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감옥은 좋은 독서실
오래전 교도소 보안과를 들렸을 때였다. 벽에는 감방 안을 비추는 모니터 화면들이 걸려 있었다. 감방의 천정에 카메라가 달려있는 것 같았다. 덩치가 우람한 조폭 출신이 감방 구석에서 바위같이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시간은 엄청나게 늘어지고 길 것 같았다. 시간의 양과 질은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지방지를 발행하는 한 언론인이 구속이 됐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갈 때 아예 그가 선별한 칠십권의 책을 그 안에서 독파할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는 감방에 들어가서부터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집중한 채 책을 읽느라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가 육십권쯤 읽었을 때 석방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목표인 나머지 열권을 채우지 못한 게 아쉬웠다고 했다. 책에 몰입해 있으니까 감옥에서의 시간은 빨리 흐르는 것 같다고 했다.
청송교도소에서 징역을 이십년째 사는 한 죄수를 만난적이 있다. 그의 노모가 감옥에 있는 아들을 만나달라고 부탁해서 갔었다. 청송교도소는 악명높은 곳이었다. 거대한 암벽이 양쪽으로 막아선 계곡에 장방형의 콘크리트 건물이 납작하게 눌린 듯 들어차 있었다.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 정지된 곳 같았다. 내가 만난 그는 후리후리한 키에 쌍거풀진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의 얘기 중에 정체된 시간을 이겨낸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기나긴 감옥생활에 좌절하고 있는데 어느 날 복도 맞은 편 감방에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긴 징역형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하고 다른 건 항상 밝고 명랑한 점이었어요. 게다가 밤늦게까지 책을 열심히 읽고 새벽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작업시간에 그와 잠시 얘기할 수 있었는데 나보고 책을 읽어보라고 하면서 세계문학전집을 권했어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읽었어요. 차차 마음이 안정되고 내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그 남자가 두번째로 권한 책은 성경이었어요. 자연스럽게 성경도 읽었죠. 따뜻한 가을 햇살이 비치던 날 교도소 운동장에서 였어요. 그 구석의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 남자가 나를 보더니 이제는 피해자의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떻냐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나한테 당한 사람들을 떠올렸어요. 해장국집 아줌마가 떠올랐죠.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도 딸의 대학등록금을 털었죠. 그 남자에게 나는 정말 나쁜 놈이었다고 하면서 내 마음을 털어놨어요. 그는 죄가 문제가 아니라고 했어요. 사람은 크건 작건 누구나 죄를 짓는다는 거죠. 진짜 중요한 건 참회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고 했어요.”
그날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얼마 전에 세계사 열다섯권 짜리를 다 읽었어요. 거기서 보니까 예전에는 나 같은 죄인을 재판도 없이 목을 댕강 잘라서 공중에 달아 놨더라구요. 그나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은혜인 것 같아요.”
감옥 안의 좋은 책들이 그를 구원한 것 같았다.
감옥 안에서 책을 읽기도 하지만 만들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됐던 한 시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가 감옥체험을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 당시는 감옥 안에서 집필이 금지됐어요. 나는 그 안에서도 시를 쓰고 싶었죠. 어느 날 운동시간에 누군가 볼펜심 반 토막을 슬쩍 던져 주더라구요. 쓰는데 목이 말랐던 저는 정말 고마웠죠. 그걸로 책장의 위쪽 여백에 시들을 썼어요. 시집을 낼 작정이었죠. 석방되는 날 시가 적힌 그 책들을 가지고 나가려니까 교도관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걸 빼앗기고 실망해서 교도소 철문을 나서는데 조금 전의 그 교도관이 나를 불러세워요. 그리고 내가 쓴 시가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건네주면서 안녕히 가시라는 거예요. 고마웠죠.”
그렇게 그의 시집은 탄생했다. 그 외에도 감옥 안에서 쓴 글들이 책이 되어 나오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변호사를 하면서 수십년간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 안은 어떤 곳일까. 비좁은 감방 안으로 들어가 관물대 밑의 마루바닥에 누워본 적도 있다. 감옥이란 곳은 특이한 장소였다. 어떤 죄수는 철창을 통해 밤하늘의 별을 보고 또 다른 어떤 죄수는 바닥에 흐르는 진창물을 보는 곳이었다. 누구에게는 기도실이었고 누구에게는 범죄연구실이기도 했다.
살 줄 아는 사람에게 그곳은 또 다른 삶의 장소이고 내면이 깊어지면서 한 차원 승화되는 곳이기도 했다. 감옥 안에서 정부가 주는 밥은 허술 하지만 정신의 양식은 얼마든지 좋은 걸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은 책들이 인간의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좋은 밥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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