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억새 - 이고운

Joyfule 2012. 10. 11. 09:16

 

    억새 - 이고운                         

 

 

 가는 계절과 오는 계절을 맞바꾸자며 하늘과 땅이 사인을 하고 있다.

 먼 유랑 길에서 만나는 띠집처럼 반갑다. 키를 재는 억새들이 손 흔들며 뛰어온다. 낡은 모자 쓰고 허름한 나그네들 서걱서걱 몸 비비는 고향 이야기 들어라. 옛 친구들과 왕산을 올라 필봉을 간다.


 책보따리 끄르는 소리, 깍두기공책에 받아쓰기 하는 연필소리, 사샤 소쇼 스시, 교실에서는 아직도 사인 연습을 하고 있다. 지각한 억숙이가 나들간에서 벌 청소 하는 비질소리, 유리창을 깨고 종아리를 맞은 석이가 흐느끼는 소리, 운동장 땡볕이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술이와 성이를 말리고 있다. 선생님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바라보는 새가슴이 수근수근 뛰고 있다.


  십 리 너머 학교 가는 길. 고갯마루에 오면 죄 없는 풀잎을 쪼가리 내며 앉아있는 아이들이 두 셋은 있었다. 어쩌다 나도 그 중에 끼어 울적한 아이들과 풀밭에서 뒹굴었다. 추울 땐 폭신한 양지였고 더울 땐 찹찹했다. 폭, 들앉으면 뺑소니를 숨겨주던 마른버짐 같은 은신처. 거기서 우린 반성문을 썼고 공납금 독촉장을 찢어 날려버렸다. 옷에 풀물이 들지 않아 시치미를 떼기에도 그만이었다. 풀잎으로 칼싸움을 하고, 띄울 곳 없는 돛배도 만들면서 한나절을 킥킥 깔깔거리며 놀았다. 어쩌다 새뜩 베이면 손가락에 실낱 같이 피가 났다. 풀잎에 베인 피는 그렇게 많이 슬프지도 않고 좀 서럽다. 풀잎을 붕대 감아두면 비쭉거리던 피도 울음을 그친다. 어둑살이 내리는 줄도 몰랐다. 우울이 하얗게 지워질 때까지 놀다가 기죽어 오그라드는 가슴에 오종종한 바람! 을 돌리며 집으로 갔다.


  제날에 공납금을 못 받아 가는 날은 골목이 더 길었다. 집 뒤 골목에서 해딱 해딱 돌아보며 쿨쩍거리는 가이내 등 뒤로 아베는 돌을 던졌다. ‘이 가이내 어여 안 갈겨~?’ 날아오는 돌멩이보다 아베의 엄포가 먼저 뒤통수를 때렸다. 번번이 발뒤꿈치 못 미쳐서 퍼석, 가루가 나서 흩어지던 돌멩이. 몇 걸음 가다가 멈추면 또 돌멩이가 날아오고, 담장에 얹혔던 흙돌은 가이내의 걸음을 골목 끝까지 밀어냈다. 대밭그늘을 벗어나야 끝나던 골목, 그 끝에서 헝클어진 쇠수세미 같은 햇살에 눈이 부셔 잠시 막막해 했던, 그 후.


  여름이 서글거리면 풀밭엔 폭풍이 예고 없이 휘몰아 쳤다. 쓰러질 듯 정신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어쩌겠다는 대책도 야망도 없이 보다 짙푸른 힘줄로 점점 독기를 뿜었다. 일어서야 했다. 흔들리다 흔들리다 혼을 놓지 않으려고 일어서면 바람은 사정없이 사글세를 걷어갔다. 채반에 널린 무말랭이가 빙어처럼 말라가고, 사금파리 같은 가난이 쇠죽솥에 오르는 김처럼 초서를 휘갈기면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감감한 옛 주소를 들고 나는 심부름을 나가곤 했다. 섶불을 건너뛰던 문턱을 돌아보며 지향 없는 옷보퉁이를 쌌다가 쌌다가 했다.


 바람의 조련장인 산 능선에 고개 언덕에 살아야 하는 풀은 이른 아침부터 칼을 갈았다. 안개 속에 쪼그리고 앉아, 손에 침을 뱉아가며 허기지도록 갈았다. 지켜내야 할 운명을 가슴에 새기며 무딘 날을 세웠다. 잠시라도 갈지 않으면 녹슬어버리는 비늘들을 다 끄집어내었다. 숫돌에 쓸리면서 허공의 낭낭 끄트머리로 와서 촘촘히 날이 서면 칼날을 당겨 바싹 들여다본다. 닳은 숫돌만큼이나 패인 한쪽 눈을 찌그리며 손끝으로 쓸어보고, 미세한 세포들이 같은 크기로 고르게 섰는지 또 쓸어보고.  하늘이 칼끝에 앉아야 사르르한 느낌이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허공을 베면서 새파랗게 일어섰다. 미래를 응시하는 패기로 억세어지면서.


