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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

Joyfule 2024. 8. 9. 23:17


엄상익 변호사 -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

 

나는 아름답게 늙어가는 노인들을 찾고 있다. 유튜브의 한 화면에서 소설가 조정래씨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저는 술 안 먹고 사람 안 만나고 면벽참선하는 자세로 대하소설을 썼어요. 끝없이 노력했어요. 그러던 내가 나이 팔십이 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그렇지만 이제 늙음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경작을 하고 있어요.”

노 소설가는 아직도 열정적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나이 구십의 수필가 피천득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한 세기를 살았어요. 인간이 사는데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중요한 데 막상 살아보니까 평생 먹은 양이 얼마 안되요. 또 검소하게 지내면 옷값도 별로 안 들어요. 작은 돈이라도 넉넉하게 지낼 수 있죠. 그런데 왜들 아귀다툼하고 사는 지 몰라. 나는 먹는 양이 아주 작아. 그렇게 하니까 이렇게 오래 사나 봐.”

사는데 필요한 게 많지 않다는 얘기였다. 며칠 전 나이 구십의 장군출신 노인이 나를 찾아왔었다. 저녁을 함께 하면서 여러 얘기를 했는데 그중 이런 말이 있었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까 말이요. 이상하게 부잣집 아들로 잘 먹고 잘산 사람들이 먼저 죽고 가난한 집 아들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돈 없다고 병들고 굶어죽는 게 아니었어.”

삶은 신비다. 돈을 벌기 위해 비상하게 머리를 굴리고 사람들을 사귀고 다녀도 꼭 부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의 스승같은 변호사가 있었다. 아버지와 나이가 같았던 그 분이 내게 한 이런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내가 법관으로 있다가 변호사사무실을 차릴 때였어. 법관동료들은 다 내가 굶어 죽을 거라고 했지. 내가 소심하고 사람들을 사귈 줄 모른다고 말이지. 그렇지만 세상은 겉으로 보는 예측과 달라. 정직하면 다 살아가게 되어 있어.”

노인이 되어서도 행복이 넘치는 사람들을 봤다. 오래전 신촌의 한 재즈까페에서였다. 머리가 하얀 노인이 편안한 얼굴로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부드럽게 구르며 흥겨운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또 다른 노인이 클라리넷에 열정을 불어 넣고 있다. 그 뒤에서 스윙 리듬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이 흔들리는 드럼을 치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들 사이의 공기가 행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노인들의 재즈무대 아래의 테이블에는 작곡가 손목인 가수 고은봉 현인 선생이 다정하게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노년은 그 자체가 예술작품 이었다.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은 재즈 피아니스트 노명석씨라고 했다. 노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부러웠던 또 다른 노인이 있었다.

오래전 카프리섬으로 갔을 때 만난 사람이었다. 섬위 위쪽 산동네의 미로같은 골목길을 걷다가 작은 가게 옆을 지나치게 됐다. 두 평 정도의 좁은 가게 안쪽에서 이젤을 앞에 놓고 한 노인이 두꺼운 돋보기를 쓴 채 허리를 구부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노인과 어눌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여섯살 때부터 내가 사는 카프리섬의 그림을 그렸어요. 섬의 곳곳을 다니면서 그리고 또 그렸죠. 평생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아무 때나 그린게 아니예요. 내 감정이 움직이는 시간만 그렸어요. 아무 때나 그려지는 게 아니죠. 또 감정에 따라 칼라가 전부 달라지죠.”

그 노인에게서 산 부드러운 연필화를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을까.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알아야겠지. 물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것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요즈음 돈의 효용을 새로 느낀다. 돈은 이웃과 소통하기 위한 작은 선물이고 정성이고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런 용도의 돈은 정말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해가 질 무렵 묵호항 게집에서 킹크랩 찐걸 바닷가 교회의 혼자 외떨어져 있는 목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한두번 정도 예배시간에 봤다. 나는 그 교회에 등록된 신자도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게 돈의 효용인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있는 실버타운에서 추하게 늙어가는 사람과 아름답게 늙어가는 노인들을 관찰하고 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기 자랑을 하거나 상대방에게 출신학교와 서울 어디서 살았느냐고 버릇같이 묻는 사람이 있다.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어떤 노인은 대학때부터 외국어로 된 원서로만 공부했다고 자랑하다가 왕따가 되어 조용히 사라졌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고집 피우고 내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면 화를 벌컥벌컥 내기도 한다. 노년에 그런 것들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반면에 식사때마다 단정한 옷차림에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구십대 중반의 노인이 있다. 얼굴에 항상 미소를 띄고 있다. 자신의 생일 같은 때가 되면 실버타운의 노인들에게 간단하게 떡을 선물하기도 한다. 예전에 높은 자리에 있었다는 소문인데도 그는 누구에게도 왕년에 뭐를 했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연세에도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양보하는 자세다. 누구한테도 항상 감사하다고 말한다. 드러내지 않지만 신앙심이 깊은 것 같다. 아름다운 노년을 예술작품으로 만든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