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직공이 되라 / 김지찬 ![](http://blogimgs.naver.com/imgs/nblog/spc.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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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神大學校 神學大學院
THE PRESBYTERIAN ASSEMBLY TEHOLOGICAL SEMINARY
* “언어의 직공이 되라”를 읽고 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성경해석의 비결을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성경본문을 자세히 읽는 것(Closing reading)으로 시작하라고 권고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으로 혼합주의 신학의 모습을 띄는 바 상당한 호소력을 주고 있다. 특별히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성경 기자의 언어 형식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이는 구약성경을 “Narrative”로 인식하여야 하므로 “언어의 능숙한 직공”으로서의 성경저자를 이해하고 있다. 때문에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자세히 읽을 뿐 아니라, 성경 언어의 표현과 형식을 깊이 이해하는 통찰력이 필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플로베르는 ‘一物一語說’을 통하여 어떤 이론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상으로 더 자세한 연구와 관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5가지 용법이 있는데, 정보적,인식적,지령적,표현적,친교적 기능을 가진다. 언어의 이런 다양한 용법은 각기 개별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주로 다른 용법과 연계되어 사용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 어떤 용법이 주도적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살표보아야 올바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정보적,인식적,지령적,표현적,친교적기능등).
더욱이 성경의 언어는 함축적이며 다중적이므로 상징과 이미지와 은유와 환유와 알레고리와 비유와 이야기(Narrative)와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해석자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작업은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부에서의 소리와 의미라는 제목으로 소리는 이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중립적 용기가 아니라, 의미 전달의 핵심 채널임을 살펴보고,특별히 발음상의 테크닉,비유적 언어,수사법,유사발음 반복기법,동음이의어 반복 테크닉,각운,두운,압운등에 대하여, 그리고 3부에서는 비유적 언어와 의미,비유적 언어의 기법인 직유,은유,환유,제유,의인법,상징,알레고리,4부에서는 수사법과 의미라는 제목으로 아이러니,풍자,과장법,패러디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를 성경을 찾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소리에 유의함에 대하여 - 성경 본문의 발음 차원은 의미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발음상의 여러 기교나 테크닉은 단지 장식물이 아니요, 심미적인 효과와 의미 전달의 중요한 수단이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경을 ‘미크라(Reading aloud)’라고 부르는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라 하겠다.
특별히 이의 주의성에 대하여 유사발음 방법을 통하여 의미전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아룸(간교함)과 에롬(지혜로움)’의 유사 소리 반복은 인간의 독자적인 지혜 추구가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수치심)을 잘 지적하고 있다.
엘로힘 이르에(하나님이 보시리라)와 예레 엘로힘(하나님 경외자)의 반복은 이삭을 바치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하나님이 보시리라”는 비젼을 가지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경외자”라는 칭찬과 함께 이미 준비한 어린 양을 제공하시는 축복을 강조하고 있다. 발음의 유사성은 단순한 언어의 장식이 아니라 의미 전달의 핵심적 장치임이 드러난다.
야곱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물건까지 도적질하는 범죄를 아캅과 카바의 sound play 로 구상화는 성경 기자의 솜씨는 놀랍다. 아모스가 본 여름 과실 한 광주리 카이츠와 케츠의 발음의 유사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말과 파멸에 충격적 인식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유사발음 단어 반복은 성경저자의 전달효과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성경을 더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함으로 성경연구에 있어서 원어적 연구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동음이의어 반복에 있어서는 삼손의 예를 통하여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사자에게서 나온 꿀”이라는 수수께끼 해답 속에서 ‘아리’가 모두 사자와 꿀의 동음 이의어라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는 삼손이 낸 문제 자체가 하나의 시요 노래의 형태이다. 이의 연구를 통하여 삼손과 블레셋과의 수수께끼 싸움, 삼손의 약함,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다. 즉 삼손과 블레셋,들릴라의 사건 속에서 동음 이의어 반복(바라크-복,무릎)의 이해없이는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특별히 동음 이의어 반복효과의 놀라운 사건은 ‘티그파’에서 본 내용 비교이다. ‘줄’이란 뜻을 통해 붉은 줄(수2:18,21)을 통해 라합과 아간의 어리석음을 부각시킨 대조적 인물은 대단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즉 호세아의 이스라엘 역사를 ‘아간의 길’과 ‘라합의 길’사이의 진자운동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성경 기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심화시키고 강화하며, 세미한 뉘앙스를 부가하는 언어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 알레고리 해석의 오류를 벗어나면서 성경저자의 의도와 강조를 정확하게 파헤치는 놀라운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이해에 있어서 또다시 강조할 부분은 “비유적 언어”이다.
성경은 종교적 문헌이면서 동시에 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글이다.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위에 근거해 있으면서도 독자를 설득시키는 능력은 어떤 세계 문학 고전보다 탁월하다. 이는 귀납적 명제를 통해서 할 수 있다. 직유에 유의하는 것도 탁월한 언어의 표현이다. 이러한 직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해 내야 한다.
‘메뚜기의 공포’ 곧, 메뚜기 직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공포를 주입하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대표적인 직유의 효과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로 들 수 있다. 즉 “의는 하나님이 그것의 마르지 않는 원천인 까닭에 거대하고 힘차게 흐르는 물길이다”를 강조한 이같은 표현은 성경만이 가질 수 있는 놀라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슷한 표현으로 은유적 표현이다.
이런 은유적 표현에서 오해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하늘의 개념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란 물리적 하늘이 아니라 개념적인 하늘이란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있어서 은유적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특별히 강조한 것 가운데 하나는 환유적 해석의 중요성 인식이다.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삼하11:8)에서 발 씻음은 휴식,포식과 과음,동침으로 연결되는 전체의 과정을 대치하는 환유인 셈이다.
또한 환유가 갖는 종교적 기능은 대단한 것이다. 레이코프와 존슨이 주장한 예를 든 ‘비둘기로 성령을 대신함(Dove for Sprit)의 환유는 서양 문화 속의 비둘기에 대한 개념과 기독교 신학 속의 성령에 대한 개념에 토대를 둔다.
이러한 환유에 대하여 무감각했던 그동안의 성경 해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환유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자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환유적 방법과 함께 고려할 것이 바로 제유적 표현의 유의이다. 환유의 기본 핵심이 ‘대처’라면 제유의 기본 핵심은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구별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지 않으나 ‘일손’이라는 제유를 통해 이해를 돕고 있다. 성경에서는 창3:19의 ‘네가 얼굴(파님)에 땀이 흘야 떡을 먹고’의 내용을 통해 떡을 음식의 부분이면서 전체를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제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록된 것이 바로 에센파의 안식일 성수에 대한 문제이다. 안식일에 아무런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레23:7-8;민28:18참조), 특정한 일,즉 노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일 뿐이다. 그러나 에센파는 이러한 제유법에 대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지나친 사고와 행동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오늘날 주일성수에 대한 문제가 얼마나 논쟁이 되고 있는가?
오히려 자유함보다는 올무와 위선이 되어서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인 구원과 생명의 삶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의인법의 유의’를 통하여 의인법이 그저 유치한 수준에서 표현된다는 사용법에 대하여 주의를 요하고 있다.
성경해석에 있어 의인법은 실로 다양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벨의 핏소리’를 통하여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동정을 드러내는 청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는 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막아야 할 최우선 과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는 의인법에서나 가질 수 있는 성경 저자의 고도의 표현기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징의 유의는 무엇인가?
은유가 “A는 B”라는 도식적 개념을 얻을 수 있으나 성경해석에 있어서 은유는 상당히 포괄적이다. 즉 형태적으로 원개념을 드러내지 않지만, 상징은 전적으로 원개념을 은폐한다. 은폐의 강조를 더한 것이 바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상징일수록 원개념은 끝까지 내러티브 후면에 암시로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상징으로 인하여 성경의 해석이 다양해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4:12의 “나의 누이,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에서 단순한 은유적 표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잠근 동산’이라는 성적인 상징을 통하여 아가서에서의 상징표현은 신비의 세계에 대한 암시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읽은 루 안드리아스 살로메의 ‘나의 신부여,나의 누이여’라는 제목은 아가서에서 따온 제목의 책이었다.
여기에서 살로메는 릴케의 연인으로, 또한 당시 세계적인 문학가,철학가의 연모하는 애인이었다. 그러나 살로메는 자신의 나르시스와 정신적 불만족으로 인하여 평탄치 못한 결혼 생활과 누구와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방랑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은유적 표현은 세기적 연인이요, 가까이 할 수 있는 여인이나, 결국 어디서나 만족하지 못하고 가까이 하면 멀어지는 여인인 살로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라 할 것이다.
