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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잘 익은 열매가 된 노인들

Joyfule 2024. 5. 11. 19:1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잘 익은 열매가 된 노인들  

 

실버타운에서 친해진 팔십대 노인과 점심을 먹고 난 후 정원의 벤치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오십년간 약을 연구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귀국한 분이다. 자식이 없는 그는 고국에 죽으러 왔다고 했다. ​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팔십대 과학자 노인의 일상이 궁금했다.​

“한국에서도 강의를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제가 그동안 강의해 온 동영상이 있는데 그걸 정리하고 있어요.”​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을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것 같다. 그가 덧붙였다.​

“틈틈이 피아노를 쳐 왔는데 작곡을 배우고 싶어요. 고등학교 동기회에서 글을 쓰라고 해서 한 달에 한 편씩 글을 쓰기로 했어요.”​

실버타운이나 주민센터 그리고 노인 복지관을 가면 노인들이 즐기도록 여러가지 시설들이 있다. 노인들이 진짜 즐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십여년전 세계일주 크르주선인 ‘퀸 엘리자베스호’를 잠시 타본 적이 있다. 모든 편의시설과 오락장이 갖추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쇼를 보고 춤을 추고 즐기도록 되어 있었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바다 위의 낙원이라고 했다. 서양의 백인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놀이에 심드렁해지고 배의 구석구석에서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을 했다는 영국인은 자신이 하던 셰익스피어강의를 들을 늙은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어떤 남자 노인은 구석에 박혀 바다도 보지 않고 내내 십자수를 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자기가 하던 일이 좋아하는 놀이로 변할 수 있구나 하는 걸 알았다. ​

나와 고교동기인 의사 중에는 칠십이 넘은 지금도 자기의 진료실을 굳건하게 지키는 친구가 많다. 찾아오는 환자들이 거의 없다. 아이들은 늙은 의사 선생님을 싫어한다고 했다. 직원도 간호사도 없다. 늙은 의사 혼자서 직접 접수부터 시작해서 치료까지 모든 일을 한다. ​

법원장을 지낸 선배 변호사 한 분은 실버타운에서 살면서 아침이면 서초동에 있는 자신의 법률사무소로 출근한다. 하루종일 빈 방에 정물같이 앉았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실버타운의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실버타운에 있는 시설이나 오락을 즐기는 것 보다 그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의사나 변호사는 일거리가 없어도 그냥 의사이고 변호사다. 그게 전문직의 장점인지도 모른다.​

늙어서도 일을 계속하기 위해 처절하게 자신을 낮추고 인내하는 눈물겨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사건관계로 알게 된 한 미녀탈랜트가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로 이십대 시절 십만명의 경쟁을 뚫고 신데렐라같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연만 맡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출연해 달라는 전화가 뜸해졌다. 왜 전화가 안오지?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섭외담당이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연은 아니지만 역할이 주연 못지않게 중요하고 자주나오는 배역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세월이 흐르고 나도 늙었구나를 하고 깨달았다. 그녀는 조연역할이라도 감사하며 받아들였다. 조연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방송국 섭외 담당은 더 이상 미안해 하지도 않았다. 방송국의 드라마 담당들은 그녀를 단역으로 한 단계 더 낮추었다. 단역이나마 할래면 하고 말라면 말라는 식이었다. 그녀는 단역이라도 감사하게 맡아 열심히 했다. ​

왕년에 미녀스타인 그녀가 한참 후배의 들러리를 서 준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걸 인내하고 참는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나를 이렇게 무시해? 하고 화를 내면 바로 도태되는 무서운 사회가 그곳이었다. 국민배우로 알려진 남자배우가 있다. 그는 연기할 수만 있다면 개런티를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신참인 후배여배우의 일부만 받아도 감사하며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배우들의 모습을 작가들이 칭찬하는 걸 봤다. 그 절제와 인내는 돈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오래 변호사를 해온 나나 친구들도 법률문서 한 장이라도 대서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며 그 일을 받아들인다. 대법관을 지냈던 분이 주민센터의 자원봉사자로 민원을 처리한다는 말도 들었다.​

기계도 시간이 흐르면 벌건 녹물이 흐르고 나사가 풀어진다. 인간도 세월이 흐르면 고장 난 기계 같은 노인이 된다. ​

아직 성능이 괜찮아도 고물 취급을 받는다. 그건 외면만 보고 판단하는 현상일 수 있다. 어떤 일이라도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왕년의 스타같이 세월과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떨어지기 직전의 잘 익은 열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가 맡은 소명을 담당하면서 돌아오라는 하늘의 명령이 있으면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그게 현명한 노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