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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업신여김

Joyfule 2024. 6. 14. 15:0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업신여김  

 

개를 데리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사람을 봤다. 갑자기 개가 쭈그리고 앉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똥을 누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주인은 휴지로 개의 뒤를 깨끗이 닦아 주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에 개똥을 담아 가는 모습이었다. 동물들이 사랑받고 존중받는 좋은 세상이다. ​

지하철역 앞에 노숙자가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하루 종일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개만도 못하다고 표현했다. 개가 그렇게 혼자 있었다면 사람들이 말이라도 걸어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일요일 오전이었다. 한 교회의 출입구에 구겨진 모자를 쓴 노숙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신도들이 그 옆을 지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비를 맞고 있는 노숙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성들은 노숙자를 경계하면서 빙 돌아가기도 했다. 잠시 후 예배가 시작됐다. 신도들은 목사가 강대상에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예배당 뒤쪽 문이 열리고 노숙자 차림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서 강대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었다. 바로 그 교회의 목사였다. 신도들이 순간 모두 놀라면서 동시에 멋쩍어 하는 표정이었다. 목사는 성경속에 나오는 부자가 문앞에서 구걸하는 나사로에게 마음 한번 사랑 한번 주지 않은 것을 얘기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삼십대 초반 잠시 검찰청에서 근무할 때였다. 매일 오전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인 피의자들이 검사실로 왔다.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을 호송해 오는 교도관이 하루 종일 검사실 구석에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어느날 검사실을 찾아온 선배 변호사 한 분이 조용히 내게 이런 말을 했다. ​

“앞에 앉은 피의자의 수갑과 포승을 풀어주고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 잔 줘 봤어? 그들도 따뜻한 피가 도는 인간이니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그곳의 일상에 매몰되어 있었다. 나는 검사실에 잡혀 있는 피의자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추운 겨울날 몇시간씩 검찰청 지하의 감방에 있다가 검사실로 갔을 때였다고 했다. 검사가 마시다 통에 버리는 따뜻한 커피를 보면서 한잔 마시고 싶은 욕구가 절실하게 일더라는 것이다. 검사가 피우는 담배연기 냄새를 맡으면서 일상 사소한 것의 행복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피의자를 지키는 교도관의 얘기도 들어보았다. ​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눈길 한번 주는 검사가 없어요. 조사가 끝나면 검찰 서기가 ‘어이, 여기 데려가’라고 하는데 정말 불쾌합니다. 검찰 서기나 나나 같은 말단 공무원인데 업신여김을 당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떤 때는 검사실 여직원도 물이 들어서 그런지 냉냉하기는 비슷해요.”​

우리 사회는 남을 업신여기는 악습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 같다. 젊은 후배변호사의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탄광의 가난한 광부였어요. 어느 겨울 눈이 덮인 논바닥에 쓰러져 죽었죠. 나는 아버지 같이 되지 않으려고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냄비를 파는 회사의 영업사원이 됐죠. 한번은 내가 잘못이 없는데도 갑질을 하는 거래처 사장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어요. 참 사람을 업신여기더라구요. 이가 갈려서 퇴직을 하고 결사적으로 공부를 해서 변호사가 됐어요. 그렇지만 업신여김은 어디서나 끝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이번에는 판사가 갑질을 하는 겁니다.”​

돌이켜 보면 나도 여러개의 탈을 쓰고 살아 왔다. 돈이나 이익을 주는 사람 앞에서는 을이 되어 입의 혀같이 굴었다. 반면에 내 눈치를 보고 신세를 지려는 사람들에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갑질을 했을 것 같다. 매섭게 춥던 겨울날이었다. 성동구치소로 들어가려는 데 구치소 정문 건너편 구멍가게에서 병에든 따끈한 쌍화차를 팔고 있었다. 그걸 사서 감방 안 접견실로 몰래 들여갔다. 내가 만난 수감자에게 교도관이 보지 않는 사이에 얼른 먹으라고 했다. 그가 번개같이 마셔치웠다. 나는 그 기억을 바로 잊었다. 십오년 후였다. 감방 안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그 겨울의 뜨끈뜨끈하던 쌍화차를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 중에는 더러 얼굴이 찡그려지는 사람도 있다. 악한 인격도 있다. 그래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