알레고리에 대하여 저자는 자의적인 영해의 단계가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비유(씨 뿌리는 이야기,악한 농부 이야기)를 통하여 숨은 의도를 찾고자 노력한다. 이는 케어드의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알레고리화)의 세계를 구분함으로 저자의 표현 기교를 통하여 숨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해석에 있어서 수사법과 아이러니,풍자,과장법에도 많은 유의와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특별히 패러디에 대한 유의는 상당한 고차원적인 표현기교라 할 수 있다.
‘애굽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성경은 가나안을 의미하나, 다단과 아비람은 애굽을 빗대어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조롱하고 있다. 이러한 자의적 패러디로 인하여 식구들과 함께 땅 속에 빠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데 이것은 패러디에 유념함으로 얻을 수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아모스의 “벧엘로 오라”,그리고“범죄하라”의 아이러니는 제사장들의 예배에의 부름을 패러디화하여 비웃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를 오늘날 설교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교회로 와라,죄를 지어라’라고 이야기 한다면 상당한 역효과를 발할 수 있겠으나, 아모스시대의 죄악성을 살펴볼 수 있는 대단한 함축성을 가진 표현이라 할 것이다.
결국, 저자가 “언어의 직공이 되라”라는 책을 통하여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제목 그대로 성경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성경저자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적 테크닉과 원어 연구와 본문을 자세히 읽음으로 본래 의미를 밝히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데서 출발되어 성경 저자와 같이 언어의 직공이 됨으로 상상력과 언어연구,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통하여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저자의 주장은 성경을 언어의 기술과 기교와 연습단계를 뛰어 넘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인격적 감화력을 요구하는 차원에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음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내러티브’에 대한 오해를 벗음으로, 오히려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 언어의 직공이 되라 내용 요약 및 서평
저자인 김지찬 교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라는 책은 “자세히 읽기” 시리즈를 선언함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접근하고자 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성경 해석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문을 자세히 읽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다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되씹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경 기자가 표현한 소리의 기교와 비유적 언어와 수사법에 능한 언어의 장인인임으로 그것을 자세히 읽고, 연구하고,언어의 표현기법을 아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1부 (서론)-루터의 권면, 제2부-소리와 의미,제3부-비유적 언어와 의미,제4부-수사법과 의미, 제5부(결론)-언어는 존재의 집 등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제1부에서는 플로베르의 一物一語說와 비교하여 성경 언어는 그 이상의 5가지 용법을 갖는다고 하였다.
정보적,인식적,지령적,표현적,친교적 기능을 가짐으로 어떤 용법이 주로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 올바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 언어는 함축적이며 다중적이다.
성경은 단지 사상들과 개념들의 집합만이 아니다. 오히려 상징과 이미지와 은유와 환유와 알레고리와 비유와 이야기와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성경기자가 탁월한 시인과 수사학자인 만큼, 성경 해석자인 독자도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특별히 역사적으로 성경해석자들의 모습을 볼 때 그들은 시인과 수사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오늘날 성경해석자들의 자격요건을 요구하고 있다.
제2부에서는 소리와 의미를 통하여, 유사 발음 반복,동음 이의어 반복,각운,두운,모운에 유의할 것을 강조한다.
아룸과 에룸의 유사 소리 반복은 인간의 독자적인 지혜 추구가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엘로힘 이르에(하나님이 보시리라)와 예레 엘로힘(하나님 경외자)의 반복은 소리의 유사성으로 인해 이 둘 사이의 새로운 유기적 질서를 수립함으로써 유사성으로 인해 이 둘 사이의 새로운 유기적 질서를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아캅과 카바의 사운드 플레이와 아모스가 본 여름 과실 한 광주리의 시각적 이미지와 카이츠와 케츠의 발음의 유사성은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의 종말과 파멸에 대한 충격적 인식을 가능케 하였다. 발음의 효과적 기법과 아이러니를 통하여 강조된 본문을 잘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2부에서 새롭게 얻을 수 있었던 있었던 성경 이해는 동음 이의어 반복과 각운,두운,모운에 유의하라였다.
이를 통하여 삼손의 성경내용을 더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그동안 위의 내용을 얼마나 자구적으로 해석하였는가?
삼손은 언어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표현함으로 자신의 의도한 내용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복’과 ‘무릎’의 표현은 에로스에 약한 삼손을 보여 주는데, 이는 ‘바라크’와‘베레크’의 동음 이의어 반복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소리의 동일성은 서로 떨어진 이 두 사건을 연결시키며, 하나님의 복주심과 들릴라의 행동을 대조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복주심이 한 여인에 의해 무산될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또한 호세아의 ‘아골 골짜기’와 ‘환란의 골짜기’는 아코르의 동음 이의어 뜻을 통하여 ‘환란’의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성경 저자의 탁월한 언어 직공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 3부에서는 비유적 언어,직유,은유,환유,제유,의인,상징,알레고리에 유의함을 강조한다.
성경은 종교적 문헌이면서 동시에 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글이다.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위에 근거해 있으면서도 독자를 설득시키는 능력은 어떤 세계 문학 고전보다 탁월하다.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이러한 언어적 장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한 내용의 명제가 바로‘귀납적’ 명제요, 그것이 바로 위와 같은 수사법에 주의를 요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약 성경을 ‘내러티브’의 관점을 통하여 더 깊은 성경의 배경과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저자의 성경해석의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직유는 생각을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만들어 큰 효과를 나타내는 표현 장치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아낙 자손,메뚜기 같다고 직유함으로 공포를 극명하게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직유는 ‘공법을 물같이,정의를 하수같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아모스가 꿈꾸는 이상 사회의 열정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은 또한 은유를 중요하게 여기고 표현하였다.
특별히 은유의 오해에서 생겨난 것이 ‘하늘의 개념’이다.
잘못이해하면 하늘의 개념을 물리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천국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늘을 물리적 하늘이 아닌 개념적인 하늘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은유적 표현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환유법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이는 제유법과 연계해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환유는 사람의 사고,태도,행동을 구조화하기 때문에 그 효과에 있어서 탁월하다.
아7:2의 술람미 여인의 배꼽표현을 통해 제유로 이해하면 알레고리의 해석이 될 수 있고,환유로 이해하면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가르키게 된다.
따라서 환유의 기본 핵심은 ‘대치’요, 제유의 기본 핵심은 ‘대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성경은 또한 의인법의 형식을 빌어 세계의 현상들을 인간적 관심사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인간적 해결 방식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땅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핏소리는 그 대표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상징은 원관념을 감추고 보조관념만을 내세운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아4:12)에서 ‘잠근 동산’은 처녀를 상징하고 있다. ‘덮은 우물’은 이스라엘 여인의 정숙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른 해석도 언급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상징의 해석을 어떻게 수렴해야 하는가의 관점에서 오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상징에 있어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은유를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상징과 성격이나 형태가 유사한 표현 장치로 알레고리를 들 수 있다.
알레고리는 “속뜻을 감추고 다른 사물을 내세워 그것으로 하여금 감추어진 속뜻을 말하게 하는 표현 장치”를 이야기 한다.
이는 중세시대의 ‘풍유적 해석’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알레고리의 요소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제이션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삼하12:1-4에서 나단의 비유를 통하여 다윗의 죄악을 꺼집어내는 과정은 알레고리만이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표현이다.
그동안 알레고리 해석을 지나치게 의존한 해석 방법과 또한 곡해하여 이해하였던 알레고리의 터부시함에 대한 오해를 없애는데 귀중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는 직설적인 표현이 아닌 우회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에이론과 알라존(희극에서의 등장)의 예를 들어 아이러니의 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를 형성시키는 원리는 우주적이고,세계적이고,인생론적이다. 이러한 표현이 성경에도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삼하6:20 이다.
미갈의 다윗의 대한 비아냥(6:16)은 아이러니를 사용해서 직설법의 비난보다 경멸의 강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대표적인 아이러니의 표현은 엘리야의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왕상18:27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알라존의 입장으로, 엘리야는 에이론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들을 비판하는 엘리야가 얄밉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시침을 떼고 있기에 반격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아이러니이 매력이요 효과다. 이에 바알 선지자들이 광란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의 효과인 것이다.
아이러니와 함께 이해되어야 할 유의점이 바로 ‘풍자’임을 가르쳐 준다.
