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고독은 즐겨야
텔레비젼 화면에 온화한 얼굴의 낯이 익은 노인이 나타났다. 나와 친한 고교동기다. 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곱게 익은 듯한 백발이 단정하다.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올해 육십구세입니다. 혼자서 산 지가 이십사년이 됐습니다. 혼자서 산다는 게 불편해 지는 건 몇 번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였습니다. 처나 자식을 보호자로 적으라고 하는 데 저는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모두 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대기업의 임원으로 일을 하다가 퇴직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 후로 책을 내기도 했고 신문에 컬럼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부드럽고 느린 듯한 그러나 발음이 정확한 목소리에는 그의 차분한 인격이 담겨있었다. 그는 나와 마음을 교류하는 친구였다. 그는 고독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말을 들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노년의 봉사와 그 소개하는 역할을 방송에서 맡은 것 같았다. 그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온기가 화면 밖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그와는 영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 고독은 잘 어울리는 익숙한 옷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혼자 살지만 그의 내면은 꽉 차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고독은 보라빛 노을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 같아 보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고독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인다고까지 할까. 그는 절대자 앞에 단독자는 아닐까.
핵가족이 다시 해체되고 핵 개인이 너무 흔해진 세상이다.
청년들은 결혼이 선택사항이 되고 내가 묵는 실버타운을 보면 반 정도는 배우자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 노인들이다. 바닷가 포구마을로 가 보면 혼자 살다 죽은 노인들의 껍데기 같은 빈집들이 즐비하다. 시대의 바람이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 쪽으로 불고 있는 걸 실감한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고 홀로 죽어간다. 살아가는 데도 혼자서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사람은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가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거역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꿋꿋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인생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파도치는 동해의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삶의 마무리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 아닐까.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라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서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면 그 인생이 그 죽음도 초라하고 쓸쓸하기 마련이다.
어젯밤 유튜브 화면을 통해 청소업체에서 고독사한 사람이 살던 방을 치우는 걸 봤다. 시신이 썩어서 해골 상태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방에는 소주병이 뒹굴고 살을 파먹은 벌레들의 껍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얼룩진 침대 위에 미쳐 치우지 못한 손가락뼈가 몇 마디 남아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고독사는 흔한 일 같다. 죽은 지 이주 만에 발견된 여성 탈랜트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참 예뻤던 탤런트였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국민들 세사람 중 한 명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핵개인화 되어가는 것이다.
오래전 ‘날마다 일요일’이라는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한 장면이 기억의 벽에 달라붙어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이 죽은 후에 시신이 부패할까 봐 시장에 가서 커다란 비닐과 대형냉장고를 샀다. 죽기 직전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냉장고 안으로 들어기 위해서다.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일본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고독 속에서 죽는 모습들을 더러 봤다.
화류계의 사생아라고 비관을 하면서 세상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이 범죄를 저지르다 노년에 적막한 방에서 목을 매 죽은 사람을 봤다. 평생 바르지 못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노숙자 보호시설에 울다가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감옥에서 출소 후 몇 달 만에 자살한 사람의 시신을 직접 처리한 적도 있다. 화장장에는 나 혼자였다. 사랑을 하거나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죽음도 메말라 있었다. 전과가 많은 노인이 노숙자 합숙소 구석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사는 걸 봤다. 젊어서 고압선에서 감전이 되어 평생 독신으로 산 그 노인에게 강아지는 가족이었다. 자기는 먹지 못해도 강아지에게는 우유를 사서 먹였다. 밤이면 강아지를 가슴에 품고 잤다. 강아지에 대한 사랑은 그 노인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나의 어머니는 임종 직전 외아들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살아보니까 고독이 참 힘들더구나.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니? 잘 견디다 오너라”
어머니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들인 나의 팔을 한번 쓰다듬고 저세상으로 훌쩍 건너가셨다. 나는 요즈음 고독을 견디는 게 아니라 즐기려고 노력한다. 여러형태로 기도를 하면서 수시로 그분을 만나면 고독하지 않다. 고래같이 다가오는 겨울 파도들이 수많은 친구의 방문같이 느껴진다. 오늘저녁도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동해역으로 내려오는 외로운 친구가 있다. 따뜻한 재즈가 출렁이는 까페로 데리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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