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언니 - 白蓮 원화윤

Joyfule 2012. 10. 23. 10:10

  언니 - 白蓮 원화윤
                                                  
며칠 전 언니의 전화, 정겨운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쉬는 날을 택해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 무게, 두터운 안개에 갇힌 이른 아침, 축축한 잿빛하늘에 을씨년스러운 날씨임에도 언니에게 달려가는 발걸음에는 리듬이 실린다. 늘 마음은 언니 곁으로 달려가지만 차일피일해 죄송한 마음이다. 강산이 두어 번 변하기 전까지도 두메산골이던 마을이 세태의 흐름에 맞춰 오솔길부터 전원생활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잿빛하늘을 수놓는 뽀얀 연기가 정겨운 마을 어귀, 그림자 빛 나목들 속 저만치서 까치울음이 힘차다. 그 경쾌한 울림이 언니의 반김 같아 미소 피는 마음은 바빠진다. 앞마당으로 들어서니 크고 작은 통나무들이 여기 저기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통나무토막들은 고사목인 것 같았다. 넓은 앞마당 입구에는 큼직한 개집이 두 채나 서있다. “좀 늦었구나?” “언니와 주고받는 반가운 인사에 줄에 매인 개들은 꼬리로 웃으며 달려든다. 짧은 줄에 뱅뱅 돌며 반기는 개들은 작은 송아지만한 몸매가 아주 건강해 보였다.

어미가 일어서니 우유병 같은 주렁주렁한 젖을 빨다가 다투어 문턱에 앞발을 올린다. 낯도 안 가리는 토실토실한 강아지들에게 얼른 손을 내미니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꽃이파리 같은 발간 혀로 연신 손바닥을 핥는다. 볼수록 귀여운 강아지는 육남매란다. 발걸음을 잡은 귀여운 재롱은 마음을 놓아주질 않는다. 순간, 아쉬웠다. 언제나 신분증처럼 지참하던 사진기를 잊고 온 것이다. 돌잡이 아가처럼 제일 예쁠 땐데, 얼른 품에 안으니 토실한 몸이 제법 무겁다. 어미젖이 참젖인가보다.

병약한 지아비에게 쏟는 지어미의 그 극진함, 형부 보양식으로 키우는 가족의 일원인 개들, 만삭인 개가 해산을 할 때에도 언니는 손색없는 산파란다. 그렇듯 자식 보살피듯 키운 개를 형부 보양식으로 끓이기 전에는 근교에 위치한 산사에 다녀온다는 언니, 형부 건강도 지켜야 되니 정든 개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토실토실한 강아지를 품에 안고 볼을 비벼댄다. 마냥 좋아하며 발버둥치는 강아지 귀를 매만지는 언니, 번번이 씻지 못할 죄를 짓고 있다는 괴로운 심정이 헤아려져 마음 편치 않았다.

어쩌겠는가. 인간의 보양식으로 태어난 운명의 팔자인 것을. “언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어쩌겠어요.” 씁쓸한 표정인 언니 마음을 토닥이며 세월의 테에 정겨운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검버섯이 박힌 나무주걱이 꽂힌 커다란 고무 자배기에는 버무리다 만 고추장이 그득하게 담겨있었다. 아이들이 번갈아 가져가니 거의 떨어져서 올해에는 겨울고추장을 담는다는 언니는 겨울에 담은 고추장이 은근히 익어 깊은 맛이 있다며 동생이 오는 날을 택해 어제 몇 시간을 끓인 엿기름물에 검정찹쌀 풀을 쑤어 삭히는 중이라고 했다.

검정 쌀로 담근 고추장은 살결도 빛깔도 거무스름한 윤기에 입 안 가득 단침이 고였다. 맛깔스럽게 보이는 찰진 고추장을 둥글넓적하고 키가 큰 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검지로 푹 찍어 입에 넣으니 매콤하고 짭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혀에 착착 붙는다. 저으면 저을수록 골고루 간이 배어 더 맛있다고 해 팔이 아프도록 계속 저었다. 초겨울에 엿기름을 키워 말리면 얼면서 마르기 때문에 엿기름 당도가 더 높단다. 주재료나 부재료나 언니가 손수 가꾼 재료들이라 애착이가는 고추장은 더 정겨운 맛이다.

현관으로 들어서기 전 거실 미닫이 창문 앞에도 통나무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가지런히 예쁘게 쌓여있는 통나무장작은 뿌듯한 마음이 절로 따뜻해진다. 집 안팎으로 쌓여있는 통나무장작들은 매사 부지런한 성격인 형부의 수고로움인 대가가 아닌가. 거실로 들어서니 나무 타는 향기가 가득한 창문 쪽에는 못 보던 철판난로가 놓여있었다. 애칭이 돈 버는 난로 이름은 똘똘이 난로란다. 이름이 귀여운 난로는 큼직한 몸통에 장작 먹는 입이 투명하게 제작되어 각색 불꽃이 훤히 보이는 멋쟁이 난로로 잘도 생겼다.