아이러니가 은폐의 수단으로 성립되는 것에 비해 풍자는 보다 노골적이라 할 수 있다.
프라이는 풍자의 두 요소, 유머와 공격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풍자가 많다. 그 이유를 저자는 성경이 산출된 이스라엘의 문화가 수치 지향적인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 속에서 범죄는 비판,모욕,거절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가장 무서운 것이 조롱이다.
이런 모습을 찾는데 대표적인 성경은 욥12:4의 욥의 경우이다.
또한 현실 비판으로서의 풍자를 통해 성경기자의 주요 무기로 풍자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드라빔의 내용에서는 우상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섞여 있음을 발견한다(창31:34-35).
이 밖에도 음식을 탐한 이삭,성을 풍자한 예레미야(3:9)내용, 현실 직시를 가능케 하는 풍자등을 통하여 잘못이나 모순을 빗대어 웃으며 폭로하는 수사법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 기교를 잘 파악하며 발굴해 냄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려는 성경 기자들의 의도를 잘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은 또한 과장법의 사용을 적절하게 함으로 표현 의도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과장법을 잘못 이해할 때에 독자로 하여금 혼동과 절망을 안겨줄 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의인이 없다”는 예레미야의 고백이다. 이는 사실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실의 의미에 대한 관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인간 행동의 의미는 통계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내용중,“한 사람의 영혼을 구한 사람은 전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랍비의 말을 통하여 과장법에서 얻는 진실함의 효과는 극대화 되는 것이다.
라멕의 교만, 다윗과 사울의 “천천이요,만만이라”의 표현,독수리보다 빠른 발의 소유자등은 과장법의 효과를 노린 표현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숨은 저의를 드러내는 과장(삼하19:6)이 있는데, 이는 요압의 말을 통하여 자신의 저의를 은근히 나타내는 표현은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러므로 숨은 내용을 찾아내는 방법은 자세히 본문을 연구하고, 표현기교를 살펴보며,강조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과장법은 허위나 비진실을 날조하려는 것이 아니라,전달하려는 개념이나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외시 의미로는 거짓이나,함축 의미로는 우리에게 눈에 안 보여 잊어버리기 쉬운 것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진실의 언어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또한 과장법은 말하는 이의 숨은 저의와 감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쓰인 과장법을 찾아 내는 것은 본문의 함축 의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글을 읽고 나서
“언어의 직공이 되라”를 읽고 난 가장 큰 수확은, 성경의 의미를 본래 의미대로,그리고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삼손에 대한 성경 구절은 당시 히브리식 표현을 발견치 못하면 얻어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삼손은 단지 힘이 센 사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탁월한 시인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으로 수수께끼와 삼손의 약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구약 성경의 이해 속에서 ‘ 내러티브’의 관점을 발견케 되었다.
이는 서철원 교수의 ‘내러티브 부정론’에 대한 시각에서 벗어남으로, 성경의 내용을 오히려 강조하는 시각으로 시야를 바꿔 주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 표현 의도의 배경, 귀납적 연구,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저자의 숨은 의도등을 캐어냄으로 오늘날 독자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성경에 있어서(특별히 구약성경에 있어서) 그 풍부한 내용을 해석하며, 이해하며, 전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성경을 더 깊이 보고자 하는 방법과 욕구를 일으켜 주었고, 성경 저자의 언어의 직공과 같이 오늘날 해석자들이 갖추어야 할 언어적 자질능력을 더욱 더 키워야 한다는 각성을 갖게 되었다.
왜 국어공부를 잘 해야 하는지, 왜 원어 연구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 왜 성경을 자세히 읽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이 책의 시리즈에 대하여 기대를 하면서 성경본문 연구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함을 인식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고 할 것이다.
저는 이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다.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것을 보기로 하였다. (요약) 그러나 그 사람들의 글에는 교수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 를 읽고 난 그들의 감동은 참으로 대단하였다고 생각이 들었습다. 그래서 이 책이 얼마나 잘 되어 있기에 그러한 극찬을 하였을까 하여 저도 책을 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역시 잘 샀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말은 교수님께 아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수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는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성경 기자와 같은 언어의 직공이 되라고 권면 한다고 봅니다. 흔히 성경은 문학의 백미라고도 하는데, 이는 잘된 표현과 좋은 글 표현 매개인 언어를 능숙하게 이용한 결과이다. 언어를 이용한 문예 작품 뿐만 아니라 모든 표현 예술이 그렇듯이, 결국, 성경 기자는 이런 면에서 언어의 능숙한 직공이라는 것이다.
이 탁월한 교수님의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성경 기자가 사용한 발음상의 테크닉과 비유적 언어 그리고 수사법이 어떤 것인가를 살핀다. 2부에서는 소리와 의미라는 제목으로 소리가 의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중립적 용기가 아니라, 의미 전달의 핵심 채널임을 밝힌다. 특별히 유사 발음 반복 기법과 동음이의어 반복 테크닉, 각운, 두운, 압운에 주의를 기울인다. 3부에서는 비유적 언어와 의미라는 제목 하에, 성경 기자가 사용한 비유적 언어의 기법인 직유, 은유, 환유, 제유, 의인법, 상징, 알레고리 등을 다루게 될 것이다. 4부에서는 수사법과 의미라는 제목으로 아이러니, 풍자, 과장법, 패러디를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책이 추구하려는 목적은 한 가지이다. 성경 기자가 탁월한 시인과 수사학자인 만큼, 성경 해석자인 우리도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 말씀에 대한 연구의 의지와 열정이 아무리 있어도 성경의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말씀의 의미를 밝혀내기가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이 해 보았다. 반면에 목회자들이 성경의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잘 몰라서 말씀을 그릇되게 전달을 하는 것을 생각 할 수 있으며, 그리고 함축적인 의미를 알아내며, 진정한 설교의 프로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1부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라”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많은 것을 생략한 함축적인 글”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장만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할 때 성경은 지극히 평면적인 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했듯이 성경을 살필 때 성경 기자의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읽고 또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는 것은 성경이 그 의미 전달에 있어서 외시 의미보다는 함축 의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번 읽고 나면 더 이상 음미할 것이 없어지는 3류 소설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느끼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도 중요하다. 또한 이 말에 많은 확신을 얻었다. 어제 읽을 때가 다르고, 오늘 읽을 때가 다르고, 내일 읽을 때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고백한 것 같다. 특별히 성경의 깊이 숨어 있는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또 많이 읽고,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리에 유의하라”는 것으로 2부가 시작된다. 정말 유익한 내용이다. “성경 본문의 발음 차원은 의미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발음상의 여러 기교나 테크닉은 단지 장식물이 아니오, 심미적인 효과와 의미 전달의 중요한 수단이다. 현저한 청각상의 발음 효과는 독자로 하여금 본문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며, 특정한 순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본문 전체의 효과를 돕는 기능을 감당함으로써, 저자가 전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여기에서 성경 본문을 원어로 소리내어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중요한 지적이다. 사실 원어 연구를 소홀히 한 나에게 이 지적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려 왔다.
“유사 발음 반복(paronomasia)에 주의하라”는 장에서 엘로힘 이르에(하나님이 보시리라)와 예레 엘로힘(하나님 경외자) 사이의 발음의 유사성은 이 둘 사이에 유기적인 질서를 새로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으로 인생을 보게 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두 단에의 반복을 통해서 이 두 단어에 의해 언급되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을 가리키도하고 대조를 나타내기도 하는 기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음이의어 반복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고추잠자리가 생각나는 데 꽤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장에서는 삼손의 복주심(바라크)과 들릴라의 무릎(베레크)을 비교하면서 여호와의 ‘복’을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사랑의 불장난을 하면서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삼손의 예를 동음이의어 반복이 주는 큰 효과로서 제시하고 있다.
“각운, 두운, 모운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공당무답의 예화인 “공자와 당” 자로 끝내기로 한 예화는 매우 인상 깊었다. 이것은 분위기를 창출하고 주제를 표출하면서도 메시지 전달의 효과를 높이는 강력한 기능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적 언어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스킬러 베익스의 글이 인상적이다. “비유들은 이 세상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아니 이 세상 속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일상적인 방법과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실질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결국 과거의 언어를 새롭게 사용하는 것으로써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비유이다. A라는 말이 B를 가리키도록 사용하면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 예가 “산소와 같은 여자” 라는 광고 문고이다.
