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 김 학
잔잔한 추억의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다. 추억이란 물고기를 건져올리기 위한 낚시질이다. 여느 낚시질과는 달리 준비가 손쉽고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아 좋다. 서둘러 밑밥을 놓을 필요도 없고,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낚시도구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 밤과 낮, 날씨의 좋고 나쁨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살생과는 아예 무관하니 더더욱 떳떳하다.
삶의 갈피갈피를 차곡차곡 담아 둔 사진첩을 펼쳐 보는 것도 추억의 낚시질이긴 하다. 그러나 사진첩은 휴대가 불편하다는 아쉬움이 따른다. 내가 즐기는 추억의 낚시질은 항상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에서는 자유자재로 즐길 수가 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서도 가능하고,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가능하다. 여럿이 어울려 술잔을 주고 받으면서도 즐길 수 있고, 홀로 터벅터벅 골목길을 걸으면서도 즐길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이테 만큼의 역사를 간직하기 마련이고, 그 삶의 도정에서 빚어진 온갖 사연들이 추억으로 쌓인다. 다양한 무늬로 짜여진 추억거리 가운데서 필요할 때마다 앨범 속의 사진을 펼쳐보듯 되새겨 보는 것이 내가 즐기는 추억의 낚시질이다.
때때로 나는 추억의 앨범을 펼치곤 한다.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흐뭇했던 일 아쉬웠던 일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솔솔 피어오른다. 기억의 창고에 쌓여있던 추억의 편린들이다. 그 당시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괴롭고 고달팠던 일들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즐거운 추억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학창때나 군대시절의 추억이 그런 경우랄까.
서녘 하늘에 노을이 곱게 물들어가던 어느 날, 나는 L사장과 더불어 시장 안의 순대국집을 찾았다. 아스므레 잊혀져가는 추억의 맛이 그리워서였다. 순대국집의 정경은 옛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너댓 평쯤 되는 순대국집엔 조그만 탁자 두 개와 길다란 조리대 하나 그리고 방 한 칸이 있을 뿐 초라한 분위기였다. L사장과 나는 순대 한 접시를 시켜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얼굴이 검붉게 그은 40대 농민 부부가 초등학생 또래의 아들과 함께 들어서는 것이었다. 바쁜 농사일을 마치고 해거름판을 이용 장보기하러 나온 모양이다. 국밥 두 그릇을 주문하여 남편이 한 그릇을 먹고 나머지 한그릇은 모자(母子)가 나눠 먹는다. 국밥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모자는 아쉬운 듯 숟가락을 든 채 남편이며 아버지의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뜻 한 그릇을 더 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 남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세 식구가 천 원짜리 국밥 두 그릇으로 외식을 마치고 일어서는 모습에서 나는 찡힌 아픔을 느껴야 했다. 순대집에서 만난 그 어린이는 30여 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 닷새마다 돌아오는 오수 장날이면 어머니는 나에게 국밥 한 그릇을 사주시곤 하셨다. 그 무렵 국밥은 가난한 시골사람에겐 최고의 영양식이었다. 불고기며 로스구이, 삼겹살, 삼계탕같은 영양식이 오늘날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30여 년 전의 그 국밥맛이 그리울 때면 나는 순대집을 찾곤 한다.
옛날 우리 동네엔 방죽골대부란 분이 있었다.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던 그분은 오수 장날이면 어김없이 부부동반으로 30리길을 걸어가서 국밥을 먹곤 하였다. 그들 부부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한 세대 이전에 우리 동네의 화제거리였던 그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추억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요, 삼복더위를 적셔주는 시원한 한줄기의 소나기다.
추억은 빡빡한 삶을 윤기있게 가꿔주는 윤활유요, 낭만적인 생활의 여백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소중한 무형의 재산이다. 오늘의 생활 속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는 온갖 일들은 먼훗날 나의 삶을 풍요롭게 꾸며줄 추억의 저축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바쁜 하루하루의 일과를 기쁨으로 맞이하려 노력한다. 잔뜩 먹을거리를 먹고 난 늙은 소가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는 그 정경을 머리속으로 그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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