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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여자 - 우희정

Joyfule 2005. 6. 2. 04:28
어머니와 여자 - 우희정 양곡 소세양 선생 문학비 건립식에 참석 차 전주에 갔더니 그곳에 계시는 목선생님과 하선생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일정을 마치고 다른 일행들은 서울로 향하는데 우리는 죽림온천을 향해 달렸다. 덕진공원에 연꽃이 피었다는데 연꽃보다는 온천물에 도심에서 찌든 분진을 씻고 싶었다.

서울서부터 같이 간 홍선생님이 대중탕 앞에서 망설였다. 자신은 혼자 바깥에서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아마도 목욕을 마치고 벌게진 얼굴로 원로 선생님들과 마주칠 일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나도 예전에 경험했던 바라 내 얘기를 하며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붙들고 끌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김이 잔뜩 서린 온천탕은 꽤 넓었다. 홍선생님은 그 넓은 곳 어디로 금세 숨어버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벌거벗은 몸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 목욕탕만큼 너나없이 평등한 곳도 없으리라.

나는 목선생님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배로 치면 선생님이 어머니 뻘도 더 되니 내가 선생님의 등을 먼저 밀어드려야 하건만, 선생님의 성화에 나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내 몸을 온전히 선생님께 맡기고 있었다. 부드럽고 정결하게 등을 미는 손길이 한없이 자애로웠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온몸의 신경줄이 느슨해지며 마음이 안온해졌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지?”

살집이라고는 전혀 없는 내 빈약한 등을 밀며 걱정스레 묻는 선생님의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내 목울대를 아프게 했다. 혹여 나 때문에 지금의 내 나이 또래에 하늘나라로 보낸 따님 생각을 하신 게 아닌가 싶어 송구스러웠다.

선생님의 수필집 교정을 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다. 위암과 투병하느라 여윌 대로 여윈 딸의 등을 밀며 피눈물을 쏟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나는 내 어머니를 떠올리며 울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 어머니의 심정, 바로 눈앞에서 사그라지는 자신의 분신을 지켜보아야 하는 모정. 선생님의 처절한 그 모습에서 나는 왜 나를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를 떠올렸던 것일까?

지난 일요일에 아주 오랜만에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어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등을 밀어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이 살뜰했다. 때를 밀고, 비누칠까지 구석구석 정성을 들이는 모습이 돌아앉아서도 훤히 보였고, 어머니의 앙상한 손이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입으로 하는 말보다 더 촉촉이 내 가슴으로 파고드는 이야기였다. 콧등이 찡하더니 눈물이 흘러내려 나는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멀쩡한 비누타령을 하며 세수를 했다.

어머니는 내게, 아니 우리 삼남매의 눈을 언제나 바로보지 못하는 죄인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거두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평생 몸둘 바를 몰라 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언제나 당당하고 잘난 딸이었다. 어찌 그리 모질게도 할말이 많았는지…….

세월이 흘러 나는 자식을 낳아 키웠고, 순탄치 못한 여자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어머니가 한 사람의 여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상의 다른 여자들에게는 희망 없는 기대에 시간 죽이지 말고 자기 인생을 찾아야 된다고 목소리의 톤을 높였으면서 내 어머니에게는 한치의 빈틈도 용납할 수 없었다.

내 앞에 여자와 엄마의 길이 선택적으로 주어졌을 때도 나는 어머니에게 보란듯이 내 아이들을 끌어안고 둥우리를 틀었다. 그랬다, 보란듯이……. 나는 어머니보다 잘났으니까. 어머니가 우리를 버리고 개가를 했던 바로 그 나이에, 나는 한 달이 넘게 40도를 넘나드는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다 응급실에 실려갔다. 꼭 죽을 것만 같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다.

“아이고, 이게 우짠 일이고?”

응급실로 달려와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대는 어머니를 보자 나는 그만 어린아이마냥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씻어내는 눈물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 아집 속에 웅크리고 있었는가를, 이 세상에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해야 될 일인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목선생님께 등을 맡기고 앉아 나는 또다시 어머니를 떠올렸다. 내 어머니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곧 목선생님의 이런 자애롭고 정성스런 손길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새삼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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