“직유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메뚜기 공포는 직유가 대단한 위력을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했다. 여기에서 직유란 소나기 효과라고 언급된다. 직유는 또한 추상적인 주제를 명백히 하고 주제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한다.
“은유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라는 문구에서 은유의 힘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은유는 직유보다 밀도가 강하며, 은유는 새로운 인식을 표출하고 새로운 세계를 축조하며 특정한 정서의 전이를 가능케 하는 탁월한 언어 장치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환유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특히 환유와 제유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다른 어떤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하는 비유법을 대유법이라 하는데 이것을 세분화하면 제유와 환유로 구분한다. 제유는 사물의 일부로서 그 사물 자체의 전체를 대표하게 하거나 전체로서의 부분을 대표하게 하는 기법이요, 환유란 사물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 표현하는 기법이다. 제유의 기본 핵심이 ‘대표’라면 환유의 기본 핵심은 ‘대치’이다. 환유의 예를 살펴보면 ‘군대에서 별이 떴다’라는 표현은 비행 접시의 등장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표현이다. 환유의 해석에 있어서 ‘배꼽’이야기는 제유로 할 때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배꼽을 환유로 해석할 때 여인의 은밀한 부분으로 대치되는 것이고 제유로 해석하면 배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시각 속에서고 찾아볼 수 있는데 자기와 상관없는 여자의 배꼽은 제유로 해석하고 자기와 친분이 있는 여자의 배꼽은 환유로 해석하는 이러한 문화는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라 하겠다. 이러한 환유의 또 다른 이야기가 성경의 다윗의 범죄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쟁에서 돌아온 우리아에게 “너는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어라”고 다윗은 재촉한다. 여기서 발을 씻는 것은 환유로 밧세바와 동침하라는 숨은 뜻이 있다 하겠다.
“제유에 유의하라”에서 떡은 단지 떡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의 부분으로서 전체인 음식을 대표하는 것이다. 얼굴도 마찬가지로 제유법으로 쓰인 경우이다. 또한 보아스가 룻과 말하면서 ‘모든 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 성문은 삶의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문이란 한 도시나 마을을 대표하는 제유적 용법으로 쓰인 것이다.
“의인법에 유의하라”에서 강조하는 것은 의인법을 통하여 세계의 현상들을 인간적 관심사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인간적 해결 방식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땅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핏소리는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동정을 드러내는 청각적 이미지이다.
“상징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반가운 소식이 있다는 것이고 훈장은 군인과 운동 선수에게 큰 영광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상징은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상징은 전인격에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가서의 ‘잠긴 동산’은 그 상징성을 처녀에 두고 있으며 성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상징은 새로운 미래를 가능케 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는 이사야의 메시지는 좋은 상징의 예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사막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길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절망 가운데 소망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막은 갱신의 장소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쳐지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홍해의 상징성도 기억할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홍해는 죽음의 땅인 애굽과 산 자의 땅인 가나안 사이의 경계선으로서 우리 삶의 형성에 중요한 것이다. 상징의 중요성을 조엘 그린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상징의 신비한 세계를 여는 열쇠는 논리적인 분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을 볼 때 마치 그림책이나 장편 영화를 보듯이 그림 속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이러한 훈련이 합리적 사고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석을 하기 전에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에 우리는 상징을 통해서 성경 본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알레고리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알레고리는 저자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알레고리제이션은 원래 저자가 의도하지도 생각지도 않은 숨은 의미를 억지로 위에 부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의해야할 것은 알레고리제이션이지 알레고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특별히 나단이 다윗에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사건에서 나단의 비유는 정말 뛰어난 알레고리이다.
“수사법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언어가 단일 의미체가 아니라 다중 의미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광고가 신호 반응을 일으키도록 제작되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장에서 특히 눈에 뛰는 것은 성경도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기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에 주의하라”는 장에서는 아이러니와 역설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는 표현 자체는 모순이 없는데 반해 역설은 진술 자체가 모순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구조적 아이러니에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날’이다. 행운이 길어질수록 불행의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를 예감하는, 기막힌 인생의 한 장면을 슬픈 빛깔로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풍자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아브람스의 풍자에 관한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주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거기에 대한 재미, 멸시, 분노, 냉소 등의 태도를 환기시킴으로써 그것을 격하시키는 문학적 기법을 말한다. 희극은 웃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유발하지만, 풍자는 조소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는 구별된다. 즉 풍자는 웃음을 무기로써 사용하고, 그것으로써 작품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과녁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 정의를 요약하면 풍자는 “문예적 도구를 통한 역사적인 인물과 상황 혹은 도덕적 죄에 대한 공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알 세불의 이름, 드라빔의 예는 우상의 무능함을 폭로하고 인간이 신을 구해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젊은 암 약대를 비유한 이스라엘의 행음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암 약대처럼 예측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과장법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과장법은 허위나 비 진실을 날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개념이나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야곱이 레아를 미워했다는 표현은 덜 사랑했다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고,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에서 미워한다는 뜻은 하나님 나라 보다 덜 사랑해야 한다는 과장법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패러디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패러디는 어떤 대상을 회화화하여 날카롭게 풍자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아모스의 벧엘 예배는 패러디화 되어 비웃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비꼬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헤립의 패러디 또한 그의 교만이 어떻게 종말 되어져 독자들에게 실소를 터트리게 하고 있다. 욥에 대한 지나친 하나님의 관심은 현실과 이상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우주의 스크루지 하나님을 풍자화 한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언어의 직공이 되라”에서 주장하는 것은 결국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것이다. 교수님은 성경 기자가 언어적 설득 장치들을 탁월하게 구사한 언어의 장인이라면, 우리는 이를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제안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 기자는 탁월한 언어의 장인이었다.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곡진하고 실감나게 하기 위해 언어와 치열한 싸움을 한 언어의 대가라고나 할까! 그저 사상이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중립적인 전달의 용기로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성경 기자는 그저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의 합산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 기계적 필사자들이 아니었다.
둘째,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기자가 사용한 언어 장치들을 통해 그가 본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성경을 상상력을 진리를 알고 표현하는 가치 있는 방편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허구를 창조하는 공상(imaginary)이 아니다. 이성과 감정을 종합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상상력(imaginative)을 의미한다. 진리는 오직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미지와 상징과 은유를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셋째, 이런 상상력을 소유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와의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은 일생 동안 언어의 집에서 살 수 밖에 없다. 해석의 대상인 성경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해석자는 이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여,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성경 해석자는 평생 언어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 그가 작업하는 재료가 언어인 이상 언어에 대한 이해와 습득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넷째, 언어의 직공이 되려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평생 성경이라는 언어의 집에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언어는 존재의 집임을 깨닫고,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긴장과 경계선의 자리에 서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 해석의 문제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선택을 요구하는 삶과 행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직공이 되는 것은 삶의 직공이 되는 것이다.
결론
서론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언어의 직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공의 장인은 하루아침에 완벽한 장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초급 기술자, 중급 기술자를 거처서 만이 고급 기술자가 될 수 있듯이, 즉 하나하나의 단계를 거쳐야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 언어의 직공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는 우리 각자의 ‘언어 직조 공장’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경영주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그 분의 말씀을 다루는 자(일꾼)일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영을 이루게 하시고, 성취케 하시는 하나님을(잠16:3) 우리는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각자 ‘언어의 직조 공장’을 운영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것이다(시119:18). 우리의 눈이 열릴 때(시19:10)주의 말씀이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 것이며, (시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라는 고백과 같이 우리는 주의 법의 귀한 것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진정한 언어 직조의 달인(達人)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이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글에는 교수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 를 읽고 난 그들의 감동은 참으로 대단하였다고 생각이 들었습다. 그래서 이 책이 얼마나 잘 되어 있기에 그러한 극찬을 하였을까 하여 저도 책을 사기로 하였습니다. 역시 잘 샀다고 생각이 되며, 교수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 는 먼저 결론적으로 말을 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성경 기자와 같은 언어의 직공이 되라고 권면 하는 것 같다. 흔히 성경은 문학의 백미라고도 한다. 이는 잘된 표현과 좋은 글은 표현 매개인 언어를 능숙하게 이용한 결과이다. 언어를 이용한 문예 작품 뿐만 아니라 모든 표현 예술이 그렇다. 결국, 성경 기자는 이런 면에서 언어의 능숙한 직공이라는 것이다.