24시간 온 집안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난로는 출출할 때 간식도 구워 먹을 수 있는 홈통도 갖추고 있었다. 난로 위에는 간단한 끓임도 끓일 수 있어 주전자 입에서 뿜는 수증기는 가습기 역할도 하고 다목적기능을 갖춘 알토란 난로였다. 경제 한파에 몸도 마음도 동상에 걸릴 위기에 처한 요즈음, 다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기능난로를 제작한 분께 내심 고마운 마음이다. 투명한 입구로 비추는 불꽃에서 풍기는 장작 타는 향기는 정화차원에서나 소화차원에서나 음으로 양으로 일거양득의 난방기구가 아닌가.

연료 값이 다락같이 오르는 현세에 더없는 으뜸 효자가 아닌가. 체형이 번듯한 잘생긴 장작을 먹는 난로는 볼수록 견고하고 듬직해 미덥고 정겨웠다. 굽는 홈통을 잡아당기니 도착하면 먹으라고 미리 넣어 놓았다는 고구마가 마침 맞게 잘 익었다. 깨끗하게 씻어 구운 고구마 속은 발그스름한 빛이 구미가 당겼다. 살이 찰진 고구마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호호 불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큼직한 거로 두 개를 먹고는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풍기던 들기름 냄새에 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제 형부가 짜 오셨다는 들기름으로 머리만 썩둑 자른 통김치를 조물조물 무친 김치볶음에 방금 지은 잡곡찰밥에 척척 얹어 먹는 점심밥 맛은 수저를 놓기가 싫었다. 형부와 언니의 살가운 마음은 고향의 푸근함이요 어머니의 품안이었다. 설거지는 미뤄놓고 그간 궁금했던 소식에 군고구마처럼 달콤한 수다는 점심밥 맛 같은 참맛이었다. 이글거리는 장작불에 사랑방 부뚜막에 앉은 무쇠가마솥에서는 물이 펄펄 끓고, 고추장에 배가 부를 올망졸망한 옹기항아리들에는 서울에 사는 조카애들에게 보낼 따뜻한 언니 마음을 가득가득 담았다.

앙증한 옹기항아리 잎에 묻은 고추장을 닦으며 비닐 팩을 씌우노라니 뿌듯한 마음은 마냥 행복했다. 며칠 전에 아이들 김장김치까지 해서 제가끔 보냈다는 언니는 이 못난 동생이 걸려 또 포기김치를 담았단다. 매사 부족한 동생을 살갑게 챙겨주는 언니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함이 번번이 죄송한 마음 염치가 없다. 매년 늦가을이면 가을걷이를 모두 끝내 놓고 다녀가라는 전화를 잊지 않는 언니, 읍내에서 짜 오셨다는 들기름이며 김장김치며 고춧가루며 참깨며 검정 쌀이며 산밤이며 된장국거리 속살 진 배추며 화분에 심어 먹을 대파까지 챙겨주신 알토란 먹을 걸이들, 형부와 언니의 마음을 트렁크가 만삭이 되도록 챙겨 주셨다.

작은 돌창물이 맑은 시냇가 둔덕 위, 여기 저기 통나무 장작더미가 수북하게 쌓이고 육남매를 둔 누렁이 가족이 배웅하는 앞마당 입구를 돌아 나오도록 백미러 속의 언니와 형부, 언제나 물결처럼 한결 같은 언니의 은근한 속정, 그 온화한 마음과, 온 집안을 훈훈하게 데워주는 다목적기능을 가진 똘똘이 난로는 생각할수록 언니의 마음결 같아 더없이 미덥고 정겨웠다. 그렇듯 우직한 난로에서 노릿하게 구워진 군고구마가 조수석 비닐봉지 속에서 송골송골 땀을 흘리며 언니의 정물을 풍기고 있다.

컹컹- 이웃집 개짓는 소리도 정겨운 그림 같은 마을, 새하얀 비닐 팩에 꼭꼭 싸인 소먹이 비축양식인 볏짚더미들이 빈 논을 보듬고 있는 허허로운 들판, 싸늘한 산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눕고 고운 노을이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어스름 저녁, 올망졸망 싸 보내며 행복해 하는 어머니 같은 사촌언니, “천천히 조심해서 가거라.” 집이 가까워질수록 백미러 속에 찍힌 언니와 형부의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부디 건안하시길 간절한 마음이다. 어둠살을 삼키며 점호 하듯 깨어나는 가로등빛이 오늘따라 목멤의 따사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