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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꿈꾸다 - 한상렬

Joyfule 2012. 10. 12. 09:37

  トロッコ電車:8.7KB  신화를 꿈꾸다 - 한상렬

  어떤 이가 말했다. “세상만사가 햇빛에 바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이 스며들면 신화神話가 된다.”고. 그 말을 나도 믿는 것인가. 올빼미처럼 밤을 밝히며 달빛의 영롱한 애무를 기다린다.    
 

 창가에 꽃이 만개하였다. 온 방안을 진동하는 화향花香은 그 절정을 알리려는 듯한 애틋한 절규로 보이기도 하고, 펄럭이는 깃발이 만나는 바람결처럼 주기적으로 산통産痛을 동반한다. 드디어 비상할 때가 온 것인가. 
  
세상의 정적인 생명들은 동적인 생명을 동경한다. 배고픔에 지친 날갯짓으로 귀환하는 날것들은 안정감 있는 고요를 지향한다. 그래 한 무리의 꽃들도 그들만의 꿈이 있는 세계로 날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나 비상하지 못한다. 달이 차기를 기다리듯 때로는 인내와 굴종, 그날의 환희를 예비해야 한다. 그들의 지도에는 후진도 정차도 없으며, 그저 직전만이 있을 뿐이다.

  유혹 
  유혹은 아름답다. 그는 늘 상대적이다. 상대가 강한 욕구로 충만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돈의 유혹이 그러하고, 명예나 인기의 유혹도 그러하다.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향기를 내뿜으며 흔든다. 하여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게 유혹이다.
  유혹은 양자 대립의 구도이다. 승패가 가려지는 도박과도 같다. 때로는 낭패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서로에게 긴장을 불러온다. 유혹 앞에 혼수상태가 되면 차라리 인간적이다.
  유혹은 수단이자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다. 행하는 이의 입장에서 보면, 가히 필사적이다.

그 끝이 절망을 낳기도 하지만, 결코 악의적이고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유혹은 반드시 강렬하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유혹은 해도 좋은, 받아도 좋은 매력 있는 단어이다.

  거울을 보다 
  거울 앞에선 누구나 자신의 외모를 본다. 하지만 거울은 모두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하는 자에게는 마음을 열어주고, 깊이 사고하는 이에게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울은 나를 비추어보는 단순한 반사장치가 아니라,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통로이다.

누구나 거울 앞에 서면 숙연해지고, 의식을 치르듯 겸허한 마음으로 영접 받게 마련이다.
  사물을 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이는 상대의 참모습을 보기 어렵다. 방향을 바꾸어 보면 그 실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 자신도 내 실체를 식별하기 어려운데, 남의 실체를 확인 한다는 일은 그리 만만찮다. 다양한 각도에서 때때로 본질과 외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접하기 어려운 국면과 맞닥뜨릴 때 상대의 반응은 예측불가능하다. 외형과 내면의 통로를 자주 넘나드는 이는 더욱 그러하다. 하기에 감정의 기복起伏이란 나 자신조차도 제어하기 쉽지 않다. 방법은 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화답하는 길만이 남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 은 아닐까.  

  향香과 음音
  릴케의 가을이 왔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낙엽들이 스산한 아스팔트 위를 뒹군다. 머지않아 그 빛마저 퇴색하여 퇴적층처럼 잿빛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곤 아스라이 기억 속으로 줄달음치겠지.
  모든 것은 자신의 임무가 끝나면 분해 되어 새판을 짜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실었건만 연일 촛불에 고함에 제 몫 챙기기에 혈안이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희망이 사라진 터에 미국으로부터 불어온 때 아닌 경제 위기의 여파가 지구촌에 쓰나미를 동반하고 있다. 모두 긴장하고 있는가. 고개 숙인 사람들뿐. 반 토막 난 펀드를 살리는 길은 정녕 없는가. 이럴 땐 한 잔의 차가 그립다. 다향茶香이라도 번지면, 바이올린 선율에 낙엽이 내리듯 역사는 신화가 될까.
  팽팽한 긴장감. 현악기의 쇠줄을 당겨 보았는가. 스트링string, 현의 당김이 극도의 긴장감을 갖게 한다. 이때의 현은 느슨한 상태로 어떤 음音도 구사할 수 없다. 긴장감이 때론 나를 흥분하게 한다. 조임이 주는 긴장감이 내 의지와 신념을 재확인하게 해 준다.    
  
  프루스트의 아우라 
  삶에서 빛나는 시적인 순간들과 어두운 악습의 장면들이 아우라 속에서 서로 마주친다. 절절히 회상된 세계의 떠도는 특성이 실존적인 장소 없음과, 어디에나 나타나고, 아무 데서도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하는 관찰자 마르셀의 기묘한 눈길과 결합된다. 불안하게 만드는 마법이 그를 사춘기에 바닷가에서 만난 젊은 소녀의 회상의 모습 속에 가두어 버린다.  
  어떤 때는 과거를 돌아보면서도 진실을 찾을 수 있다. 이제 기억을 통해 새로이 체험하는 과거의 생동하는 시간에서이다. 마르셀 프루스Marcrl Proust의 기념비적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는 문장이다. 이와 더불어 작품 전체의  서술 관점이 도입된다.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라고.
  자신 자신을 찾는 길.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잠드는 상황이나 불면의 상황에 속하는 ‘마구 뒤엉킨 기억의 모습들’을 프루스트는 이 소설에서 하나하나 불러내고 있다. 그는 문학적 패러디의 대가였다. 표피적 현상만으로는 진실을 캐기가 불가능하다. 안과 밖의 시각에의 천착. 아우라는 이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신화는 이를 단초로 한다.

  화답 
  시선이 머무는 곳에 마음도 머문다. 일상의 작은 정물 하나에도 그들의 대화가 숨어 있고 숨결이 있다. 이를 읽어내는 일이 수필가의 임무이다. 작가는 이럴 때에 가슴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마음을 연다. 주거니 받거니 애정을 쏟아야 일상은 화답한다. 우주의 중심이 나라면, 일상은 내 주변을 맴도는 행성과도 같다. 그들이 있으므로 우주는 존재하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아, 수필이여! 그대에게 화답하고 싶다. 정녕 이것이 신화를 꿈꾸려하는 것인가.
                                                       (『월간문학』, 2009-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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