교수님의 책을 볼 때 전체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에서는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성경 기자가 사용한 발음상의 테크닉, 비유적 언어, 수사법이 어떤 것인가를 살핀다. 다음 2부에서는 소리와 의미라는 제목으로 소리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중립적 용기가 아니라, 의미 전달의 핵심 채널을 밝힌다. 특별히 유사 발음 반복 기법과 동음이의어 반복 테크닉, 각운, 두운, 압운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다음으로 3부에서는 비유적 언어와 의미라는 제목 하에, 성경 기자가 사용한 비유적 언어의 기법인 직유, 은유, 환유, 제유, 의인법, 상징, 알레고리 등을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수사법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아이러니, 풍자, 과장법, 패러디를 살펴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책이 추구하려는 목적은 한 가지이다. 성경 기자가 탁월한 시인과 수사학자인 만큼, 성경 해석자인 우리도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 말씀에 대한 연구의 의지와 열정이 아무리 있어도 성경의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말씀의 의미를 밝혀내기가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이 해 보았다. 진정 설교를 잘 해야 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라”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많은 것을 생략한 함축적인 글”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장만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할 때 성경은 지극히 평면적인 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했듯이 성경을 살필 때 성경 기자의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움을 느끼는 것은 성경이 그 의미 전달에 있어서 외시 의미보다는 함축 의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번 읽고 나면 더 이상 음미할 것이 없어지는 책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느끼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도 중요하다. 또한 이 말에 많은 확신을 얻었다. 어제 읽을 때가 다르고, 오늘 읽을 때가 다르고, 내일 읽을 때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고백한 것 같다. 특별히 성경의 깊이 숨어 있는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또 많이 읽고,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리에 유의하라”는 장으로 2부가 시작된다. 정말 유익한 내용이다. “성경 본문의 발음 차원은 의미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발음상의 여러 기교나 테크닉은 단지 장식물이 아니고, 심미적인 효과와 의미 전달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현저한 청각상의 발음 효과는 독자로 하여금 본문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며, 특정한 순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본문 전체의 효과를 돕는 기능을 감당함으로써, 저자가 전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여기에서 성경 본문을 원어로 소리내어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정말 중요한 지적이었다. 사실 원어 연구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이 지적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려 왔다.
“유사 발음 반복(paronomasia)에 주의하라”는 장에서 엘로힘 이르에(하나님이 보시리라)와 예레 엘로힘(하나님 경외자) 사이의 발음의 유사성은 이 둘 사이에 유기적인 질서를 새로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으로 인생을 보게 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동음이의어 반복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고추잠자리가 생각나는 데 꽤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장에서는 삼손의 복주심(바라크)과 들릴라의 무릎(베레크)을 비교하면서 여호와의 ‘복’을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사랑의 불장난을 하면서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삼손의 예를 동음이의어 반복이 주는 큰 효과로서 제시하고 있다.
“각운, 두운, 모운 법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공당문답의 예화 또한 매우 인상 깊었다. 이것은 분위기를 창출하고 주제를 표출하며 메시지 전달의 효과를 높이는 강력한 기능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적 언어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스킬러 베익스의 글이 인상적이다. “비유들은 이 세상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아니 이 세상 속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일상적인 방법과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실질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결국 과거의 언어를 새롭게 사용하는 것으로써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비유이다. A라는 말이 B를 가리키도록 사용하면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 예가 “산소와 같은 여자” 라는 광고 문고이다.
“직유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메뚜기 공포는 직유가 대단한 위력을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했다. 여기에서 직유란 소나기 효과라고 언급된다. 직유는 또한 추상적인 주제를 명백히 하고 주제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한다.
“은유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라는 문구에서 은유의 힘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은유는 직유보다 밀도가 강하며, 은유는 새로운 인식을 표출하고 새로운 세계를 축조하며 특정한 정서의 전이를 가능케 하는 탁월한 언어 장치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환유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특히 환유와 제유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다른 어떤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하는 비유법을 대유법이라 하는데 이것을 세분화하면 제유와 환유로 구분한다. 제유는 사물의 일부로서 그 사물 자체의 전체를 대표하게 하거나 전체로서의 부분을 대표하게 하는 기법이요, 환유란 사물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 표현하는 기법이다. 제유의 기본 핵심이 ‘대표’라면 환유의 기본 핵심은 ‘대치’이다. 환유의 예를 살펴보면 ‘군대에서 별이 떴다’라는 표현은 비행 접시의 등장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표현이다. 환유의 해석에 있어서 ‘배꼽’이야기는 제유로 할 때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배꼽을 환유로 해석할 때 여인의 은밀한 부분으로 대치되는 것이고 제유로 해석하면 배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시각 속에서고 찾아볼 수 있는데 자기와 상관없는 여자의 배꼽은 제유로 해석하고 자기와 친분이 있는 여자의 배꼽은 환유로 해석하는 이러한 문화는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라 하겠다. 이러한 환유의 또 다른 이야기가 성경의 다윗의 범죄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쟁에서 돌아온 우리아에게 “너는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고 다윗은 재촉한다. 여기서 발을 씻는 것은 환유로 밧세바와 동침하라는 숨은 뜻이 있다 하겠다.
“제유에 유의하라”에서 떡은 단지 떡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의 부분으로서 전체인 음식을 대표하는 것이다. 얼굴도 마찬가지로 제유법으로 쓰인 경우이다. 또한 보아스가 룻과 말하면서 ‘모든 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 성문은 삶의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문이란 한 도시나 마을을 대표하는 제유적 용법으로 쓰인 것이다.
“의인법에 유의하라”에서 강조하는 것은 의인법을 통하여 세계의 현상들을 인간적 관심사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인간적 해결 방식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땅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핏소리는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동정을 드러내는 청각적 이미지이다.
“상징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반가운 소식이 있다는 것이고 훈장은 군인과 운동 선수에게 큰 영광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상징은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상징은 전인격에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가서의 ‘잠긴 동산’은 그 상징성을 처녀에 두고 있으며 성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상징은 새로운 미래를 가능케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는 이사야의 메시지는 좋은 상징의 예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사막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길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절망 가운데 소망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막은 갱신의 장소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쳐지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홍해의 상징성도 기억할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홍해는 죽음의 땅인 애굽과 산자의 땅인 가나안 사이의 경계선으로서 우리 삶의 형성에 중요한 것이다. 상징의 중요성을 조엘 그린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징의 신비한 세계를 여는 열쇠는 논리적인 분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을 볼 때 마치 그림책이나 장편 영화를 보듯이 그림 속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이러한 훈련이 합리적 사고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석을 하기 전에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에 우리는 상징을 통해서 성경 본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알레고리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알레고리는 저자의 숨은 의미를 ?아내야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알레고리제이션은 원래 저자가 의도하지도 생각지도 않은 숨은 의미를 억지로 위에 부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의해야할 것은 알레고리제이션이지 알레고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특별히 나단의 비유는 정말 뛰어난 알레고리이다. 나단의 마지막 지적은 정말 놀라운 알레고리이다.
“수사법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언어가 단일 의미체가 아니라 다중 의미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광고가 신호 반응을 일으키도록 제작되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장에서 특히 눈에 뛰는 것은 성경도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기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에 주의하라”는 장에서는 아이러니와 역설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는 표현 자체는 모순이 없는데 반해 역설은 진술 자체가 모순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구조적 아이러니에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날’이다. 행운이 길어질수록 불행의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를 예감하는, 기막힌 인생의 한 장면을 슬픈 빛깔로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풍자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아브람스의 풍자에 관한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주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거기에 대한 재미, 멸시, 분노, 냉소 등의 태도를 환기시킴으로써 그것을 격하시키는 문학적 기법을 말한다. 희극은 웃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유발하지만, 풍자는 조소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이 두가지는 구별된다. 즉 풍자는 웃음을 무기로써 사용하고, 그것으로써 작품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과녁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 정의를 요약하면 풍자는 “문예적 도구를 통한 역사적인 인물과 상황 혹은 도덕적 죄에 대한 공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알 세붑의 이름, 드라빔의 예는 우상의 무능함을 폭로하고 인간이 신을 구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젊은 암약대를 비유한 이스라엘의 행음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암약대처럼 예측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과장법에 유의하라”는 장에서는 과장법은 허위나 비진실을 날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개념이나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야곱이 레아를 미워했다는 표현은 덜 사랑했다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고,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에서 미워한다는 뜻은 하나님 나라 보다 덜 사랑해야 한다는 과장법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패러디에 유의하라”는 장에서 패러디는 어떤 대상을 회화화하여 날카롭게 풍자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아모스의 벧엘 예배는 패러디화 되어 비웃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비꼬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헤립의 패러디 또한 그의 교만이 어떻게 종말 되지 독자들에게 실소를 터트리게 하고 있다. 욥에 대한 지나친 하나님의 관심은 현실과 이상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우주의 스크루지 하나님을 풍자화 한 것이다.
