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말의 힘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일차에서 떨어졌다. 그 자체로 이류인생이 된 것 같았다. 이차로 학생을 모으는 시험에서도 또 떨어졌다. 나는 삼류로 전락한 것 같았다. 어른들은 그 다음급 학교를 ‘똥통중학교’라고 했다. 일차의 명문중학교에 합격한 아이들이 새학기가 되어 검정 교복에 뱃지를 달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모습을 봤다. 어른들은 그 아이들을 마치 귀한보석이라도 보는듯 대견해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는 갈 곳을 모르고 어두운 길거리에 쓸쓸하게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로서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몸으로 느꼈다. 나는 서울 변두리 초등학교 육학년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부자집 아이들처럼 입시전문 과외교사의 지도를 받을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속에 흡수했다. 교과서의 글자들을 검은 색연필로 지워갔다. 다음에 줄을 지우고 다음은 면을 없앴다. 백지에 교과서를 그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했다. 모두가 똑같은 교과서였다. 문제는 교과서 안에서 내기로 되어 있었다.실수가 없도록 완벽을 추구하는 길이 합격의 길이었다. 일 년 동안 나를 지켜보던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이 다음에 너는 무얼 해도 틀림없이 성공할 거다.”
그 한마디 말이 평생 내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그리고 원동력의 원천이 됐다. 어떤 일을 해도 나는 성공할 사람이라는 확신이 만들어졌다. 선생님의 한마디는 내 영혼에 박힌 명령어였다.
고등학교 삼학년무렵이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나를 보자고 했다. 종종 나를 자기 집 자가용에 태워주던 부자집 아이였다. 조용하면서 깊이가 있는 친구였다. 실력도 대단했다. 그는 몇달을 채 공부하지 않고 전국 고등학생 독일어경시대회에서 일등을 했다. 해외 출국이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하면 유럽여행을 상으로 시켜준다는 걸 알고 도전한 것이다. 그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너한테 하려는 말이 옳은 말인지 정말 필요한 말인지 며칠 고민을 했어. 나는 너하고 앞으로도 계속 우정을 나누고 싶어. 그런데 너는 너무 거짓말이 많아. 내가 확인해 보면 네가 말을 한 것들이 사실이 아니었어. 내 말은 지적이나 비난이 아니야. 한번 깊이 생각해 줄 수 없을까?”
그는 내가 상처를 입을까 봐 극도로 조심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과장이 많았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입에서 나오는 것 마다 거짓말이었다고 할까. 부자집이나 고관집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그들과 같아지고 싶었다. 우리 집 환경은 바닥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 꿈이나 상상을 포장해서 말하는 게 버릇이 됐던 것 같았다. 그 친구의 말이 송곳이 되어 나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나는 정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못나면 못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치부까지 다 발가벗어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하는 거짓말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 셈이었다.
법과대학시절 친했던 교수님이 하루는 나를 불러놓고 이런 말을 해주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술이나 도박에 빠질 수도 있고 마약중독이 될 수도 있어. 그건 보통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될 수 있는 중독이기도 하지. 정말 주의해야 할 건 권력 중독이야. 평생을 선거판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물려받은 재산을 날리고 거지가 되는 수가 있어. 또 검찰이나 경찰에서 완장같은 권력에 취해 일생을 영혼이 없는 로봇같은 인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지. 자네는 그런 권력에 중독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그 중독은 일반인에게 납득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그 말도 나의 인식의 벽에 평생 붙어 나의 삶의 방향에 작용을 했다. 말의 힘이란 대단한 것 같다. 좋은 말만 아니라 나쁜 말의 힘도 엄청나다. 칼은 피부에 상처를 내지만 혀는 뼈를 꺽는다고 했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불행해지는 것 같다. 거짓말이 온통 사회에 먼지를 날리기도 한다. 배의 작은 키가 거대한 배의 방향을 꺽는다. 사람의 작은 혀가 배의 키와 같다고 했다. 정말 힘이 있는 좋은 말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오늘도 그걸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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