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두 손님
천구백구십년 늦가을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었다. 퇴근길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가 사는 아파트동으로 가려는데 소방차들이 경광등을 번쩍이고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동의 계단을 타고 재가 섞인 검은 물이 위에서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동에서 불이 난 것 같았다.
“어느 집에서 불이 났습니까?”
입구에 서 있는 구경꾼에게 물었다.
“육백팔호에서요”
‘그게 어느집이더라’하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악’하고 소리지를 뻔했다. 바로 우리집이었다. 순간 불에 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나는 용수철 같이 육층으로 튀어 올라갔다. 문이 열려있고 소방관과 경찰관 그리고 구경꾼들로 집안이 가득했다. 모든 게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날카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행히 가족은 불이 났을 때 집에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은 그렇게 쳐들어 온 것이다.
이년 전 그 아파트를 분양받고 우리는 가족 전부가 폴짝폴짝 뛰며 행복해 했었다. 나는 점심값을 아끼면서 모은 돈으로 주택청약통장을 만들었었다. 아내는 아이를 둘러업고 아파트를 분양하는 곳마다 다니며 청약을 했다. 열번 이상을 번번이 떨어졌다. 그러다 마지막에 신청을 한 아파트가 당첨이 된 것이다. 우리 형편으로는 대금을 지급하기 벅찬 강남의 아파트였다. 우리 가족은 감격하고 행복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불이 난 것이다. 행복을 따라와 숨었던 불행 같았다. 나는 가족이 무사한데 감사했다.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그 고통은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다음날 가족들의 복구작업이 시작됐다. 아내는 까맣게 변한 결혼초 마련한 장롱을 아쉬운듯 닦고 또 닦았다. 초등학교 삼학년이던 아들은 까맣게 변한 자기 방을 보며 말한다.
“아, 내 국어책 산수책이 모두 없어졌구나”
은근한 능청이 담겨있었다. 녀석은 이제 공부를 안해도 되는 줄 알고 속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파트 내부를 복구할 동안 우리는 단칸방을 빌려 살았다. 그곳에는 또 다른 편안함이 있었다. 온 가족이 한이불 속에서 뒹굴었다. 팔만 뻗으면 자는 아들 딸이 만져졌다. 아내는 청소도 밥 먹기도 편해서 좋다고 했다. 불행해지면 보이는 게 있었다. 주위의 온정이었다. 친구들이 각자 살림 하나를 맡아 선물할테니 말만 하라고 했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새와이셔츠를 주는 사람도 있었고 곱게 포장된 속옷이 놓여 있기도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이재민이라고 아이들이 매일 선물을 준다고 철없이 좋아했다. 우리는 한달여만에 새집에 입성했다. 결혼 십년 만에 다시 새집에 새살림을 차린 것 같았다.
그해 겨울이 가고 새해가 왔다. 인근 부동산에서 사람이 찾아와 몇달 전 불이 난 집이 맞느냐고 확인했다. 한 사업가가 근래에 불이 난 집을 찾는다고 했다. 그해 운세가 불이난 집에 들어가면 사업이 번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당장 집을 팔기만 하면 무조건 시가에서 오천만원을 더 주겠다고 했다. 그말을 듣고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불나면 부자 된다는데 우리는 벌써 오천만원을 벌었으니 앞으로 큰 부자가 되겠네”
벌써 삼십사년전의 옛날이야기다. 그때의 오천만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아마 몇 억원은 될 것 같다.
살아보면 행복과 불행도 ‘어느 날 갑자기’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오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회색의 세상이 오기도 했다. 암을 통보받았을 때였다. 수술을 하고 회복이 됐을 때 갑자기 주변이 화려한 색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징후에 의해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고 축복과 저주가 교차 되는 현상이 운명이 아닐까. 행복과 불행이 인생이라는 직물의 바탕색이 되고 고통과 기쁨이 무늬가 되어 삶을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 행복이 올때 감사하고 불행이 왔을 때 인내하며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만’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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