맨 마지막 “언어의 직공이 되라”에서 주장하는 것은 결국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것이다. 교수님은 성경 기자가 언어적 설득 장치들을 탁월하게 구사한 언어의 장인이라면, 우리는 이를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제안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 기자는 탁월한 언어의 장인이었다.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곡진하고 실감나게 하기 위해 언어와 치열한 싸움을 한 언어의 대가라고나 할까! 그저 사상이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중립적인 전달의 용기로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성경 기자는 그저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의 합산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 기계적 필사자들이 아니었다.
둘째,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기자가 사용한 언어 장치들을 통해 그가 본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성경을 상상력을 진리를 알고 표현하는 가치 있는 방편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허구를 창조하는 공상(imaginary)이 아니다. 이성과 감정을 종합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상상력(imaginative)을 의미한다. 진리는 오직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미지와 상징과 은유를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셋째, 이런 상상력을 소유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와의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은 일생 동안 언어의 집에서 살 수 밖에 없다. 해석의 대상인 성경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해석자는 이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여,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성경 해석자는 평생 언어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 그가 작업하는 재료가 언어인 이상 언어에 대한 이해와 습득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넷째, 언어의 직공이 되려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평생 성경이라는 언어의 집에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언어는 존재의 집임을 깨닫고,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긴장과 경계선의 자리에 서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 해석의 문제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선택을 요구하는 삶과 행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직공이 되는 것은 삶의 직공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언어의 직공이 되어야 한다. 직공은 하루아침에 완벽한 장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초급 기술자, 중급 기술자를 거쳐야만 고급 기술자가 될 수 있듯이. 여기에서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언어의 직공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우리 각자의 ‘언어 직조 공장’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영주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그 분의 말씀을 다루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영을 이루게 하시고, 성취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 각자의 ‘언어 직조 공장’을 운영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것이다(시119:18). 우리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주의 법의 귀한 것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진정한 직조의 달인(達人)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언어의 직공이 되라”를 읽고
“ 기대 이상?”
나는 언어의 직공이 되라 라는 책을 한 번 밖에 읽지 못했다.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한 번 밖에 읽지 못했지만 이 짧은 지면을 통해서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느낌과 이 책의 저자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잠깐이나마 글로 쓰기를 원한다.
읽고 기대 이상이었다고 단적으로 말하고 싶다.
처음에 “언어의 직공이 되라”라는 책의 제목에서 좀 생소했다.
신학교에서 잘 익숙하지 않은 제목이 사실이었다. “언어”라는 단어에서 다른 신학 서적에서 느끼는 그런 마음을 끄는 제목이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그렇게 큰 기대 없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쉽게 읽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 같이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받았다. 반면에 먼가 여운을 남기게 했다. 그 여운이라는 것은 하나의 도전에 대한 초구라고나 할까 뭐 그런, 그래서 슬그머니 내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나게 만드는 책이었던 것 같다. 도대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부터 이 접근을 시작해야 하는가? 한편 두려움 속에 막연한 생각으로 고민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 대한 관심의 폭이 무한대로 넓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늘 성경의 토론이 조직신학에서의 성경관이 주제가 되었던 어제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에 황당하기까지 했다. 나는 4년의 신학부 과정에서 신학이라는 용어를 익혀 오면서 한가지 어려움을 느끼는 것 중에 한가지라면(많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에 대한 자료의 부족이었다. 시편을 시편답게 설교해 놓은 강해라든지, 주석이라든지, 참고 서적이 없었다. 왜 그럴까? 한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어의 직공이 되라”를 읽으면서 그럴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시편에 대해서 유명한 몇 편, 구속사를 예표하는 시편 몇 개 외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또 설사 있다고 해도 그렇게 시다운 감성을 돋우는 서적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서적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는 지금 단독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시편을 한편도 설교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편에 대한 자신이 없었고, 시편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또 그렇게 설교해도 될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유독 시편 뿐만은 아니었다. 역사서, 소선지서 등등이었다. 이런 고민의 해결과 동시에 새로운 성경의 언어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해주신 교수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어차피 이 싸움이 나 개인의 외로운 투쟁이겠지만 앞서서 길을 열어 주시는 분들의 노고 없이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인 것 같다.
“아부적 발언?”
한가지 이“ 언어의 직공이 되라”라는 교재를 읽고 책 자체에 대해서 아부적 발언을 해야 겠다. 책의 내용 편성이 참 잘되었다고 보았다. 제5부 결론:언어는 존재의 집- ‘19과 언어의 직공이 되라’라는 과는 대부분 다른 책에서 책의 앞부분에 편집을 해 놓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의 의도를 모르는 체 (책의 내용이 뒷부분에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내용을 접하면 괜히 오해하기 쉽고 반발하기가 일수인데 책의 저자의 정작 자기 주장을 제일 나중에 마무리함으로서 책의 내용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 반면에 저자의 마지막 도전에 ‘정말 그렇다’ 하는 속에서의 승복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의 감정이었다.
어쩌면 이 교재의 내용이라는 것이 옛날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볼 때 굉장히 지루하고 짜증나는 국어 시간의 내용과 같은 데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시사성 있는 단어의 접근은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이든다.
사실 설교도 이와 같아야 하는데 하는 자문 자답을 해 보면서...
“언어의 직공이 되라”라는 책을 읽고 소감문을 4-5page 작성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속직히 그만한 감동을 안 받은 것은 아닌데 그만한 불량을 감상문으로 쓸 수 있겠는가? 내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 부담이 아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줄을 그었던 대목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특별한 감동?”
먼저 제5부 결론:언어는 존재의 집-19과 언어의 직공이 되라
성경 기자는 탁월한 언어의 장인이었다.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곡진하고 실감나게 하기 위해 언어와 치열한 싸움을 한 언어의 대가라고나 할까! 그저 사상이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중립적인 전달의 용기로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성경 기자는 그저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의 합산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 기계적 필사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성경 기자가 어떤 신통력을 받아서 일사천리로 단숨에 써 내려간 것으로 착각한다. 더욱이 성경 본문은 한 사람의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성경 기자에 의해 어느 날 밤 단숨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과 시인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결정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언어의 직공이 되어야 한다. 성경 기자가 언어적 설득 장치들을 탁월하게 구사한 언어의 장인이라면, 우리는 이를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우선 이를 위해서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언어의 직공이 되는 첫 번째 길이다.
---사실 이런 부분은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 같다. 성경을 쪼갠다는 것은 들어보았지만 성경이 탁월한 예술가의 작품으로서 탁월한 문학 작품인 것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기자가 사용한 언어 장치들을 통해 그가 본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성경 본문을 보고 첫인상이나 몇 가지 관찰에 근거하여 자기 멋대로 지어내는 상상력이 아니라, 성경 기자가 사용한 언어 장치를 렌즈로 사용하여 그가 본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 말이다.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냐하면 사단법인 한국어린이전도협회에서 난 건 7년 동안 사역을 했었다. 그 어린이 사역에서 사용되는 교재가 미국 본부에서 들여오는 것인데 총 7년 커리큘럼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성경 공과가 모두 시각화되어 있는 공과인데 이것이 모두 이야기식 공과이다. 또 어린이 전도협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과 방식은 이야기식 설교이다. 그래서 난 건 7년 동안 성경 66권에서 중요한 사건을 이야기식으로 해 보았다. 아이들에게는 이것만큼 효과적인 설교 방식은 없다. 흥미를 떠나서 내용이 풍성하고 상상력을 통한 현장감을 그대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이 이야기식의 설교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행과 행 사이에 독자 자신이 메꾸어야 할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 사이를 연결하면서 사건을 전개할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마치 대본을 들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같이, 그러나 실제적 어려움은 그 행과 행을 메꿀수 있는 풍성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부족이었다. 설사 내가 상상력을 발휘했다 하더라도 그 상상력에 대한 근거의 불확실성 때문에 설교는 거의 “아마도 이러 이러 했을 거예요.”라는 불확실한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렇게 불확실하게 이야기해서 되겠냐고 나에게 항의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것을 위해 여러 가지 책들을 참조하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 이야기식을 위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또 그와 같은 방식의 설교 작성을 위한 필요한 연구의 단계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너무나 막연했다.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보고 첫인상이나 몇 가지 관찰에 근거하여 자기 멋대로 지어내는 상상력이 아니라, 성경 기자가 사용한 언어 장치를 렌즈로 사용하여 그가 본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 말이다.