 누군들 삶의 어느 한 뙈기 억새밭을 지나지 않으랴. 그곳은 생에 있어 낭만의 공간이기보다는 이성의 공간이었다. 결핍과 미망의 유배지. 추억보다는 회억일 밖에 없는 억새에는 그 즈음 삭이 들었다. 봄풀의 부드러운 사슴이 어느 새 한 마리 삭이 되어 어슬렁 걸어 나왔다. 걷지 않으면 무섬증이 도지는 삭이었다. 노을에 먹점이 촘촘히 찍히기 시작하면 걷는다. 능선이 사라질까 저어하며 가운데 움푹 이가 빠져 오래 전에 버렸던, 시룻번을 떼거나 쑥부쟁이를 캐던 묵칼을 물고 능선에서 능선으로 킁킁거리며 걸었다.


  그는 늑대의 몸을 닮았으나 초식의 습성을 가졌을 테고, 들개의 방황을 닮았으나 배잔등이 유순하여 우리 집 점박이의 온순을 닮았음을 예감했다. 끝이 휘어 올라 더 치렁한 꼬리를 가졌을 성싶은 토속의 짐승. 바다로 가는 샛강의 여울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향해 컹컹거리다가 네발을 부리에 문지르며 새녘이 틀 무렵에야 수잠이 드는 삭. 이름처럼 날쌔지 않고, 이름처럼 꾀가 많거나 약지도 못해, 숫기가 없어 무관절을 앓아 억새밭을 서성거리거나 할 것 같은 삭.


 집짐승으로 매였던 목에는 백태가 끼어 늘 쉰 소리가 났다. 긁어서 딱지 앉은 상처를 또 긁어대는 우매함 때문에, 야생으로 방목할 수도 울음을 가둘 수도 없어, 그믐 같은 엉을 내려다보며 월식을 향해 짖었다. 뒤척이는 울음으로, 썰물 지는 소리로, 저항으로 짖었다. 어둠의 바다를 향해 목이 잠기도록 짖으면, 내륙 깊숙한 포구를 열고 낡은 목선 하나가 까딱거리며 와 닿고, 풍랑거친 하구를 죽음처럼 빠져나갈 노를 쥘 것만 같았다.


 어느 찬 새벽, 사라져버린 뭉칫돈 때문에 차오르는 속을 삭히고 비워서 서늘한 새벽을 뱉어내야 하는 노름빚 같은 세월을 산다. 삼켜버리고 시치미를 떼느라 도리질하던 억새밭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몸의 통증을 쓸어내야 하는 풀빗자루 하나 만들려고 유희 아닌 유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한번 터 잡으면 불길로 꼬실라져도 대대로 올라와야 할 것들을 손 비빈다. 원망을 고집으로 다그치느라 아픈 것, 더 그리운 것, 궁핍하고 못난 것에 대한 스스로를 채찍하느라 삭은 비비며 앓는다.


 태가 아름다운 것은 흔들리는 것으로 향을 대신하는가. 태가 꽃이 되는 억새. 요란을 떨다 맥없이 지는 꽃이 아니라 소명을 받은 붓대처럼 은금색 습윤이 마르면서 솟아 핀다. 씨를 달고 섬세한 보송이로 날아간다. 그는 머물면서 늘 떠난다. 그건 제 다독거림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태가 또 있을까. 풀이면서 풋내가 없는, 풀과 나무의 갈등을 중재하느라,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이 가을을 서성이는 것들을 위해 손금을 흔들면서 오래 피어있다. 무리지어 피고, 무리지어 능선으로 바람받이로 옮아간다. 버리고 간 화전의 터에 서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여인의 고달픔으로 붙박는다. 그냥 흔들리는 소망 하나로 ‘저요~ 저요~’ 한 손만 수구려 들고, 그 몸짓 아니면 구겨 앉을 밖에 없는 절규로. 그래 그리여, 그러면 되는 것이여. 나뭇짐에 꽂혀서 등짐조차 가뿐하! 게 들어주던 억새의 삭. 향을 태로 바꿀 줄 아는 영민하면서도 천치 같은 저것.


  억새는 사람 키를 닮았다. 제 몸, 잎 가운데 흰 외길 하나 내려고 키를 맞추었다. 오래된 비밀들을 소곤거리다 언어들이 설움을 탔다. 바람이 낮아지면 한가로이 노닐다가 산등으로 넓게 퍼져 오르면서 웅웅~ 더 거칠어지는 때에는 성난 음속으로  울다 울다가 바람이 자면 곧 겸손히 맑아지기도 하면서. 그러다 어느 밤, 땅에 눕지 않으려고 억새는 기어이 삭을 뽑은 것이다. 이제 잔허리 가늘어져서 꽃이 된 삭. 키가 하늘을 손짓하며 허연 꽃머리를 바람에 날린다.


  서부로 간 사나이도 동편제로 간 끝님이도 까칠해 졌다. 이제 우린 다 까칠해 졌다. 까칠한 풍경들이 외줄로 어물리어 눈 맞추며 걸어간다. 뒷모습이 좋아 그럴싸해진 사람들, 억새가 사진을 찍는다. 챙이 넓은 모자라도 눌러쓰자. 억새랑은 멋없는 무엇도 더 멋있어진다. 돌아보지 마라. 나는 너의 등을, 너는 나의 등을 보며 오솔길 지워질까 오늘 억새꽃들 걸어간다. 꿈같은 필봉을 향해.


  바람의 혼이 내 정수리에 삭 삭, 사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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