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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Joyfule 2024. 3. 14. 23:5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그 모자가 다급하게 한 번만 더 돈을 꿔 달라고 했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얻었는데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이도저도 안 되면 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그 모자는 우연히 알게 된 의뢰인이었다. 미용사였던 엄마가 사채업자에게 걸려들어 어린 아들과 도망 다녔다. 찜찔방을 전전하면서 돈이 없었다. 아들에게는 라면을 사 먹이고 엄마는 물에 불린 건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웠다. 모자는 마지막에 노숙자가 되어 서울역 앞 광장으로 내몰렸다. 변호사인 나는 그 모자를 위해 사채업자와 싸움을 했다. 사채업자는 판사 앞에서도 독을 내뿜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모자를 묶었던 악마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모자는 작은 음식점을 차렸다. 매일 밤을 새우면서 몇백개씩의 만두를 빚었다. 아들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엄마는 밖에서 서빙을 했다. 코로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아들이 간절하게 부탁했다. 너무 힘이 드니 돈을 꾸어 달라는 것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무리를 해서 도와주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 모자는 내게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하고 다시 더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

나는 이미 칠십고개를 넘었다. 돈 버는 일이 사실상 끝난 것 같다. 노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저축한 돈으로 죽을 때까지 검소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에 또 다른 험한 일을 겪었다. 살인죄로 십오년정도 징역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 비참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면회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인생이 가련해서 매달 조금씩 돈을 보내줬다. 이빨이 다 빠졌다고 해서 틀니를 해 준 적도 있었다. 마침내 지난해 일월 그가 석방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밥값이 없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운전면허를 따게 돈을 달라고 했다. 원룸을 구해달라고 했다. 트럭 한 대를 사주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 그가 막노동이라도 하거나 그 게 안되면 노숙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내게 정 안되면 죽으면 된다고 했다. 왜들 그렇게 죽는다는 말을 쉽게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그가 목을 맨 채 허공에 죽어있다는 것이다. 화장장에 가서 그의 유골을 처리하면서 나는 그 허망한 인생이 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제각각 남보다 더 불행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들은 제 나름대로의 불행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안고 있는 진짜 불행은 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을 진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누군가가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유아의식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불행하니 당신은 나를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해답을 알려주어야 하는 선생쯤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평범한 나 같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 사회나 정부가 그들에게 답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신이 그들의 자살을 불쌍히 여길까?​

나는 요즈음 가급적이면 긍정적이고 밝은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내 글을 보고 너는 변호사니까 돈이 있으니까 좋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돈없는 불행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

너는 폐지 줍는 사람들의 불행을 모르느냐며 혼자만 노년의 여유를 즐기느냐고 질책하는 분도 있다. 내가 정말 그들이 보듯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일까. 나 역시 검은 기억들이 많다. 그런데 깨달은 것은 아프다고 소리쳐 도 공감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불행이 엉뚱하게 남을 위로해 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부정적이었고 비판적이었다. 세상을 냉소하고 나의 불행을 남 탓으로 돌렸다. 분노와 증오가 끓어올랐다. 그럴수록 마음속에 검은 안개만 더 자욱해졌다. 결국 답은 나에게 있었다. 가난한 집 처마에 달린 고드름에서도 영롱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감옥 안에서도 밤하늘의 별을 보는 사람이 있고 바닥의 진창만 내려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 감사하며 긍정적이 되는 것이 무지개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게 아닐까. 불행을 말하면서 남에게서 위로와 답을 찾지 말고 스스로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