-->기대하기는 본 책의 저자인 김지찬 교수님께서 앞으로 이와 같은 눈으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많은 부분의 연구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한다.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성경을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의 눈과/ 본문을 도와줄 수 있는 필요한 자료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이런 상상력을 소유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와의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성경 언어의 성격과 특징은 무엇이며, 성경 언어가 성경의 신학적 내용과 역사적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네 번째로 언어의 직공이 되려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세계를 신뢰하고 그 안에 살기로 작정하는 삶에의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세계를 경험해 본 자만이 이런 세계를 언어로 표출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며, 이 세계를 옳게 표현하기 마련인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직공이 되려는 성경 해석자들은 선지자들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긴장과 경계선의 자리에 선 자들이었다. 기존 질서의 너무 안쪽으로 들어가면 진정한 창조적 언어가 태어나기 어려우며, 너무 밖으로 나가면 긴장과 시대 인식이 결핍되어 비판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안과 밖, 그 사이 경계선에 긴장으로 서 있으며 삶과의 치열한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성경의 언어적 표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성경에 대한 기본 이해는커녕 존재의 의미마저도 불투명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성경 해석의 문제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선택을 요구하는 삶과 행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직공이 되는 것은 삶의 직공이 되는 것이리라.
-->그렇다, 맞는 말씀이다. 중세를 마감하는 종교개혁의 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분명한 성경에 대한 진리의 밝힘이 아니었던가? 나는 요즘 조국 교회의 갱신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국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또 모여서 같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국 교회의 갱신을 자꾸 부르짖다 보니까 한가지 답답함이 생겼다. 그래 조국 교회 갱신? 좋다.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조국 교회는 어떻게 갱신되어야 할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갱신의 방향은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갱신을 시작해야 하는가? 또 성경에서 가르치는 갱신의 방법론의 핵은 무엇인가? 아직도 한국 교회는 교회론 하나 제대로 성경적으로 정립을 못한 것 같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금까지 왔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교회의 모습이 가야 할 것인가? 또 조국 교회의 갱신을 위한 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에서의 논리적 근거가 약하기 때문에 매우 혼란하다. 이 책의 저자의 주장에 따라 성경의 연구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조국 교회와 이 세상에 퍼져 있는 모든 교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바라고 기대하기는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이 조국 교회가 성경적인 분명한 길을 제시받고 성경적인 개혁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랄 다름이다.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 한 문장 “생명이냐, 죽음이냐, 선택을 요구하는 삶과 행위의 문제이다.”에 나는 생명을 건다. 또 교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한국 교회에 큰 길을 제시하실 분임을 확신한다.
한동한 많은 관심을 가졌고 지금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경공부, 성경 세미나, 여러 성경 연구의 방법론들이 삶에의 실천적인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동사 파싱만 하다가 성경 공부를 다 한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답답하다. 나라도 좀 할 수 있었으면, 나라도 좀 제대로 알 수만 있다면 삶의 방향을 제시하겠다. 하는 답답함이 몰려와 나의 부족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기 저기 성경 공부는 쫓아 다녀 보지만 성경에서 맴돌다가 끝나 버린다. 그 다음 동작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하자라든지,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성경적이라든지 구체적으로 말을 안해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죄송스럽지만 난 김지찬 교수님을 통해서 빛을 얻기를 소망한다. 무엇인가! 성경의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를 소망한다.
<언어의 직공이 되라>
성경 기자들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언어적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언어적 형식에 의해 전달하려고 하는 표현적 기능도 있다. 즉 내용만이 아니라 언어적 형식도 중요하다. 언어의 기능을 단지 정보적 기능만으로 보면 곤란하며 표현적 기능도 있으며 다양한 언어적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도 문학적인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으나 문학이 허구에 기초한다는 면에서의 문학은 아니며 성경은 실제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 구약 성경 본문은 읽혀질 목적으로 성문화 된 것이기에 단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귀로 인식할 수 있는 소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알아야 한다. 소리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주는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유사 발음 단어의 반복 기법(paronomasia)
이를 통해 사물의 유사성을 대조시키므로, 발음상의 유사성을 통해 핵심적인 의미를 더욱 강조함은 소리가 단지 장식이 아닌 의미와 밀접한 연결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2) 동음이의어를 반복
동음이의어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 의사 전달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삼손의 기사에서와 이사야의 선언에서 볼 수 있다. 삼손의 기사에서 사자와 꿀이 모두 ‘아리’라는 동음이의어라는 점을 이용하여 수수께끼를 내어 블레셋인 을 혼동시키는데 성공하는 것과 ‘밭갈다’와 ‘침묵하다’라는 히브리 동음이의어 ‘카라쉬’를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성경 본문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블레셋인 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앗수르의 침략으로 크게 두려워하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타아미누’하지 않으면 ‘테아메누’하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시므로(이는 엄격히 이야기해서 동음이의어라기보다는 유사 발음 반복 기법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어가 아니고선 결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명제를 효과적으로 한 단어만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또한 호세아는 두 쌍의 동음이의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간의 길과 라합의 길 사이의 진자 운동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리는 내용과 밀접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고 성경 기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심화시키고 강화하며, 세미한 뉘앙스를 부가하는 언어적 장치인 것이다.
3) 각운, 두운, 모운의 사용
각운법, 두운법, 모운 법을 이용한 소리의 반복은 분위기를 창출하고 주제를 표출하며 메시지의 전달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한다.
위의 1),2),3)의 예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리와 의미의 유기성을 배우게 되고 히브리어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소리의 층에 유의하게 만든다.
성경 기자들은 독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설득 장치로 다양한 비유적 언어들을 사용한다. 그들은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고도의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언제 끌려왔을 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저자의 판단과 해석에 고개를 끄떡이게 만드는 탁월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설득의 장치로 다양한 비유법을 사용하는데 직유, 은유, 대유(제유와 환유),의인법, 알레고리, 상징, 이미지, 패러디 등이 있다. 성경을 단지 종교적 문헌이나 역사 문서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여기에는 위와 같은 다양한 문학적 기교가 들어 있는 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글이다.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위에 근거해 있으면서도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능력은 어떠한 고전보다도 더 탁월하다. 다음은 다양한 비유법들을 살펴보면서 이를 뒷받침하고자 한다.
1) 직유
직유는 생각을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만들어 큰 효과를 나타내는 표현 장치이다. 이스라엘을 아낙 자손에 비교하여 메뚜기 같다고 한 직유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서운 공포를 일으켜 밤새도록 곡을 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다윗을 하나님의 사자 같다고 비유한 직유는 모두 아첨의 분위기에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게 좀같이 되어 에브라임의 몸의 일부를 갉아먹을 것이라는 호세아의 선언은 그 충격이 핵폭탄의 위력으로 다가온다. 공법이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라는 직유는 우리의 상상의 신경을 건드려 온몸으로 전율케 하면서 아모스가 꿈꾸는 이상 사회를 열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물과 하수가 자연스레 흐르며 장벽을 무너뜨리고 메마른 땅에 생명을 주듯이 정의와 공법이 물과 하수처럼 흐르는 사회를 상상케 한다. 이같이 직유는 추상적인 주제를 명백히 하고, 주제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하는 중요한 언어 장치이다.
2) 은유
은유라는 뜻의 영어인 메타포(metaphor)는 원래의 뜻이 옮김 또는 자리바꿈의 의미를 지닌 메타포라(metphpora)에서 기인하였다. 메타포라는 메타(건너)와 페레인(옮긴다)의 합성어이다. 한 단어의 원래의 일차적 의미에서 이차적 의미로의 전이를 가리킨다. 은유는 세계 인식의 수단이요, 실재창조의 도구이며, 정서 전달의 채널이다. 성경 기자는 은유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석 자도 이 렌즈를 통해 성경 기자가 본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렌즈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행간을 읽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3) 환유
다른 어떤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하는 비유법을 대유법이라 부른다. 이를 세분하면 제유와 환유로 나눌 수 있다. 제유란 사물의 일부로서 그 사물 자체의 전체를 대표하게 하거나 전체로서 부분을 대표하게 하는 기법이요, 환유란 사물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 표현하는(대치하는)기법이다. 제유의 기본 핵심이 대표라면, 환유의 기본 핵심은 대치이다. 환유란 사물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하는 표현이다. 은유가 연상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환유는 연속 법칙(The principle of contiguity)에 의해 만들어진다. 환유는 어떤 것에 의해서 그것에 연결된 나머지 부분을 대표시키는 일이다. 즉 한 부분에 의해 나머지 전체를 이해하려는 데 환유의 목적이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이 환유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르완다를 대표하는 환유인 우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환유가 보여주는 일부분에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환유가 감추고 있는 부분을 공상, 추리하여 채워 내기 마련이다. 환유가 드러낸 일부로부터 숨긴 부분으로 사유를 확대해 나가게 하는 힘이 있다. 독자들은 성경에서 환유의 풍선을 띄우고 나머지는 공상으로 채우게 된다. 이는 환유의 또 다른 힘이다.
