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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온기를 남기고 떠난 사람들

Joyfule 2024. 9. 15. 22:45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온기를 남기고 떠난 사람들   

 

아내가 열광하던 종교인이 죽었다. 아내는 밤이나 낮이나 그의 설교를 듣고 또 들었다. 아내는 그의 설교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퍼 날랐다. 아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라고 하며 그를 섬겼다. 그런 아내의 우상이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훌쩍 건너가 버린 것이다.

“이게 뭐지?”

아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아내가 띄엄 띄엄 했던 말의 조각을 이어 붙여 죽은 사람을 형상화 해 보았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자란 그는 마약도 하고 정신병원에도 있었다는 사람이었다. 험악한 슬럼가에 가서 자기한테 총을 쏴 보라고 소리소리 치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다시 태어나게 되고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옷장사를 하면서 번 돈을 쓰면서 자신이 깨달은 걸 전하기도 하고 그게 본격화 되자 안경사인 그의 아내가 돈을 벌어서 남편을 도왔다고 했다.

아내의 강권에 인터넷으로 전해진 그의 설교 녹음을 한번 들어봤다. 미국이민을 가서 자란 탓인지 툭툭 던지는 어눌한 단어에 말이 매끄럽지 못했다. 그러나 말의 행간 속에 그만이 알아차린 어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았어?”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따뜻한 사람인 것 같았어요.”

세상을 떠난 뒷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그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다가 그 일을 종료한 것이다.

지난해 소년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부음을 듣고 마음속에 스미는 서늘한 바람을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두뇌가 우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기도하는 모임에서 고정적으로 만났었다.

그중 한 친구는 고등학교 삼학년 때의 모습 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의 사진첩에 누렇게 바랜 채 남아있다.

찬바람이 불던 이른 봄이었다. 교실 창문 쪽에 앉아있던 그는 춥고 조금은 슬퍼 보이는 느낌이었다. 인생을 다 산 육십대 후반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후회 섞인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 삼학년때 나도 너 같이 한 단계 낮춰 법과대학을 가고 싶었어. 아무래도 실력이 모자라는 것 같았지. 그런데 담임선생이 한 명이라도 서울대를 더 넣으려고 강제로 그 쪽으로 원서를 쓰게 하는 거야. 그 바람에 일차에서 떨어지고 이차 대학에 가서 엉뚱하게 경제학을 하게 됐어. 독일에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따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하여튼 나는 한박자씩 늦어지면서 인생이 뒤틀린 것 같아. 정교수가 못되고 평생을 시간강사로 떠돌아 다녔지”

능력과 실력이 충분해도 누구나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살아보면 그걸 운이라고 할까. 얼마 후 그가 담도에 간단한 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회복이 되면 다시 모임을 하자고 했다. 그가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 얼마 후 그의 부음이 날아왔다. 한 박자씩 늦게 살다가 천국으로는 발 빠르게 간 것 같다. 착한 마음을 가진 좋은 친구였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희미한 잔향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지난해 죽은 또 다른 친구도 나의 가슴에 깊게 남아있다. 그는 어린아이때 엄마가 자기를 시장에 데리고 갔다가 슬며시 손을 넣고 가버렸다고 했다. 시장통 재단사가 그를 거두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그는 천재였다. 재단하는 작업대 밑에서 공부해서 명문고등학교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삼학년시절 그는 나에게 대학입시에 전념할 네 달만 주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그는 서울대는 아니지만 명문인 다른 대학에 바로 합격했다. 그는 일생을 언론인으로 살았다. 퇴직후에는 해외봉사를 나가 우즈베티스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삶을 마감했다. 천국에서 그를 버린 엄마를 다시 만났는지 궁금하다. 그가 떠나간 뒷자리에도

애잔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어느 날 떠날 날이 다가오고 저무는 숲에는 눈이 내릴 것이다. 죽음에도 성실한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이 있을 것 같다. 또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은 다를 것 같다. 착한 일꾼 같이 주어진 연장과 재료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다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밤늦게 조용히 잠을 청하듯 또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으면 행복한 것 아닐까. 그리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