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 무대는 연습이 없다
잠시 아마츄어로 연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재연드라마를 활용한 시사프로그램의 사회자 역할이었다. 드라마 속에 잠시 들어가 해설해 주는 역할이었다. 한 프로에서 다섯 장면 정도를 내가 맡았다.
그날은 월미도 선착장에서의 촬영이었다. 촬영팀의 이동은 큰 부대의 이동 같았다. 피디와 탈랜트, 스텝진과 엑스트라가 탄 버스가 있고 그 뒤로 크레인 트럭, 조명트럭, 레일등 촬영 도구를 실은 트럭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는 전날 대사를 외우느라고 고생했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에이포 용지 다섯장 정도의 분량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암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백번 정도 반복을 해도 외워지지 않았다. 암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게 입에 달라붙어야 했다.
월미도 선착장 앞에서 촬영준비가 되고 섬으로 떠나는 가족으로 연기하는 탈랜트 다섯명이 짐을 들고 배에 오르자마자 배가 기적을 울리면서 서서히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캇, 배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주세요. 다시 촬영합니다.”
모니터를 보던 피디의 지시였다. 이번에는 피디가 내게 말했다.
“배가 떠나는 순간 선착장 계단으로 카메라를 돌릴 겁니다. 그때 인(in)해서 천천히 부두 계단을 올라오면서 대사를 해주시고 거리에서 몇 걸음 걷다가 아웃(out) 하세요. 빠져 나가실때 시선은 바다 쪽으로 해주세요.”
깊은 바닷물 옆 부두에 달린 좁고 위험한 계단이었다. 떨려서 대사가 입에서 나오질 않을 것 같았다. 뭔가를 생각하던 피디가 갑자기 종이에 뭔가를 한참을 쓰더니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
“대사를 바꾸려고 합니다. 잠시 외울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에이포 용지에 꽉찬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걸 즉석에서 한자도 틀리지 않게 외우고 연기하라는 뜻이었다. 화가 나서 ‘네가 외워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할 수 없이 그걸 다시 외우고 거리에 서서 피디의 싸인을 받기 직전이었다. 내 뒤에서 어떤 사람이 내 등에 자기 몸을 살짝 붙였다. 신경이 곤두선 나는 “죄송하지만 지금 촬영중인데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구경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는 ‘행인1’인 엑스트라입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점심시간 나는 몇 명의 엑스트라와 칼국수를 함께 먹으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한 엑스트라가 신난 얼굴로 동료들에게 자랑했다.
“내일은 지하철 역무원 역할을 맡았는데 대사가 한마디 있어. 너무 좋아”
다른 엑스트라들이 그를 부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게는 많은 양의 대사가 스트레스였는데 그들에게는 복이었다. 그 프로가 끝날 때까지 여섯달 정도 일산의 대형 드라마 세트장부터 시작해서 다양하게 그 세계를 구경했다.
탈랜트의 세계도 수많은 등급으로 나뉘어 있는 것 같았다.
주역을 맡는 일류 탈랜트들부터 시작해서 조역 단역 엑스트라역 시체역까지 수많은 종류가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각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끝없이 기다리는 인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몇 달의 경험을 통해서 인생도 하나의 무대고 나는 그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연습도 없이 아기로 인생 무대에 밀려 나오면서 울었다. 운 걸 보니까 고통 많은 세상에 나오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는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역내지 단역 정도 될까 말까였다.
다른 사람은 왕의 역할인데 나는 왜 문지기냐고 불평을 했다. 나는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연출을 담당하신 분에게 속으로 항의하기도 했다.그분이 내게 메시지를 전해 왔다. 인생 오막인데 너를 삼막에서 퇴장시킬 수도 있다고. 그건 너를 세상 무대에 보낸 나의 재량이고 네가 없어도 인생극은 전혀 지장이 없다고.
생각해 보니까 하녀 역할을 맡은 사람이 나는 이런 역할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항의한다면 그가 가장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일찍 자기의 주제와 분수를 아는 게 지혜였다. 나는 납작 엎드렸다. 어떤 배역이든 그게 천직이라고 믿고 감사하겠다고. 내 일을 하면서도 실수를 줄이려고 애쓴다. 인생무대는 연습이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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