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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6급 공무원의 댓글

Joyfule 2024. 2. 10. 20:5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6급 공무원의 댓글


6급 공무원이라고 신분과 이름을 밝히면서 글을 보내주신 분이 있었다. 짧은 글 속에서 건전한 삶에 대한 자세와 당당한 직업관을 엿본 느낌이었다. 나도 몇몇 공직생활을 경험했다. 사십여년전 나는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최전방부대로 갔을 때였다. 대위라고 하면 7급 공무원쯤 된다는 생각이었다. 육사출신 대령인 참모장은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중령들을 다루는 태도가 이상했다. 반말에 하대에 마치 어른이 아이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한번은 그 참모장이 모이라고 한 회식에 참석했었다. 소주잔이 한 두번 돌아간 후 참모장이 혼잣말 같이 “대령으로 진급했더니 참 좋단말이야”라고 했다. 어린애 같이 좋아하는 순진성 같기도 했다.​

“째째하게 잔술로 마시지 말고 오늘은 실컷 마시자”​

그는 앞에 있던 커다란 유리 재떨이에 소주를 병째로 콸콸 부었다. 그리고는 순차로 잔을 돌리면서 다 마시게 했다. 모두가 얼얼하게 취할 무렵이었다.​

“야 너희들 전부 일어서”​

대령이 명령했다. 그 한마디에 중령들이 전부 일어서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

“너희들 오늘 나한테 맞아야겠다.”​

대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앞에있던 작전참모의 배를 주먹으로 질렀다. 그가 ‘훅’하고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다른 중령들이 순서대로 얻어맞고 뻗었다. 주먹이 오기를 기다리는 내 앞의 고참 중령의 눈에서 하얀 눈물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내가 눈으로 그 눈물의 뜻을 묻자 그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

“참모장이 중령일 때 고참인 나보다 아래였죠. 나보고 맨날 형님 형님하고 굽실댔죠. 그런데 이제는 대령이라고 나를 두들겨 팹니다. 내가 모자란 건 엘리트코스인 정통육군사관학교를 나오지 못했다는 것 뿐입니다.”​

나는 그의 아픔과 한이 느껴졌다. 봉건적인 계급사회의 원색적인 장면을 마주한 것이다. 나는 맞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계급장이 대위일 뿐 인간이 대위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대령 계급장을 달고 조폭처럼 부하들을 막 다루는 그의 성숙하지 못한 인격이 그대로 보였다.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그 후에 받은 보복이 있었다. 그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조직사회 문화가 그랬고 의식들이 그랬다. 나 역시 그렇게 세뇌되어 있었다. ​

아내는 나를 ‘매를 버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회식 장소에서 부장 검사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때려주라고 한 적도 있었다. 장관이 나를 잘라버리라고 지시를 내려보낸 적도 있다. 나는 ‘미운오리새끼’였다. 지금 생각하면 다 그럴만했다. 대통령 직속기관에 있을 때 상관이 내게 비밀자금을 관리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자금에 관해서는 장부를 만들면 안된다고 했다. 입출금에 대해 머리 속으로만 기억하고 나중에 기억마저 털어버리라는 명령이었다. 내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내게 왜 국가의 비자금을 맡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들기만 했다. 어느 날 대통령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영부인이 책을 만드시는데 겉표지를 비단으로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 비용을 보내라는 것이다. 나는 국민의 세금을 그리고 국정수행을 위해 써야 할 돈을 왜 그런데 써야 하느냐고 되물으면서 거절했다. 담당 비서관이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리 미련해도 내 앞날이 짐작됐다. 대통령은 왕이었다. 두꺼운 계급의 성벽 뒤에서 노예 같은 굴종과 인내가 요구되는 게 내가 젊었던 시절의 조직사회였다. 왕조시대 평민이던 나의 조상은 ‘선한 일을 했는데 왜 삼족을 멸한다’는 것이냐며 왕에게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나는 그 유전자를 받은 것 같다. 민주화란 선거로 공직자를 뽑는 것만이 아니다.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은 봉건적인 의식을 뽑아야 하는게 아닐까. 대통령의 불충한 배신자로 찍힌 한 국회의원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 의미를 깊이 받아들였다.​

9급 공무원이든 대통령이든 일등병이든 장군이든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직무상의 정당한 명령에는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 공무원 사회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순경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경찰서장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사회가 건강한 게 아닐까. 나는 자기 직급에 자존감을 가지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을 존경한다.