖에 없는
지긋지긋한 육신을 걸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내 안에 사망과 음부가 그대로 있어 구원 받은 사실은 있으나
그 능력과 신성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 자신의 비참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탄식하고 울부짖습니다.
이 원수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일식처럼 잠식하고 나를 깊은 수렁에 빠뜨려
구원의 즐거움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치열하고 처절한 영적인 전투, 날마다 밤마다 상한 심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며 자신의 옛 사람이 장사된 사실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지기를 떨리는 영혼으로 울면서 간구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그 안에 있는 어두움의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하신
주를 높이는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김에 애통함으로, 상한 심령으로, 탄식하며 눈물로 울부짖으며
간구함으로, 그 사건에 동참하여 성령의 감동이 그 안에 나타나
원수가 물러가는 체험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