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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인 예수와 석가

Joyfule 2024. 6. 16. 21:02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인 예수와 석가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예수의 그림이 있다. 애잔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삼십대 초의 백인의 모습이다. 정말 그의 모습일까? 성당에 가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백인남자가 있다. 예수의 모습이 그랬을까? 성경에는 예수의 얼굴이 묘사된 부분이 없는 것 같다.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예수의 그림을 나는 그 분으로 알고 자랐다. ​

절의 대웅전에는 금빛을 뿜어내는 부처의 상이 반쯤 감은 눈으로 빙긋이 미소짓고 있다. 인도에 갔을 때 흔히 보던 아리아 계통도 아니고 네팔의 룸비니에서 보는 그곳 주민의 얼굴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전형적인 납작한 코에 찢어진 눈을 가진 동양인도 아니다. 부처가 정말 그렇게 생겼었을까 의문이다. ​

기독교나 불교의 종단들은 예수나 부처의 상을 만들고 그걸 신이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종교의식과 도그마를 만들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만들어 파는 종교상품보다 나는 스스로 진리를 찾고 싶었다. 일타강사의 강의보다 혼자 수학 문제를 풀고 싶은 학생같은 마음이라고 할까. 금과 은으로 장식된 십자가와 경건을 요구하는 신전의 모습보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인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

불교쪽에서 독특한 인물을 봤다. 정식 승려가 아닌 그가 부처상 앞에서 아함경 법문을 하는 걸 본 봤다. 아는 얼굴이었다. 군대훈련을 받을 때 내무반의 옆자리에서 같이 그 시절을 보냈던 전우였다. 그는 판사 생활 변호사생활을 하면서 ‘육조단경 읽기’를 비롯해 서른 여덟권의 저서와 역서를 편찬했다. 그는 초기 불교 경전들을 번역했고 지금도 양평의 강가에서 불경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고 했다. 평범한 한 자연인으로 그렇게 불교에 대해 공부를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추구했던 나의 방법에 대해 약간의 위로를 얻었다. 나는 교단이나 교리에 얽매이기 싫었다. 주석서나 해설서에 인식이 제한되는 것도 싫다. 법조인이 되어 판례를 신봉하다보면 멍텅구리가 될 때가 있었다. 그와 흡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도마처럼 의심도 하고 베드로처럼 어리석은 의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삼십대 중반쯤 성경에 몰입한 적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인간 예수의 고뇌와 삶을 형상화한 외국의 문학작품들을 읽기도 했다. 신앙을 기성의 교리나 신학 이론보다는 내 생애의 구체적 사건이나 경험으로 해석해 보기도 했다. ​

부처에 관한 책들도 읽으면서 예수와 비교해 보기도 했다. 헬만헷세의 싯타르타를 읽었고 여러작가들의 시각에서 본 인간 부처와 그 수행 과정을 읽었다. 불경을 읽어보기도 했다. 나는 부처가 되기 전 싯타르다에게서 진한 인간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먼저 카알라마등 여러 스승을 찾아가 배웠다. 고행도 했다. 그러다가 그 방법을 배척하고 혼자 수행을 하고 마침내 진리를 깨닫는다. 그리고 사십년 동안 그 진리를 가르쳤다. 중국의 문학가 노신은 부처의 가르침이 최고경지의 철학이라고 했다. 부처가 인간존재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에 나는 더 공감했다. 부처의 반대자들은 여성스캔들을 만들어 부처를 모략했다. ‘친차’라는 여성은 대중 앞에서 부처의 아이를 가졌다고 폭로했다. 반대자들은 순드라라는 여성을 부처가 사는 근처에 암매장 한 후 그 혐의를 부처에게 씌웠다. 고해의 세상을 건너가는 부처의 묵묵한 모습에서 나는 진짜 인간을 봤다. ​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청년이었다. 종교적 천재인 그는 민중에게 눈을 돌렸다.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평등하고 아름다운 이상향을 제시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라고 했다. 그 왕국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가난속으로 들어갔다.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를 누일 곳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빵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약속했다. 그는 십자가 를 통해 자진해서 죽음의 세계로 갔다. 파격적인 그의 죽음이 그가 한 최고의 설교 같았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좋고 인간으로서의 부처가 좋다. 예수가 부처를 만났다면 사랑했을 것이고 부처가 예수를 봤다면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일렀을 것 같다. 예수나 부처는 거대한 산이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그 산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먼지 같은 존재인 나는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종교가 달라도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에게서 진리를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마음속에 나타난 그분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도그마보다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