창3:17절의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지 않고 땅을 먹으리라고 표현한 것은 환유이다. 사물의 속성과 연결된 무엇으로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환유법이다. 손이라고 하는 환유-이는 행동을 가리킴-를 통해 성경은 다윗과 사울을 묘하게 간접적으로 대조하기도 한다. 창 2:25절에 벌거벗음을 가리키는 에롬이란 단어와 창 3:7절의 벌거벗음의 단어인 에롬의 단어를 대조시키면서 후자의 벌거벗음은 하나님의 심판 의식, 즉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의식-죄책감-을 가리키는 환유로 표현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아 7:2절은 배꼽이라는 구상어를 사용하여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대치하는 완곡 어법의 환유나 배의 일부분인 배꼽을 통해 배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제유법의 예를 성경은 또한 제시하고 있다. 삼하 11:8절에는 발을 씻으라는 권고가 나오는 데 이는 단지 발 씻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휴식, 포식과 과음, 동침으로 연결되는 전체의 과정을 대치하는 환유적 표현으로 독자로 하여금 환유의 나머지 부분을 메우도록 유도함으로 강력한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환유의 비유법은 단지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 함축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극대화시키는 의미 전달의 중요한 수단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4) 제유법
환유가 사물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름으로 어떤 사물을 대신 표현하는 기법(대치)이라면, 제유란 사물의 일부로서 그 사물 자체의 전체를 대표하게 하거나 전체로서 부분을 대표하게 하는 기법이다. 환유의 기본 핵심이 대치라면 제유의 기본 핵심은 대표이다. 이러한 성경적 사용의 예들을 살펴보자. 창 3:19절에는 얼굴이 한 사람 전체를 대표하고 있으며, 같은 용법이 삼하 17:11절의 후세의 충고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시 42:5절에 보면 이 제유적 표현이 새롭게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얼굴이 하나님의 임재를 대표하고 있는 제유인데다가 얼굴의 구원이라는 말로 얼굴이라는 제유적 이미지가 구원의 은유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룻 3:11에는 문이라는 말이 이스라엘에서 백성들의 삶의 중심을 제유적으로 표현하는 용법을 볼 수 있다. 또한 부분을 가리키는 모든 이라는 제유의 용법도 있다. 제유는 단지 사물의 일부로서 전체를 대표하는 기법은 아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체로서 일부를 대표하는 것도 제유이다.
5) 의인법
인간의 마음이 사물로 하여금 인간적 속성을 갖도록 만든 은유를 의인법이라 정의 할 수 있다. 다른 언어적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의인법도 단지 언어의 장식적 요소만은 아니다. 의인법은 인간적 표현들을 통해 세계의 현상들을 이해하고 이런 인식을 표출할 뿐 아니라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까지도 제시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의인법의 예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땅에서 들려 오는 아벨의 핏소리는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동정을 드러내는 청각적 이미지이며, 가인의 마음의 문에 웅크리고 있는 귀신이나 야수로 의인화되고 있는 죄는 성경적 죄관이 죄를 선의 결핍 정도로 보는 철학적 죄관과 다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미지의 사물을 이해하는 원초적 형태는 자신과 그 사물을 비교해 보는 의인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6) 상징
상징이란 어떤 사물이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을 가리킨다. 기호는 순전히 인위적인 약속에 의해 다른 것을 대신하고 있기에 상징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에 반해 상징은 대신하는 것과 대신되는 것 사이의 연결을 추론할 수가 있다. 소나무를 절개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소나무의 사철 푸름에서 절개의 속성을 본 때문이다. 상징은 원관념을 감추고 보조관념만을 내세운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은 은유와 비교할 필요가 있는데 은유는 형태적으로 원개념을 드러내지 않지만, 상징은 전적으로 원개념은 은폐한다. 상징은 하나만을 가리키지 않고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상징은 상상, 직관, 감정등 전 인격에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예로는 아 4:12절의 잠근 동산이란 표현에서 동산은 신부와 신부의 매력을 상징한다. 사 40:3절의 사막은 단지 문자 적인 사막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은 모든 장애물과 방해 요소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쓰여 있다. 이사야서에서 사막은 불순종으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의 형편을 상징함과 동시에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갱신의 장소로 표현되고 있다. 창 37장에도 애굽을 상징적으로 죽음의 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 30:7절에도 애굽이 죽음의 세력을 가리키는 상징적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학자는 더 나아가 홍해(얌숩)는 죽은 자의 땅(애굽)과 산 자의 땅(가나안)을 가르는 경계로서의 상징성을 가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호 2:2-3에서도 상징이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는 상징을 대할 때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는 마음대로 지어내는 상상력이 아니라 상징을 뚫어 보는 좋은 상상력을 의미한다. 렘 25:10절에는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의 끊어짐을 통해 회화적으로 철저한 파괴와 황폐를 보여 주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7) 알레고리
알레고리란 말은 寓喩(우유)혹은 풍유로 번역되며 다른 것을 말한다는 헬라어 알레고레인에서 왔다. 알레고리는 원개념을 감추고 보조 개념만 내세운 은유라는 점에서 상징과 비슷하다. 상징은 일대 다의 세계를 지시하여 다의성이 있는데 반해 알레고리는 일대일의 세계를 지시하여 단순하다. 알레고리는 지시 대상의 의미가 상징처럼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확정되어 있다. 알레고리로 확정해서 전달하려는 관념은 누가 알레고리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보편적 관념이어야 한다. 현대의 성경 해석자들에게 있어 알레고리 하면 중세 성경 해석자들의 자의적인 영해를 떠올린다. 우리는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알레고리와)을 구분해야 한다. 알레고리는 저자가 숨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며 알레고리제이션은 원래 저자가 의도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숨은 의미를 억지로 이야기 위에 부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원래 알레고리가 아닌 것을 알레고리처럼 해석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우리는 알레고리와 알레고리화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알레고리로 의도된 것은 요담의 우화, 나단의 비유,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 등이 있다.
8) 아이러니
겉으로 드러난 표현과는 반대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반어(아이러니)라고 한다. 아이러니는 단도직입적으로 직설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우회의 수법을 통해 직설법 보다 큰 효과를 거둔다.
9) 풍자
풍자는 잘못이나 모순을 빗대어 웃으며 폭로하는 수사법으로 때로는 풍자하려는 요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곡해, 단순, 과장을 하기도 한다.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하려는 성경 기자들이 풍자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10) 과장법
과장법은 허위나 비 진실을 날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개념이나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외시의미로는 거짓이나 함축 의미로는 우리에게 눈에 안 보여 잊어버리기 쉬운 것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진실의 언어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또한 과장법은 말하는 이의 숨은 저의와 감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11) 패러디
패러디란 우리말로는 골계라고도 하는데 익살을 의미한다. 패러디는 남의 작품의 시구나 문체를 따 와서 내용이 전연 다른 것을 표현하여 외형과 내용의 부조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법은 대상을 희화화하여 날카롭게 풍자하거나 전달하려는 요점의 충격을 극대화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탁월한 문예 기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성경에도 영어에서 말하는 pun-동음이의어를 통한 word play-이라는 현상이 있음을 보고 새삼 놀랍다. 또한 원어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와중에 있는데 때론 많은 시간을 투자한 원어의 연구가치에 대해 회의도 해 보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원어 연구의 절대 필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한편으로 다양한 수사법 표현이 성경에 쓰인 것을 보면서 이점들에 관심을 두면서 성경을 읽을 필요성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성도들과 깊은 씨름을 할 예비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어떻게 하면 영혼의 금선을 울리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까? 하는 것이 한 평생의 숙제일텐데 나도 언어의 직공이 아닌 언어의 전공(자)이 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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